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리움미술관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이불 작가의 조각, 대형 설치, 평면, 드로잉과 모형 등 150여 점을 종합적으로 조망한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1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이불 작가의 대규모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 개최 기념 언론 간담회에서 "이불 작가는 설명이 불필요한 작가이기도 하다. 전시는 시대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통찰하는 사유가로서의 작가 모습을 조명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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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리움미술관에서 대규모 서베이 전시를 선보이는 이불 작가. 2025.09.01 alice09@newspim.com |
작가는 1980년대 후반 한국의 사회정치적 맥락과 맞물린 급진적 작업을 선보이며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신체와 사회,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의 관계와 이를 둘러싼 권력의 문제를 폭넓게 탐구하며 동시대 미술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해 왔다. 1990년대 후반 주요 미술관 전시와 비엔날레를 통해 '사이보그', '아나그램', 노래방 연작 등을 발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 2005년부터는 근대의 유산과 유토피아적 비전을 탐구하는 건축적 설치 연작 '몽그랑레시'를 전개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했다. 2010년대부터는 평면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며 새로운 형식적, 재료적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그간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는 이불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조망하는 대규모 개인전이 이어져 왔다. 이에 반해 국내에서는 프로젝트 규모의 전시가 열려 왔고,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 개인전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간의 초기 작업과 퍼포먼스를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다.
리움미술관의 이번 전시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지난 30여 년간의 작업을 선보이는 국내 첫 대규모 전시이자, 아시아에서는 13년 만에 최근작을 포함하여 기획된 서베이 전시로 주요 해외기관으로 순회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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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이불: 1998년 이후' 전시 전경. 2025.09.01 alice09@newspim.com |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작가는 많은 분들이 '여전사', '페미니즘 아티스'라는 수식어로 알고 계시는데, 작품 활동으로 가부장적인 사회에 코멘트를 던지는 활동을 하면서 '여성'이니까 더욱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작가는 '아시아', '한국 여성',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을 원치 않으셨던 분"이라며 "이번 전시로 지속적으로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 그 관계를 만들어 오는 작가의 작업들이 어떤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지, 작가의 어떤 폭넓은 세계를 조명하는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개했다.
'이불: 1998년 이후' 전시에서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기획전시장의 입구 슬로프 공간에 설치된 17m에 달하는 은빛 비행선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이다. 이에 대해 김성원 부관장은 "작가가 벌룬으로 인해 나는 소음을 공항 대합실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달라는 말을 전해왔다. 이불 작가의 여정으로 들어가기 위한 비행선을 타기 위해 대합실에 있다고 생각해주시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곧이어 블랙박스로 이어지는 전시에서는 대규모 거울 설치 작업 '태양의 도시 II'가 벽과 바닥을 감싸고 있다. 이 공간에는 작가의 초기 대표작인 '사이보그 W6', '무제(아나그램 레더 #11 T.O.T.)',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노래방 작업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 그리고 근대 건축의 유토피아적 상징을 차용한 '오바드'가 함께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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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이불: 1998년 이후' 전시 전경. 2025.09.01 alice09@newspim.com |
특히 대규모 거울 설치 작업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고 몰입적인 세계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블랙박스 공간에 설치된 작품들은 서로 다른 연작이지만 인간과 기술의 관계, 완전성을 향한 열망, 유토피아적 이상과 그 좌절이라는 공통된 질문을 던지며 연결성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곽 전시기획실장은 "작가는 1990년대 후반브토 신체와 기계의 혼종성을 드러내는 '사이보그' 연작을 선보였다. 그 중 6번째를 저희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작품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인류의 완전성을 향한 욕망과 인간, 기술, 권력을 둘러싼 복잡한 상관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라운드갤러리에서는 2005년 이후 전개된 '몽그랑레시' 연작이 전시의 중심을 이룬다. 곽 실장은 "'몽글랑레시' 연작은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제시한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을 출발점으로 한다. 작가는 보편적이고 단일한 서사 대신 개인과 집단의 기억, 역사의 파편,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를 뒤섞는다"고 말했다.
또한 201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평면 연작인 '퍼듀'와 '무제(취약할 의향–벨벳)'도 선보인다. 이들 연작은 내용적으로는 작가의 대표적 조각 연작의 주제와 모티프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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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이불 작가의 '몽그랑레시: 바위에 흐느끼다'. 2025.09.01 alice09@newspim.com |
관람객은 전시 공간을 이동하며 은빛 비행선, 거울 미로, 폐허를 닮은 구조물, 아득한 별과 가상의 공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작가의 초기 드로잉과 모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곽준영 실장은 "작가는 조각까지만 원하는 걸 다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드로잉을 항상 하는데 캔버스는 자유를 제공하는 공간이 된다. 드로잉을 하면서 작품을 개념화하고, 모형을 만들어 개념을 구축시켜 나간다. 드로잉과 모형을 통해 작가가 상상한 버전과, 만들고 싶었던 버전들이 복합적으로 나오는데 실제 작업과 비교하면서 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전시장에는 근대성의 유산인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오바드 V'가 설치됐다. 곽 실장은 "해당 작품은 2019년 남북정상회담과 그게 이은 판문점 선언이 계기가 됐다. 당시 남과 북은 군사적 긴장 완화와 화해를 위해 각각 11개의 감시초소를 시범 철거하기로 했고, 작가들은 '리얼 DMZ 프로젝트' 일환으로 철거된 감시초소의 폐자재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불 작가 감시초소 폐자재를 재구성해 타워 형태의 구조물인 '오바드 V를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천지'와 '스턴바우'이다. 특히 '천지'에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녹아있기도 하다. 곽준영 실장은 "'백두산 천지를 모티브로 한 '천지'를 받치고 있는 욕조는 박종철 고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욕조이다. 천지는 맑고 깨끗하지만, 욕조에 검은 잉크 물을 담아놨다. 그 위에 스턴바우 조각을 매달아 반사 효과를 낸 작품"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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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이불: 1998년 이후' 전시 전경. 2025.09.01 alice09@newspim.com |
이불 작가 역시 작업의 변천사가 있다. 초기에는 '신체'를 주 소재로 삼았다면 이후에는 퍼포먼스와 조각으로 변화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당시에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돌아보면 우리의 삶과 비슷한 것 같다. 삶도 나에 대한 관심이 주였다가 점점 주변으로 확장되지 않느냐. 작업도 그 연장선이라 봐주시면 될 것 같다"고 답했다.
또한 자신을 둘러싼 수식어들에 대해서도 "저는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다. 그건 저에게 있어 중요한 게 아니다. 저는 그저 관심사가 있었고, 주변의 삶과 사회적 맥락에서 작업이 나온 것"이라며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제 의도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전했다.
리움미술관은 전시 연계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준비했다. 오는 27일 오후 4시에는 이불 작가의 '아티스트 토크'가 마련됐으며 10월 중에는 곽준영 리움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의 '큐레이터 토크'가 준비됐다. 또 11월 중에는 이불 작가의 '몽그랑레시'를 중심으로 한 연구자의 강연 및 대담 세션이 준비될 예정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이불 작가의 대규모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는 오는 4일부터 2026년 1월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진행된다.
alice0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