텐안먼 사태 혼란속 덩에 의해 발탁
공산당 3세대 테크노크랫 지도자
자본가 입당 기초, 3개 대표론 제시
중국 공산당 14기, 15기 총서기 재임
수교 후 1995년 中 정상 첫 방한 인연
[베이징=뉴스핌] 최헌규 특파원 =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발탁돼 개혁 개방을 활짝 꽃피운 실천가, 자본가와 사영기업가 입당 허용으로 중국 기적의 초석을 닦은 지도자'. 향연 96세로 11월 30일 타계한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겸 국가주석에게 따라붙은 레테르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공산당 3세대 지도자로 덩샤오핑이 싹을 틔운 개혁 개방을 충실히 이행해 중국이 G2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데 있어 탄탄한 기초를 마련한 지도자로 평가 받는다.
상하시 서기로 지방관료였던 장 전 주석의 정치적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1989년 6.4 톈안먼 사태였다. 그는 텐안먼 사태의 혼란스런 정치환경 속에서 미래를 걸머질 지도자로 지목됐다. 텐안먼 사태 당시 실권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은 급진적 성향의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을 낙마시킨 뒤 상하이 서기로 있던 장 전 주석을 끌어올렸다.
중앙 정치 무대로 올라온 장쩌민 전 주석은 중국 공산당 제13기 8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에 진입, 바로 총서기에 선출된다. 이후 장 전 주석은 중국 공산당 14기(1992년~1997년)와 15기(1997년~2002년) 2기를 합쳐 총 13년간 중국 공산당 총서기겸 국가주석으로 재임했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이 비록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지만 균형 감각과 유연성이 뛰어난 지도자로서 중국의 명운이 달린 개혁 개방을 무리 없이 추진해 나갈 적임자로 판단했다는 후문이다. 덩은 후계 발탁과 관련, 장쩌민이 테크노크랫 관료라는 점도 높이 평가한것으로 전해진다.
장쩌민 전 주석은 정치 무대에서 혁명 원로 자제들의 계파인 태자당 소속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과 힘을 합쳐 당 정 군에 걸쳐 방대한 상하이방(上海幇) 인맥을 구축, 권력 기반을 굳혔다.
장쩌민 전 주석은 덩사오핑의 개혁개방을 이행하기 위해 3개 대표이론(선진 생산력, 선진 문화, 광범위한 인민이익 대표)을 제시했다. 3개 대표이론은 민영 기업가와 지식인의 공산당 입당 문호를 연 혁명적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베이징=뉴스핌] 최헌규 특파원 = 정쩌민 중국 전 국가주석이 2022년 11월 30일 향년 9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2022.11.30 chk@newspim.com |
이로써 공산당의 계급 기초는 노동자 농민에서 '자본가'로 확대됐다. 공산당 영도(리더십)의 외연이 넓어진 것은 물론 통치기반도 그만큼 강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히 개혁 개방 정책에도 한층 탄력을 붙었다.
장쩌민 전 주석의 3개 대표이론은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장 전 주석의 후임인 후진타오 주석의 과학적 발전관과 함께 당장에 삽입됐다.
장쩌민 전 주석은 1926년 양쯔(楊子) 강 하류의 빼어난 인문 도시 장쑤성 양저우(楊州)의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1943년 난징중앙(南京中央)대 전기기계 학부에 입학했다. 장 전 주석이 상하이 교통대 출신으로 알려진 것은 이 학교가 훗날 자오퉁(交通)대로 통합이 됐기 때문이다.
장 전 주석은 졸업 전해인 1946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1947년 졸업후 아직 국민당 치하였던 상하이에서 미국 디젤 엔진 회사에 입사한다. 공산당이 1949년 상하이를 함락한 뒤 그는 회사의 당 지부장이 됐다. 1955년에는 소련 모스크바로 건너가 2년 동안 '스탈린 자동차' 회사에서 연수를 하기도 했다.
1966년 중국 대륙을 강타한 문화혁명은 장 전 주석에게도 만만치 않은 시련이었다. 지식 관료 계층으로 지목돼 어려움을 겪었지만 대체로 문혁의 광풍을 무난하게 헤쳐 나왔다. 문혁 종료후에는 외교국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관료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장쩌민 전 주석은 1980년 차관급인 국가대외투자관리위원회와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 전자공업부 부장(장관)으로 승진 가도를 달렸다. 1985년 장 전 주석은 중앙 무대 진출의 등용문이나 마찬가지인 상하이 서기에 발탁됐다.
장 전 주석은 2002년 16대에서 후진타오 전 총서기겸 국가주석에게 총서기 자리를 넘겼지만 2004년까지 2년이나 더 군사위주석으로서 군권을 유지, '태상왕'으로서 막후 권력을 행사해왔다.
장쩌민 전 주석은 1995년 신 중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이때 양 정상은 한중 외교 관계를 '협력 동반자'관계로 규정했다.
베이징= 최헌규 특파원 chk@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