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ㆍ온화하지만 위기 땐 승부사 변신...두산 4세경영 '활짝'
강력 구조조정으로 턴어라운드...新캐시카우로 '연료전지ㆍ면세점' 낙점
[뉴스핌=조인영 기자] “박정원 회장이 예상보다 빨리 회장직을 물려받은 것은 그룹의 구원투수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다.”
박정원 회장의 승계 소식이 전해지자 재계에서는 이 같은 평가가 나왔다. 주력기업의 유동성 악화와 그에 따른 구조조정, 사회적 비난 등 두산이 9회말 2아웃에 몰린 상황에서 등판한 구원투수가 박 회장인 셈이다.
재계 4세 경영의 첫 테이프를 끊은 박정원 회장은 증조부 고(故) 박승직 창업주-조부 고(故) 박두병 초대 회장-부친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으로 이어지는 두산가의 장손이자 두산 4세대의 맏형이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3월 28일 DLI연강원에서 열린 취임식을 갖고 두산그룹회장에 취임했다. <사진=두산> |
◆9회말 투아웃에 등판한 두산 구원투수
24세 때 그룹에 발을 들여놓은 박 회장은 지난 32년간 다양한 자리를 거치며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부친을 비롯해 숙부들의 경영을 일찍부터 지켜보며 배웠다. 특히 앞서 그룹을 이끌었던 박용만 회장 때는 지주회사인 ㈜두산 회장을 겸직하며 경영 전반을 지휘했다.
박 회장이 경영에서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두산 상사BG(현 ㈜두산 글로넷BU) 시절이다. 상사BG는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상점’의 영업 형태를 그대로 물려받아 두산의 모기업 성격을 갖고 있다.
두산의 체질 개선이 한창이던 1999년 말 이 회사의 부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곧바로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비수익성 사업과 취약한 재무구조가 기업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판단, 사업 포트폴리오를 수익성 위주로 다시 짰다. 구체적으로 일본 소주시장에서 한국 소주 시장점유율을 1위로 만들고, 신제품 개발을 통해 화학제품 유통사업망을 확대하는 것 등을 핵심 목표로 정하고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성과는 금세 나타났다. 박 회장 취임 1년 만에 두산 상사BG 매출액은 전년 대비 30% 증가한 3500억원을 기록했다. 1998년 45억원 수준이던 영업이익은 2004년 135억원으로 200%나 뛰었다. 같은 기간 차입금도 2000억원에서 400억원 수준으로 감소했다. 일본 시장 내 자사 브랜드 ‘산(山)’의 시장점유율은 2003년 43%에서 급격하게 성장하며 2006년 57%로 올라섰다. 두산그룹은 2005년 사장단 회의에서 박정원 두산 상사BG 사장을 ‘2004 두산경영대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한다. 성공적인 턴어라운드(turnaround)에 따른 경영 성과를 인정받은 것이다.
두산 상사BG에서 활짝 웃은 그는 두산건설로 자리를 옮긴다. 2005년 두산산업개발(현 두산건설) 부회장에 오른 그는 가장 먼저 레미콘, 레저 부문, 건설기계 파트 등 비주력사업을 분리 독립시켰다. 발전사업소 등 비수익사업도 과감히 정리했다. 군살을 빼고 핵심 부문에 역량을 집중한 과정은 상사에서 보여줬던 구조조정과 비슷하다. 그 결과 2004년 656%에 달하던 두산건설의 부채비율은 2006년 230%대로 대폭 개선됐다. 성과를 인정받은 그는 2007년 두산건설 부회장을 거쳐 2009년 두산건설 회장으로 연속 승진한다.
그러나 박 회장도 건설 경기 악화의 여파를 온전히 피해가지는 못했다. 두산건설은 업황 악화로 최근 5년간 누적손실만 1조6000억원에 달하는 등 실적 부진에 시달렸고, 재무상황도 급격히 악화됐다. 수차례의 그룹 지원이 이어지며 퍼주기 논란도 불거졌다.
◆공격 경영 포문...신성장동력 발굴 매진
박승직-박두병-박용곤 3대 부자 <사진=두산> |
지난해 3월 공식 취임한 박정원 회장은 ‘공격 경영’을 두산의 색깔로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답을 찾겠다고도 했다.
선언은 즉각 실천으로 이어졌다. 취임 직후 경남 창원의 두산중공업을 찾아 현장을 둘러보며 “기술과 제품의 차별화된 경쟁력으로 어려운 사업 환경을 헤쳐나가야 한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두산중공업을 시작으로 박 회장은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 인천, 군산 사업장, ㈜두산 전자BG, 산업차량BG 등 국내 생산현장을 직접 찾아다녔다. 중국 옌타이, 미국 코네티컷 등에 위치한 해외 생산현장 등도 빼놓지 않았다.
현장 방문은 고객사로 이어졌다. 지난해 9월 포천 채석단지 내 대형 굴삭기 고객사를 직접 방문한 자리에서 박 회장은 신라석건, 철원산업, 삼중석재 대표를 만났다. 이날 박 회장은 작업 현장을 꼼꼼히 살펴본 뒤 3사 대표와 만나 고객이 체감하는 두산 장비·서비스 현황을 점검했다. 두산 관계자는 “박 회장은 사업 현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평사원부터 회장까지 전 직급을 경험하며 자연스럽게 녹아든 경영철학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캠페인도 새로 단장했다. 지난해 9월 첫선을 보인 ‘두산은 지금, 내일을 준비합니다’라는 메시지의 캠페인은 박정원 회장이 직접 챙긴 것으로, 그의 경영철학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캠페인은 현재도 두산의 주력사업이지만 미래에는 더욱 중요한 성장동력이 될 분야인 에너지, 워터, 건설장비 3편으로 제작돼 두산이 하고 있는 비즈니스 가치와 미래 성장동력을 표현하고 있다. 미래 성장동력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공격 경영을 두산의 색깔로 만들어 100년의 성장을 준비하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어필했다.
박 회장은 잦은 회의도 지양한다. 계열사별로 사장단이 모여 회의를 이끈다. 굵직한 비전과 방향은 박 회장이 주재하나 세부적인 회사 전략과 방침은 사장단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독려하는 스타일이다. 박 회장은 무거운 회의도 지양하지만 조직을 거스르는 상황도 두고 지나치지 않는다. 평소 인화(人和)를 강조해온 그는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하더라도 잡음을 내고 조직을 흐트러뜨리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
두산 관계자는 “주력 계열사인 두산중공업이 받쳐주는 가운데 선제적 구조조정을 실시한 두산인프라코어의 실적도 큰 폭으로 개선됐다”며 “향후 경영환경이 변수지만 위기는 넘긴 상황”이라고 전했다. 두산은 올해에도 재무 정상화와 함께 연료전지와 면세점 등 신성장동력 발굴에 집중할 전망이다.
◆120년 두산...위기 때마다 체질 개선 승부수
평소 근면함을 강조하던 매헌 박승직이 1929년에 쓴 휘호 ‘근자성공’ <사진=두산> |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 33층에는 ‘勤者成功’(근자성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부지런한 사람만이 성공한다’는 이 말은 창업주인 매헌 박승직 선생 때부터 내려오는 두산의 경영철학이다. 33세 되던 해인 1896년 매헌은 배오개에 점포를 꾸리고 제물포에서 구입한 면포를 경기 산간지방과 강원도 일대에 내다 팔았다.
이후 매헌은 ‘배오개 거상’이라는 별칭이 생겼을 정도로 성공을 거둔다. 아들인 박두병 초대 회장은 박승직 상점 명칭을 두산(斗山)상회로 바꿔 지금의 두산을 일궜다.
내수 중심 사업으로 국내시장을 선도하던 두산은 1990년대 들어 한계에 직면한다. 주력이던 OB맥주는 시장점유율이 급격히 하락하고 부채비율이 600%를 상회하면서 경영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창립 100주년을 한 해 앞둔 1995년, 두산은 스스로 위기를 시인하고 강력한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에 돌입한다.
첫 출발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였다. 두산중공업은 두산의 100년 경영 노하우를 기반으로 저수익 사업이던 제철, 화공 사업을 정리하고 발전, 담수 등 핵심 사업에 역량을 집중했다. 이후 두산은 고려산업개발(2003년, 현 두산건설), 대우종합기계(2005년, 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을 인수하며 소비재 기업에서 중후장대 기업으로 전환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두산은 다시 위기 극복을 위한 체질 개선에 나선다. 2014년부터 3년간 KFC를 시작으로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 사업, 두산DST, 두산건설 HRSG 사업을 매각했다. 건설장비를 만드는 자회사인 두산밥캣은 한 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국내 증시에 상장(IPO)했다.
두산은 새로운 캐시카우로 연료전지 사업과 면세점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년 전 맥주와 햄버거를 팔던 기업이 중공업회사로 변신했고, 이번엔 면세점 사업권을 따내며 소비재 기업으로 다시금 체질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창업주부터 120년간 차곡차곡 다져온 두산의 저력을 입증하는 시험대 위에 박정원 회장이 이제 막 올라섰다.
[뉴스핌 Newspim] 조인영 기자 (ciy810@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