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한·중 관계 속에 열린 외교장관회담
뚜렷한 인식 차...관계 개선 필요성엔 공감
조태열 "갈등 확인하고 해소로 가는 과정"
한·중 관계 회복은 '외교적 자율성'이 관건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서로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앞으로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해 새로운 모멘텀을 만들어서 협력하기로 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합의 사항이자 가장 중요한 성과다"
한국 외교장관으로는 6년 6개월만에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고 돌아온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왕이(王毅)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과 회담에 대해 이같이 총평했다. 조 장관은 14일 베이징 특파원단과 간담회에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솔직하게 전달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현재 한·중 관계는 갈등과 이견을 확인하고 해소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지난13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조태열 외교장관과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외교부장 겸임)의 외교장관 회담을 갖고 있다. [사진= 외교부] 2024.05.13. |
조 장관의 언급대로 현재의 한·중 관계는 정상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2년 동안 정부는 미국, 일본과의 관계 강화에 외교적 역량을 집중하면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는 후순위로 미뤘다. 그 결과 한·중 관계가 수교 이래 최악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이같은 시점에 이뤄진 조 장관의 중국 방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회담에서 양국 장관들은 서로의 확연한 입장 차이를 확인했지만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양측 모두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데는 공감대를 이뤘다는 점에서다.
◆'민주주의 원칙' VS '수교의 초심, 간섭 배제'
회담 모두발언과 양측이 배포한 결과자료에는 한국과 중국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높이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이번 회담이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조 장관은 13일 회담 모두발언에서 "민주주의 국가로서 우리는 분명한 원칙과 기준을 바탕으로 사안별, 분야별로 균형 감각을 갖고 다른 국가들과 협력해오고 있다"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의 기조를 설명한 말이었다. 미국, 일본과의 협력 강화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조 장관이 왕 부장에게 탈북민 강제북송에 대한 우려를 전달한 것도 이같은 원칙의 연장선상에 있다.
또한 조 장관은 북·러 군사 협력, 북한의 대남 도발 등을 언급하며 중국에게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건설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이 중국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달한 셈이다.
중국 외교부가 공개한 회담 결과자료에는 중국 측이 한국에 원하는 핵심적 내용이 나온다. 왕 부장은 조장관에게 "한·중 수교의 초심(初心)을 유지하고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교의 초심'이란 대만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다.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킨다는 것을 전제로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는 점을 상기시킨 것이다.
'간섭 배제'란 한·중 관계가 미국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 목적의 안보, 경제 정책에 한국이 동조해 상호이익을 해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다. 왕 부장이 언급한 보호무역주의 반대, 원활한 공급망 보장 등도 미국을 추종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현재의 한·중 관계는 중국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며 한국과 중국 모두에게 해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태열 장관(오른쪽)과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이 지난 13일 회담장인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산책하며 담소하고 있다. [사진=외교부] 2024.05.13. |
◆관계 개선 의지 확인
이같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분명히했다. 양측 발표문은 공히 '난관' '도전' 등의 용어를 포함하면서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조 장관은 한·중 관계 회복이 장기적 안목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양국 간 협력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와 규모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 기반을 구축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이를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아닌 양국이 함께 노력해 상호 신뢰가 증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장관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작은 것부터 관리해 나가면서 협력의 모멘텀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면서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고위급 교류를 포함한 전략적 소통의 확대임을 강조했다. 왕 부장의 방한 초청도 이같은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시진핑(習近評) 국가주석의 방한도 염두에 둔 포석이다.
중국 측도 메시지 관리에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왕 부장은 "양국 간 근본적인 이해 충돌은 없다"면서 화합과 다양성을 강조했다. 현재 조성된 한·중 관계의 난관은 구조적인 대립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상대를 비판하기 보다 상호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비중을 뒀다.
중국은 자신들의 입장을 거침없이 밝혔던 과거와 달리 민감한 사안에 대해 표현을 자제했다. 한반도 문제에 건설적 역할을 해달라는 주문에는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고 받았고,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에 대한 조 장관의 비판에도 '북한의 합리적 안보우려 해소'와 같은 북한을 감싸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탈북민 강제북송 문제에 대해도 왕 부장은 국내법과 국제법, 인도주의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조태열 외교부장관과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이 지난 13일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회담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중국외교부 홈페이지] 2024.05.13. |
◆갈 길 먼 관계 회복...한국 '외교적 자율성' 가져야
이번 한·중 외교장관회담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악화일로로 치닫던 양국 관계를 멈춰세우고 반전을 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하지만 한국과 중국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이 양국 관계를 가로막는 구조적 요인이기 때문에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중 관계를 제약하는 요소들은 앞으로도 계속 돌출될 수 있다.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통해 한국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인식을 바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한·미 동맹을 최우선으로 하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기조가 바뀔 가능성도 없다. 당장 오는 7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 때 한·미·일이 따로 만나면 중국이 극도로 민감해 하는 대만 문제에 대해 3국이 더 깊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이 한·미 동맹을 앞세우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려면 중국과 소통을 확대하면서 한국의 외교적 목표가 중국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국책 연구기관의 한 중국 전문가는 "한·중 간 고위급 교류를 확대하고 이를 통해 한국이 미국의 대외전략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전략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opent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