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에 영재학교 거쳐 외무성 발탁
'장성택 처형' 불똥에 한국행 결단
"대학생 아들 보며 탈북 잘했다 확신"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 북한에서 외교관의 지위는 남다르다. 철저하게 통제되고 폐쇄된 체제에서 해외를 나갈 수 있고, 장기 체류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건 특혜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벗어나 망명한 뒤 우리 사회에 정착한 많은 탈북민 가운데 몇몇 외교관들 앞에 '엘리트'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진명(51) 씨는 북한의 주요 외교 거점 가운데 하나인 베트남에서 3등 서기관으로 일하다 탈북했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12살에 최고의 영재들만 갈 수 있다는 평양외국어학원에 입학했고, 외무성 내에서도 부러움을 사는 잘나가는 외교관이 됐다. 그런 그가 왜 탈북이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까.

1975년 평양시 만경대구역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진명 씨는 명석한 두뇌로 평양외국어학원에서 불어를 전공했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평양외국어대학교 진학이 자동으로 보장됐지만, 대학 진학을 앞둔 1991년 고위급 자녀들의 군 복무 의무화 조치로 공군에 입대해 11년간 항공기 기술 정비원으로 복무해야 했다.
함경북도 청진시 비행장에서 매일 거대한 항공기 엔진을 뜯고 나사를 조이는 혹독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는 "당시에는 왜 이 머나먼 변방에서 기름때를 묻혀야 하나 싶어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망스러웠던 그 11년간의 정비 경험과 몸으로 익힌 기술 감각은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시절과 현재 남한에서의 거친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자양분이 됐다는 게 한 씨의 말이다.
노동당원으로 만기 제대한 후 그는 평양외국어대학교보다 가기 힘든 김일성종합대학 불어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대학 생활에 필요한 금전적 문제를 도움 받을 곳이 없어졌다.
◆신참 외교관 보고서에 최고지도자 '친필 서명'
기자와 만난 한 씨는 "집안이 친가와 외가 모두 김일성과 이른바 항일빨치산을 함께 했다는 공적으로 누릴만큼 누리고 사는 권세 있는 집안이었다"고 말했다. 가세가 기울면서 가장의 역할을 떠안게 된 그는 컴퓨터를 직접 조립해 판매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굶주림 속에서도 밤새 책을 놓지 않는 열정을 이어갔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한 씨는 외무성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외무성 신참 시절 작성한 보고서에 최고지도자의 친필 서명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2013년 1월 주베트남 북한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파견되며 본격적으로 외교관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한 씨는 "북한에서 외교관은 일반 주민뿐 아니라 권력이 어느정도 이상 있는 사람들도 선망하는 직업"이라며 "일단 '외(外)'자가 붙으면 다 외교관으로 해외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당과 군부 등 권력의 정점에 이를 사람들도 사위를 외교관으로 얻으려는 것도 딸을 어떻게 해서든 외국에 나가 살 수 있게 하려는 생각에서라는 귀띔이다.
베트남 주재 북한 대사관 외교관으로 부임한 그는 베트남 공립대학교에서 1년간 베트남어를 배우며 전문성을 키워나갔다. 그가 관리하고 처리하는 업무는 서류 한 장의 분실도 허용되지 않을 만큼 엄격했다.
하지만 북한 외무성에 근무할 때보다 급여가 높았고, 가족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도 생기면서 어렵게 공부한 노력이 비로소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았다. 한 씨는 "당시 월급이 400유로(한국돈 66만원 수준)에 불과해 한국 기준으로 보면 형편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평양에서보다 훨씬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일하는 동안 고향으로 돌아갈 때 가져갈 물품들을 하나씩 모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날 장성택 숙청 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운명도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그에게 직접적인 생사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당시 금성중학교 교장이던 그의 외삼촌이 장성택 측근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연좌제의 공포 속에서 평양에서 파견된 보위부 검열조가 대사관으로 들이닥쳤고, 그는 검열 관계자와의 술자리에서 북한으로 돌아갈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2014년 12월 탈북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가장 먼저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신분을 밝혔으나 '근무시간이 끝났으니 내일 다시 걸라'는 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와 큰 실망을 하기도 했다. 한 씨는 "며칠 뒤 가까스로 연락이 닿아 한국행을 이룰 수 있었다"면서 "아마도 당시 처음 내가 한국 대사관과 통화에 실패한 건 자동응답기 소리를 듣고 실제 대사관 직원의 육성인 것으로 착각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본래 그는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불어가 통하는 프랑스로의 망명을 계획하고 라오스와 태국 경로를 구상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정부와 연락이 닿아 베트남 당국의 묵인 아래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북한 보위부와 대사관 측이 그의 탈 출을 인지하고 추적에 나섰으나 다행히 그 감시망을 따돌리고 마침내 2015년 1월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정착 초기 그는 국책 연구기관인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임용되어 안정적인 전문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북한 투자 자문위원 활동 및 전자책 발간 등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다.
◆"배급제 익숙했던 내게 자본주의는 어지럼증 같았다"
하지만 남한의 한 사업가와 동업을 했던 게 코로나19로 인해 완전히 실패하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한 씨는 "배급제의 타성에 익숙했던 저에게 모든 책임을 개인이 져야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극심한 어지럼증과 같았다"면서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나를 철저히 맞춰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엘리트 외교관에서 선반공으로의 극적인 변신도 이런 과정의 하나였다. 정착 실패의 위기감 속에 그가 찾은 건 건설 현장이었다. 거친 노동으로 땀을 흘리며 나이 쉰에 이른 탈북민이 안정적으로 살아나가려면 '대체 불가능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 씨는 곧바로 기술교육원에 등록해 전기기능사를 취득 했으나 억센 북한 사투리 탓에 고객 대면이 필요한 직군의 취업이 어려웠다. 낙담하는 대신 그는 안산 공단의 거친 선반 가공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현재 그는 하루 12시간씩 쇳가루가 날리는 공장에서 범용 선반과 CNC 기계를 다루고 있다. 신기하게도 30여 년 전 공군 비행장에서의 11년간 정비 경험 덕분에 기계를 다루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과거의 시련이 새로운 삶을 떠받치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는 푸른 작업복을 입고 선반을 돌리고 있지만 엘리트 지식인으로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최근에도 주요 매체에 북한 정세분석과 관련한 칼럼을 연재하고, 각종 유튜브 방송에도 출연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고된 노동을 이어가면서도 퇴근 후에는 불어 원서를 읽고, 밤이면 자신의 파란만장 한 인생사를 책으로 엮어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문단에 등단하는 꿈도 갖고 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은 매일 아침 출근할 직장이 있다는 점이다. 또 정직하게 땀 흘린 뒤 보람차게 퇴근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한 씨는 탈북민 정착지원 기관인 남북하나재단이 발간하는 월간지 '하나'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탈북민들의 정체성은 '북한에 고향을 둔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강조했다. 남한 사회에 무조건 동화되려고 고향의 뿌리를 억지로 잊을 필요는 없다는 취지다. 그는 "고향의 사투리와 좋은 문화를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며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고의 엘리트로서의 살면서도 늘 억압과 체제 순종을 강요당했던 북한 외교관으로서의 삶 보다 선반공으로 땀 흘리는 지금의 자유와 행복이 소중하다고 한 씨는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제 대학생이 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선택이 미래를 위한 최고의 결단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자유 대한민국에서의 낯선 환경에 맞서 낮은 자세로 일상에서의 행복과 미래를 꿈꾸는 '엘리트 외교관' 한진명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던지고 있다.
<뉴스핌-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yjlee@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