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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지휘자의 시대를 연 음악계의 제왕,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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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23)

흔히 음악의 세계에서 19세기가 ‘피아니스트의 시대’라면, 20세기는 ‘지휘자의 시대’라고 한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는 20세기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이면서 혁신적이며 그리고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 넘쳐흐르는 지휘자였다. 음악가 중 살아생전 그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음악을 풀어나가는 탁월한 감각과 능력은 물론이고, 음악계에서의 독보적인 발언권, 레코드 음반 발매를 통한 클래식음악의 대중화 확산 등 가히 음악계의 황제로서 군림하였다. 오늘날 음악의 성인이라고 칭송받는 베토벤도 영향력 행사 면에서는 그를 앞서지 못한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지휘한다. 그 모습이 나중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가 되었다. 원래 지휘는 단원과 눈을 맞추면서 교감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언뜻 작위적인 자기연출 같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야말로 카라얀이 만들고 싶어 했던 ‘이상적인 오케스트라’에 대한 욕망의 상징적 모습이었다. 그는 생각 속의 이상적 오케스트라와 눈앞에 놓여있는 현실의 오케스트라를 합일시키려 했던 것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를 독재자라고도 불렀다. 베를린 필 단원들에 의하면 카라얀은 리허설을 할 때도 완벽을 추구했다고 한다. 정해진 시간을 넘기는 일 없이 신사적인 분위기에서 리허설은 진행되지만, 완벽주의적 기질 때문에 리허설의 긴장감이 대단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연주회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등의 불만이 쌓이면서 단원들과의 사이도 벌어지게 된다. 이처럼 출세 지향적이며 독선적인 성격 그리고 친 나치 성향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이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과 엄청난 노력 덕분이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rebert von Karajan, 1908~1989)은 1908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피아노의 신동’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모차르테움(Mozarteum)에서 공부했다. 모차르테움은 모차르트를 기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설립한 모차르트 음악연구 재단이다. 이후 비엔나 공대에 진학했으나 흥미를 잃고 결국 음악의 길로 들어선다. 1927년 독일 울름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였고,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38~45년 동안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도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는 역시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에 오른 일이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37년이었다. 그로부터 17년 뒤인 1954년, 당시 상임지휘자이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쥐게 된다.

1955년 베를린 필은 미국 순회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0주년이 되는 1955년, 독일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서 열리는 이 공연은 당시 독일이나 미국 양측에 큰 관심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재건 과정에서 서독은 미국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때마침 열리는 이 순회공연은 서독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여론 향방에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그런 탓에 당시 아데나워 서독 수상도 이 순회공연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애초 이 순회공연은 당연히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공연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에 베를린 필은 미국 순회공연을 이끌 지휘자로 카라얀을 선택했다. 카라얀은 이를 계기로 종신 음악감독직을 맡아 실권을 쥐게 된다.
1955년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통해 ‘꿈의 오케스트라’를 실현하려 했다. 이후 카라얀은 20세기 클래식 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했다. 1989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부근의 아니프에서 사망할 때까지 연주와 지휘, 음반 녹음을 계속했다. 대부분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지휘한 결과물이었다. 이들 두 악단은 카라얀의 절정기를 함께 한 최고의 파트너였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위자가 된 이후에도 행운이 이어졌다. 다음해인 1956년에는 고향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이 되어 4년간 재임하였다. 칼 뵘의 뒤를 이어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도 취임하였는데, 1964년 이곳을 사임한 직후에는 다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측과 전권을 행사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두 번째 계약을 체결한다.
이후 카라얀은 1967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을 창설하였다. 이는 바그너의 작품만이 공연되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과 사이가 틀어진 카라얀이 자신이 존경하는 바그너의 음악을 마음껏 지휘하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카라얀이 잘츠부르크에서 무엇보다 무대에 올리고 싶었던 작품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여름 음악제에서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여름에 열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경쟁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름이 아닌 부활절 기간을 택하게 된다.

눈을 지그시 감고 지휘하는 카라얀의 모습 <사진=이철환>

카라얀은 자신의 전임자인 베를린 필 지휘자인 푸르트벵글러를 훌륭한 음악가로 존경하였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극도로 혐오했고, 카라얀이 자신의 후임자가 되지 못하도록 다각도로 견제했다. 그래서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가 서거하기 전까지는 베를린 필과 빈 필을 거의 지휘하지 못했다. 빈 필 단원의 증언에 의하면, 푸르트벵글러는 빈 필 단원들에게 자신과 카라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할 정도로 반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1954년 11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서거하자 카라얀은 마침내 오래 염원해왔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한다. 카라얀은 자신에게 어렵게 돌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베를린 필의 미국 순회공연을 앞두고 있을 때 카라얀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다. 그러나 카라얀은 그토록 염원했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위중한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카라얀은 훗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저질렀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카라얀은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38년 오페레타 가수인 엘미 홀게호프와 했는데 얼마 못 가 1942년 이혼했다. 그리고 이혼 후 바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상대는 유태계 혈통을 지닌 안나 마리아 아니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재봉틀용 실을 생산하는 사업가였다. 아니타와의 결혼생활은 비교적 무난했지만, 아니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1958년 이혼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프랑스의 모델 출신인 엘리에트 무레(Eliette Mouret)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카라얀보다 27세 연하인 엘리에트는 17세 때인 1951년 카라얀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1958년 카라얀과 결혼 이후 두 딸을 낳았다. 엘리에트와의 세 번째 결혼은 적어도 외부에 비춰진 모습으로는 화목하게 유지되었고, 엘리에트는 비록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었지만 카라얀을 열심히 내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결혼생활은 카라얀의 남은 여생동안 지속되었다. 그녀는 1989년 남편 타계 이후 음반과 영상, 각종 기록을 정리하는 '카라얀 재단'을 운영하며 살았다. 카라얀의 전 부인 아니타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얀 음악인생에 오점이 있다면 나치와의 협조관계였다. 1933년 나치에 입당하고 1934년 아헨 독일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된다. 카라얀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히틀러가 보는 가운데 자작 《영웅소나타》를 초연하기도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카라얀을 대표적인 신진 지휘자라고 선전했다. 그러다 둘째 부인 아니타가 유태계라는 점 때문에 나치와 거리가 생겼고, 전쟁 말기에는 아니타와 함께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서 종전 때까지 머물렀다.
종전 후 귀국한 카라얀은 1948년 연합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무혐의를 인정받아 지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 스턴, 이작 펄만 등 상당수 유태계 음악가들은 그와의 공연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약 2년 동안 연주활동이 제한되었는데, 그 기간 카라얀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 카라얀에게 구세주로 나타난 이가 바로 음반회사인 EMI의 프로듀서인 월터 레그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카라얀을 주목해 왔던 레그는 미래에 녹음할 연주들에 대해 미리 선지불하는 형식으로 카라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얼마 후 다른 음반사인 독일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과 데카(DECCA)도 카라얀과 계약을 맺었다. 그가 취입한 음반타이틀은 1천개에 이르고 1억 2천만 장이나 팔렸다. 이리하여 카라얀은 연주회 현장 음악시대에서 레코드 음악시대를 새로이 열어나가게 된다.

천하의 카라얀도 만년 들어서는 베를린 필에 대한 장악력이 다소 떨어지고 있었다. 관악기 연주자 선정 과정에서 수차례 단원들과의 이견이 노출되었다. 또 자신의 후임 선정 과정에서도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음악단장인 제임스 레바인(James Levine)을 지지했으나, 카라얀 퇴임 후 단원들이 민주적인 투표방식을 통해 상임지휘자로 선출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였다.
1987년 1월 1일에는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는데, 이를 이유로 1986년 베를린 필의 송년음악회를 지휘하지 않아 베를린에서의 여론이 악화되었다. 1988년에도 건강 악화를 이유로 베를린 필 공연 지휘를 취소해 놓고 그 다음날 일본 투어를 위해 출국했는데, 이 일도 커다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1989년 4월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 직을 사임했다. 20세기 음악계의 황제이자 독재자로 불리던 그도 1989년 7월 16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고향 잘츠부르크에 묻혔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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