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홍승훈 기자] 기자의 지인은 건설현장서 건물 경비업무를 하고 있다. 최근 모임에서 만난 그가 꺼낸 얘기가 재미있다. 경비로 취직하니 현장 동료들이 물어보더란다. "혹시 그 분(건설사 오너)하고 친인척이냐"고.
이 같은 호기심은 단지 그 지인이 현장을 담당하는 건설사 오너와 성과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라고 몇차례 답했다고 한 그 지인은 괜히 그랬다며 지금 후회를 한다. 그냥 웃고만 넘어갔어도 사람들은 그려러니 믿었을 수 있고, 그러면 일하는데 한결 편했을 것이란 아쉬움을 뭍힌채. 아마도 전 직장에서 시공사 오너 측근 소개로 일했던 경비가 수월하게 일했던 기억이 남아 그랬으리라.
건물 경비 일을 하는 데도 소위 '뒷배경'이 작용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굴지의 민-관기업 임직원, 심지어 최고경영자(CEO)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비판받고 근절하려 해도 지연 학연 등의 인맥 인사가 사라지기 쉽진 않다. 정부가 영향력이 닿는 기관장 인사 때마다 학연과 지연을 추적해 '소설'을 써대는 기자들 역시 이 같은 현실을 알기 때문이다.
넉 달 동안 경영공백을 이어오던 대우증권이 홍성국 부사장(리서치센터장)을 신임사장으로 낙점했다. 이사회가 두 차례 무산되는 내홍 속에 삼세번 만에 겨우 일단락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애초 의도는 빗나갔다. 청와대가 점찍었던 박 모씨 낙하산 시도는 예상보다 빨리 세간에 알려지며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무산됐다. 이어진 내부출신 후보자들 경합에선 이전투구 속에 결국 가장 조용한 행보를 보인 후보가 결과적으로 최종 낙점됐다. 혹자는 어부지리(漁夫之利)란 말을 하지만 실상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게 기자 생각이다.
그래도 상흔은 컸다. 뚜렷한 명분없이 떠밀려난 김기범 전 사장, 이후 내부 줄서기로 흔들렸던 조직, 막판 서금회(서강대금융인회) 뒷심 논란까지.
대우증권은 과거 증권업계 독보적인 시장점유율과 파워를 보유했었다. 하지만 주인없는 회사로 10여년. 지금은 솔직히 '고만고만한' 회사가 됐다. 자기자본과 점유율 면에서 겨우 선두 체면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우리투자증권과 NH농협증권이 합치면서 2위로 내려앉게 된다.
자본시장에서 민간기업과 경쟁하고, 글로벌시장에서 굴지의 IB(투자은행)와 치열한 한 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회사 입장에선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같은 현실에 대해 지주회사체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은행문화를 중심으로 증권업을 컨트롤하며 낙하산 인사를 통해 좌지우지하는 행태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산은지주 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작 산은 CEO 인선에 정치적 입김이 작용하는 현실인데, 자회사인 대우증권 대표이사를 앉히는데 이들 또한 윗선의 눈치를 어찌 보지 않을 수 있나.
인선 과정에서 만난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대우증권 사장 인선 초기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산은 회장에 전화를 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청와대는 개입 안 할테니 말 안나오게 잘 하시라고. 박 모씨에 대한 낙하산 비난이 한창 쏟아진 뒤였다. 이는 역으로 청와대의 개입설을 방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윗선의 선의(?)대로 하려고 해도 곧바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그래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자회사를 둔 산은의 현실이다.
정부나 정치 관점에서 보면 대우증권의 생존과 성장은 부차적인 이슈 같다. 기관장과 임원이 내 사람이냐 아니냐, 즉 내 사람을 내려보내는 창구로 활용되는 게 대우증권 뿐 아니라 대부분 공기업과 정부 영향력이 미치는 기관장 인선 현실이다.
이 같은 관행이 자리잡다보니 기업 내부에서도 정상적인 실력과 성과보다는 줄서기 문화가 판을 친다. 능력있는 사람이 자연스레 빠져나가는 결과를 빚고 조직문화는 흐트러진다.
혹자는 공적자금이 들어간 기업에 대해 정부 영향력은 당연한 게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일단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공적자금은 회수해 국민에게 돌려주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럴려면 기업가치를 올려 팔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계열사로서 장기적인 관점으로 제대로 된 회사를 만들면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봤을때 산은은 원칙이 없다. 언제는 판다고 했다 또 아니라고 한다. 최근 버전(version)은 시장 상황을 봐서 매각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여전히 모호한 입장이다.
전일 홍 신임사장이 낙점된 후 세간에선 벌써부터 낙하산 임원설이 나돈다. 경영관리 총괄 부사장급을 산은에서 대우증권으로 내려보낸다는 것이 소문의 골자다. 인사, 기획 등 대표이사 수족에 해당하는 사람을 내려보낸다는 건 대우증권을 여전히 주무르겠단 얘기고, 또 인사창구로 계속 쓰겠다는 거다.
사람을 자리에 앉혔으면 업(業)에 집중할 수 있게 책임경영체제로 가고 그 실적과 성과에 따라 평가를 해야하지만 현실은 자꾸 엇박자다. 사고치지 않고 현상 유지만 하라는 게 산은의 속내같다.
하지만 이러면 그렇잖아도 퇴보하는 국내 자본시장과 대우증권의 성장에 독이다. 한 쪽 손발 묶어놓고 뛰라는 것과 같다. 최근 수년간 강력한 오너체제 아래 방향성과 속도를 내는 증권업계 몇몇 잘 나가는 회사들과 비교하면 대우 성장의 한계는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은 성공모델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데 비해 대우는 방향성도 없고 속도도 느리다. 이래선 정부가 외치는 '한국형 글로벌IB'는 불가능하다.
대우증권 출신 한 금융회사 CEO는 "과거 재무부 시절엔 장관이 아닌 차관이 실질적으로 금융기관장 인선을 했다. 외부 출신이 주류인 장관보다 내부에서 단계를 밟고 올라온 차관이 업계 현실과 내부사정을 꿰뚫고 있어서다. 지금은 이런 인사를 장관도 못한다. 청와대가 결정한다. 결국 정치싸움, 백그라운드 싸움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는 분명하게 손을 떼고 시장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직언했다.
[뉴스핌 Newspim] 홍승훈 기자 (deerbear@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