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18)
연극 도중 객석을 향해 악보를 던져버리며 자신의 악보 암기 실력을 과시하던 기교파 피아노 연주가, 뭇 여성들로부터 환호와 갈채를 받았던 인기 스타, 연주 활동을 접고는 근엄한 표정에 사제복까지 입고 은둔생활을 했던 사색가, 또 문학과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문화인, 오스트리아의 압제 하에 있던 조국 헝가리에 대한 애국 충정을 담아 헝가리 고유의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했지만 정작 헝가리 언어인 마자르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사람, 수많은 제자들을 무료로 지도하고 또 이재민을 위한 구호자금 모금을 위해 자선공연을 아끼지 않았던 마음이 따뜻한 사람……
19세기에는 훌륭한 작곡가로 인정받으려면 교향곡이나 오페라로 성공을 거두어야만 했다. 그러나 프란츠 리스트는 이들 영역의 음악은 하나도 없다시피 하다. 2개의 교향곡이 있지만 이것도 두세 개의 교향시를 묶어 놓은 형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트가 생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매우 영향력 있는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초절기교(超絶技巧) 연주’라고 불리는 그의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과 함께 교향시라는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 그리고 타인을 위해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그의 삶 때문일 것이다.
리스트는 화려하고 열정적인 피아노 연주가였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언제나 파리 시민 특히 여성을 열광시켰다. 여성 팬들은 그의 연주가 끝나면 장갑과 손수건을 뺏기 위해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라는 신조어를 붙여주었다. 그러나 리스트는 그 인기에 도취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연주연습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곡을 작곡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피아노곡이나 관현악곡으로 편곡하는 노력도 이어 나갔다.
리스트의 관현악곡은 특유의 어둡고 극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리스트의 음악은 때때로 ‘악마주의 음악’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파우스트 교향곡》에서 잘 나타난다. 이 곡은 서로 다른 표제를 지닌 3개의 교향시를 묶어 3악장의 형식을 지니는데, 각 악장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메피스토펠레스를 나타내고 있다.
리스트와 쇼팽은 같은 시대를 산 피아노의 달인이었는데, 둘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둘은 같은 낭만파 음악가로 상호 긴밀한 교류를 가졌다. 피아노연주 기교면에서 둘 다 뛰어난 기량을 보였지만, 음악 내용은 서로 많은 비교가 된다. 쇼팽이 여성적이라면 리스트는 어디까지나 남성적이다. 리스트의 음악은 타오를 때는 불꽃처럼 타고, 조용해질 때는 얼음처럼 냉정했다. 기교는 날카롭고 그 명암은 깊다. 쇼팽의 몽환적인 시적 분위기에 비해 참으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음악가 리스트의 업적은 단지 피아노 음악에 국한되지 않는다. 리스트는 ‘교향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해 관현악 분야에 혁명을 일으킨 혁신주의자였다. 그는 ‘교향곡’이라는 옛 형식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 결과 ‘교향시(symphonic poem)’가 탄생하게 된다. 이는 ‘교향곡’(symphony)과 ‘시’(poem)의 합성어로, 한마디로 시적인 교향곡을 뜻한다. 이 교향시는 원래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서 영감을 얻어 리스트가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의해 완성된다. 리스트는 《전주곡》, 《타소》, 《마제파》, 《프로메테우스》 등 10여개의 교향시를 남겼다.
음악가 리스트는 실생활에서 인격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수많은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냈고, 각종 만찬과 환영회에 참석했으며, 숱한 자선공연을 벌였다. 수업료를 거의 받지 않고 400명의 제자를 길렀으며, 유럽에서 큰 재해가 날 때마다 자선콘서트를 열어 이재민을 도왔다.
또한 재능 있는 수많은 음악인을 음악계에 등단시키기도 했다. 그중에는 쇼팽 · 베를리오즈· 바그너도 있다. 리스트는 쇼팽을 파리 음악계에 소개하였고, 쇼팽의 작품을 알리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베를리오즈도 리스트에게서 여러 모로 도움을 받았다. 바그너도 그랬다. 바그너가 만약 리스트를 친구로 두지 못했더라면 아마 그의 예술은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의 위업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그너가 실패를 되풀이 했을 때 그를 위로하고 격려한 것도 리스트였으며, 바그너의 작품을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에 올린 사람도 리스트였다.
리스트가 만년을 보낸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야경 <사진=이철환> |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1811년 헝가리의 라이딩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헝가리 사람이었으나, 어머니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여러 민족과 언어가 뒤섞인 나라에 사는 어린이들은 대개 어머니의 말을 배우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린 페렌츠(Ferencz)는 프란츠(Franz)가 되었고, 평생 헝가리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 살았다. 그는 모국어를 약간 알았지만 만년에 동포들이 그를 조국의 살아 있는 상징으로 떠받들기 전까지는 헝가리어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그는 나름 헝가리 집시음악의 선율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19개의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이다. 다만 헝가리 음악을 표방한 그의 작품들은 어디까지나 선율만 차용한 것이며, 작곡 기법 자체는 전형적인 독일의 후기낭만파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리스트는 여섯 살 때부터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첼리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당시 아버지를 고용했던 귀족이 리스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비엔나로 보내준다. 거기서 리스트는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모차르트의 경쟁자였던 살리에르에게 화성과 작곡을 사사했다. 그러던 중 182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충격을 받고 잠시 피아니스트를 포기하고 성직자가 되려는 생각도 했었다.
프란츠 리스트가 스무 살을 갓 넘긴 1832년, 그는 파리에서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던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게 된다. 그 공연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으로 했던 것만큼 멋지게 피아노를 연주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 하루에 10시간씩 맹연습을 했다. 이후 그 꿈을 이루었다. 오늘날 리스트는 신기에 가까운 현란한 기교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초절기교 연주법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다.
리스트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불린다. 파가니니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가 리스트에게로 이어진 ‘비르투오소(virtuoso)’는 거장, 기교가 뛰어난 연주자를 뜻한다. 이처럼 파가니니는 리스트의 음악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여러 작품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파가니니의 ‘24개의 무반주 카프리스’에 기반을 둔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작은 종)》이다.
리스트는 그의 화려한 연주 인생만큼이나 여성편력 또한 그러했다. 그는 1836년 다구 백작 부인을 만나게 된다. 다구 백작 부인은 문인이자 자녀를 둔 유부녀였다. 그녀는 대니얼 스턴이라는 남자 이름으로 책들을 썼고 살롱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살롱은 하이네가 시를 낭송하고 쇼팽이 야상곡과 왈츠를 연주하는 등 파리의 문학, 음악, 미술계 인사들이 모이던 장소였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가 만난 곳도 이 살롱이었다. 6세 연상인 백작부인은 당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젊은 리스트에게 빠져들었고, 결국 남편을 버리고 두 딸과 함께 리스트와 동거를 시작한다.
두 사람이 스위스 제네바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사는 동안 백작부인은 리스트의 자식을 셋 낳았다. 그중 둘째 딸인 코지마(Cosima)는 나중에 음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녀는 어머니를 닮아 총명하고 당찬 여성이었다. 1857년 코지마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제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와 결혼했다. 뷜로는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최고의 지휘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 뛰어난 능력으로 뷜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곡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는 운명의 장난 서곡이 되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둘은 결혼하게 된다. 이로써 24세 연하인 코지마를 아내로 얻게 된 바그너는 제자 뷜로의 아내를 훔쳐 위대한 음악가 리스트의 사위가 된 것이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다구 백작부인은 점차 연인인 리스트의 과민한 성격에 싫증을 느꼈다. 마침내 1840년 두 사람은 영원히 결별했다. 리스트는 서른일곱 살이 되던 1848년 두 번째 연인인 카롤리네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나게 된다. 러시아 출신인 그녀는 문인이고 유부녀였다. 두 사람은 리스트가 자선공연을 펼칠 때 거액의 기부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어 결혼을 하려 했으나 결국 이루지는 못했다. 이후 리스트는 38년의 여생을 비트겐슈타인과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며 살았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의 하나인 《사랑의 꿈((Liebestraum)》은 이 당시 만들어진다. 이 곡은 3개의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만났던 그 무렵 리스트는 프라일리히라트가 쓴 시에 곡을 붙여 〈테너 또는 소프라노를 위한 3개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된 3개의 가곡을 쓰게 된다.
바로 ‘고귀한 사랑(Hohe Liebe G.307)’, ‘가장 행복한 죽음(Gestorben war ich G.308)’,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O lieb, so lang du lieben kannst G.298)’이다. 이 3곡을 피아노로 다시 편곡하여 ‘3개의 녹턴’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는데, 이중 3번째 곡인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사랑의 꿈》이란 부제로 더 유명해지게 된다. 잔잔한 선율과 낭만적인 멜로디가 특징인 이 곡은 오늘날 태교 음악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리스트는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이후에도 아델르 라프뤼나레드 백작 부인, 마리 뒤플레시스, 전직 댄서였던 롤라 몬테즈, 마리 플레이엘, 마리아 파블로프나 삭소니 대공부인, 그리고 올가 쟈니냐 코사크 백작 부인까지 수많은 애인을 만들었다. 코사크 백작 부인은 리스트가 무려 59세일 때 사귄 연인이었다. 다만 동거나 결혼을 전제로 한 심각한 연애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리스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연주 여행으로 보냈지만, 1847년에 바이마르의 궁정 악장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리스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의 주요 교향시들은 대부분 이 시절에 만들어졌다. 만년에 들어서는 음악활동보다 경건한 가톨릭 신도로서의 의무에 충실했다. 1865년 그는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되어 교회음악 작곡에 헌신했다. 1876년부터 죽기 전까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시간을 바쳤다.
리스트는 일흔다섯이 되던 1886년 그의 사위이자 친구인 바그너가 죽은 이후 딸 코지마가 주관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참가했다가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두 번째 공식적 연인이었던 비트겐슈타인도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