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도 들녘엔 가을이 내리고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 그리움이다. 거짓 없이 진실 되게 생각하는 것이 그리움이다. 세상물정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은 나이가 되어 애타는 마음으로 그리워했던 남도로 떠나던 날 달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얗게 밤을 뒤척였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서울을 떠나는 속뜰은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들며 가을 한 복판으로 망아지처럼 뛰어갔다.
어떤 식자는 남도 봄 색을 이렇게 말했다. 산그늘 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햇살을 받으며 밝은 광채를 발하고, 길가엔 개나리가 아직도 노란 꽃을 머금은 채 연둣빛 새순을 피우고, 해묵은 동백나무에 선홍빛 동백꽃이 점점히 붉은 홍채를 내뿜고, 목이 부러지듯 잔인하게 떨어진 꽃송이들은 풀밭에 누워 피를 토하고, 토담 위 키 큰 살구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원색을 남도 봄 빛깔이라 했다.
내가 본 남도 가을색은 이랬다. 강진만 구강포 갈대에서 반사된 가을볕이 중년 여인의 호수같이 깊은 눈 속에 은은하게 투영될 때, 끝없이 펼쳐진 들녘의 벼 알갱이 위로 두륜산 화강암 금기(金氣)가 일렁일 때, 마당가 우물물로 우둑우둑 세수한 농부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윤기 있는 웃음을 지을 때, 대청마루에 닿을락 말락 스치는 치마말기를 부여잡고 조신하게 걸어가는 종부(宗婦)의 손등에서 남도의 가을 색을 볼 수 있다. 남도의 봄 색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남도의 가을 색은 가슴으로 듣는 것이라 하겠다.
영암 월출산을 끼고 높낮이를 하며 숨 가쁘게 달리던 버스가 답사 마수걸이 강진 땅에 도착하니 중화참이었다. 관상가들은 해가 가장 밝은 정오에 관상을 본다. 그래야만 그 사람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남도 색깔을 보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에 우리는 남도 일번지에 도착한 것이다.
당산나무 아래에서 바라 본 칠량 뜰과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혼이 서린 만덕산엔 풍성한 남도 가을색이 다북다북 내려 앉고 있었다. 그런 가을색은 판소리 다섯 바탕 눈 대목들과 어울려 우조·평조·계면조를 밟고,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장단을 타고, 상쇠를 따라, 어깨춤을 추며 남도 들녘을 아우르고 있었다.
2. 다산 초당엔 북어국 백반체 글씨가 여전하고
우리들이 점심을 먹은 강진군 칠량면 수양식당은 순박했다. 월척은 됨직한 조기를 비롯하여 꼬막, 나물 등 상다리가 휘도록 반찬이 차려져 나왔다. 식당 주변엔 새마을 운동 당시 지어졌음직한 슬레이트 지붕의 나라의원, 복원다방, 천일택배집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엄마 눈빛으로 답사객들을 맞아 주었다.
남도 특유의 넉넉한 인심 밥상을 물리치고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집필한 다산 초당 입구 귤동 마을에 도착하니, 거대한 한옥 여러 채가 고압적인 자세로 우릴 맞이했다. 어쩐지 다산의 실용정신과는 거리가 있다는 느낌에 초당도 가기 전 불편스런 맘이 꿈틀대고 있었다.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지를 네 번 옮겼는데, 총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이 곳 다산에서 11년을 살다 유배에서 해제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유배자들은 대개 자살을 생각한다고 한다. 언제 군왕이 내리는 사약이 도착할지 몰라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을 매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다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한다. 유배지인 강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반겨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갈 곳 없어 상심한 채 염세적 삶을 보내고 있을 무렵 거처하던 주막집 노파가 '아이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만들었는데, 왜 남자의 성씨를 따라야 하나? 그런 법도가 어디에 있나?'라고 다산에게 물었다.
공자, 맹자, 주자도 답할 수 없는 여염집 노파의 질문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살아야겠다는 의욕과 함께, 실용학문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다산은 이 주막집에서 4년을 지냈고 그 집 당호를 '마땅히 지녀야 할 네 가지'라는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 했다. 그러나 그 네 가지 내용과 주막집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산 초당으로 오르다 보면 괴상하게 생긴 소나무 뿌리 옆에 다산이 강진읍내와 절집을 떠돌다가 이 곳 다산으로 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외가 쪽 친척 윤종진의 무덤이 보인다. 난 이 윤종진의 무덤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무덤 앞에 위패처럼 생긴 비석에 불교에서 쓰는 만(卍)자가 새겨진 것인데, 이 만자가 무속에서 쓰는 끝이 한 번 더 꺾인 만자라는 사실에 당혹스러울 정도로 놀랐다.
어떻게 주자학이 판을 치던 시대에, 불교글자가 그것도 무당들이 요즘의 하느님 반열에 올려놓은 삼신을 형상화한 끝이 한 번 더 꺾인 만자를 새겨 놓을 수 있었을까? 증폭되는 궁금증을 안고 대숲 자드락길을 거칠게 호흡하며 올랐다.
초당에 올라서니 뭔가 부자 집에 온 기분이었다. 이름은 초당이라 했지만 정면 5칸 측면 2칸의 커다란 팔작 기와지붕이었다. 툇마루도 넓고 방도 큼직하여 유배객이 살던 집 같지가 않았다. 보존회의 잘못된 판단에 따라 잘못 지어진 집이었다.
다산에 대한 예비지식 없이 온 사람들에게 유배객 팔자가 늘어졌다는 잘못된 인식만 심어주는 꼴이었다. 억장이 무너져 왔다. 다산 초당에선 다산의 정신을 오롯이 느낄 수 없었다. 인위적인 것으로 덧칠하고 각색한 유산을 보며 가을걷이가 다 끝난 들녘에 꽂혀있는 허수아비 심정이 됐다.
그래도 이런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이 '술에 곯아떨어진 다음 날 아침 밥상에 나온 북어 국 백반 같다.'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다산동암(茶山東庵) 현판과, 유배에서 해제되어 초당을 떠나며 썼다는 정석(丁石) 글씨였다. 특히 바위에 새겨진 정석(丁石)은 다산의 전 생애가 응고된 글씨 같아 옷깃을 여미게 했다.
초당을 내려오면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이 위대한 역사의 영웅을 공경하고 배워야 함이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은 꽉 차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득철(得哲)이었다.
변상문 전통문화연구소장 (02-794-8838, sm290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