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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중화인민공화국의 씨앗을 뿌린 5인의 중국 청년들

기사입력 : 2018년10월04일 17:05

최종수정 : 2018년10월05일 09:18

[서울=뉴스핌] 고은나래 기자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018년 현재를 살아가는 중국 젊은이들이 외모 가꾸기와 내 집 마련 등에 열을 올릴 때, 작금의 중국을 있게 한 100년 전 당시 중국 젊은이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량수밍(梁漱溟), 후스(胡适), 류반눙(劉半農), 류원뎬(刘文典), 린쑨(林損), 저우쭤런(周作人), 쉬베이훙(徐悲鴻).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중국 베이징대학에 재직 중이던 교수들이다. 그 당시 저들의 나이는 20대로 이미 그 당시 사회 문화 사상을 이끄는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약 100년 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신문화 운동과 5·4 운동이 일어나던 격변의 시기, 미래를 위해 제 한 몸 아끼지 않고 투쟁하던 중국의 당시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 [사진=바이두]

◆ 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

루쉰(魯迅)은 1881년 9월 25일 중국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에서 저우(周) 씨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다.

1902년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학교를 다니며 의학도를 꿈꾸던 청년이었지만, 중국인이 일본인에게 학살당하고, 중국인들이 둘러서서 이를 구경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자신의 꿈을 접는다. 글과 문학으로 도탄에 빠진 중국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한 그는 의대를 자퇴 후 도쿄에서 외국 소설 번역 일에 매진한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갑자기 기울면서 급히 중국으로 귀국하게 됐다. 그는 고향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베이징으로 건너와 교육부에서 일을 배우며 문학을 통해 본격적인 계몽 활동을 펼쳤다. 루쉰은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하는 올바른 길은 글을 통해 사람들의 혼을 깨치는 길밖에 없다고 굳게 믿었다.

중화민국 수립 초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던 시기였으며, 중국 정부가 나서 공자 숭배 등 전통 사상을 강요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부 신지식인들이 주도한 신문화 운동(新文化運動, 1917~1921년)이 전개되면서 반(反) 유교, 반(反) 전통 사조가 일어났다.

루쉰은 신문화 운동이 한창이던 1918년 친구의 권유로 ‘신청년(新靑年)’ 잡지에 첫 소설인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연재하면서 중국 문화계와 사상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루쉰’이란 필명도 이때 처음 사용했다.

루쉰은 광인일기에서 중국 유교 사상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피해망상증 소설 속 주인공을 내세워 가족 제도와 유교의 폐해를 폭로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아Q정전’ 등 잇달아 중국 사회의 유교 사상과 비(非)인간성을 고발하는 글을 발표하며 중국인들의 계몽에 앞장섰다.

 

마오쩌둥의 오른팔 저우언라이(周恩來) [사진=바이두]

◆ 마오쩌둥의 오른팔 저우언라이(周恩來)

유골을 남기지 않는다. 후손을 두지 않는다. 관직을 드러내지 않는다. 당파를 짓지 않는다. 유언을 남기지 않는다. (死不留灰 生而無後 官而不顯 黨而不私 勞而不怨 死不留言)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로 마오쩌둥(毛澤東)의 충실한 오른팔이었던 저우언라이는 6무(6無)를 실천한 중국인들에게 최고의 지도자다.

중국 장쑤성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살 때 양친을 잃고 사오싱의 백부 댁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서구 열강에 짓밟히는 중국 현실에 몸서리치던 저우언라이는 12살이 되던 해 ‘공부는 왜 해야 하는가?’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단호한 목소리로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섭니다!”라고 외친 일화는 유명하다.

사오싱에서 일찍이 서구 사상을 접한 그는 일본 유학을 선택했다. 1918년 스무 살, 그가 쓴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일기의 한 대목에서 그의 단호한 성격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귀국 후 톈진 난카이 대학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한 일로 퇴학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항일 운동을 펼쳤다. 이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인재를 발굴하는 데 힘썼으며, 귀국 후에는 뛰어난 외교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공산당 내부 분열을 막는 데 힘썼다.

 

짧고 굵은 생을 살다 간 여성 혁명가 추근(秋瑾) [사진=바이두]

◆ 짧고 굵은 생을 살다 간 여성 혁명가 추근(秋瑾)

청나라 말기의 여성 혁명가이자 시인인 추근은 1875년 저장성 사오싱에서 태어났으며 사오싱 출신인 루쉰, 저우언라이와 더불어 ‘소흥삼걸(紹興三傑)’로 불린다.

봉건사회를 살던 여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기르며 평범하게 살던 그녀는 외세의 침략을 목도하고 혁명 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1904년 29세가 되던 해, 두 아이는 친정에 맡기고 홀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혁명은 남녀 평등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굳은 신념 아래 봉건사회 속 여성의 굴레를 몸소 벗어 재꼈다.

일본에서 교육, 공예 및 사격, 무술을 배우며 적극적으로 혁명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1907년 7월 15일 32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당하게 되고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중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녀가 혁명가로서 활동한 기간은 3년 남짓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반봉건 혁명가로서 중국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있다.

◆홍일법사 리수퉁(李叔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리수퉁(李叔同)은 어릴 적부터 학문에 큰 뜻을 두고 공부에 전념했으며 25세 때에 난징(南京) 대학교 첫 교가를 작곡한 음악 수재이기도 했다. 1905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회화와 음악을 전공하고 귀국 후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중국 최초의 화극(話劇) 단체 춘류사(春柳社)를 조직하고, 중국 최초로 서방 음악을 중국에 소개했다.

1918년 6월, 당시 39세이던 그는 속세를 등지고 항주 호포사에서 불교에 귀의했다. 그 후 홍일법사(弘一法師)라는 칭호를 얻으며 남산율종(南山律宗)을 다시 부흥시켰다. 중국 최고의 서예가 중의 한 명으로써 그가 쓴 ‘방하(放下)’ 두 글자가 몇 해 전 경매에서 471만 위안(약 7억 6530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중국 홍군의 창설자 주더(朱德) [사진=바이두]

◆ 중국 홍군의 창설자 주더(朱德)

쓰촨성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주더는 일찍이 과거에 합격했으나 관직 생활은 하지 않았다. 이후 윈난성으로 주거지를 옮긴 그는 강무학당에서 군사학을 배우며 쑨원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그는 1915년 베이양 군벌(北洋軍閥)을 토벌하며 쓰촨, 윈난 지역 호국군(護國軍) 제13혼성여단장이 되었다.

20대 후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큰 출세를 경험한 그는 여자와 아편에 찌든 삶을 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당시 중국인들의 삶을 목도하고는 돌연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을 버리고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난다. 베를린에서 독한 마음으로 아편 생활을 청산한 그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학중이던 저우언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추천으로 공산당에 입당한다.

후에 쑨원이 사망하고 1927년 제1차 국공 합작이 결렬되자 그는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 홍군(紅軍)을 창설하며 무수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중일전쟁 발발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지면서 팔로군으로 개칭한 홍군의 총지휘관으로 선두에서 군을 이끌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공산당과 국민당의 분열이 일자, 인민해방군으로 새롭게 재탄생한 팔로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공산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nalai12@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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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日 여행객 'K-쌀' 사간다 [세종=뉴스핌] 이정아 기자 = 일본 여행객이 한국을 방문, 한국 쌀을 직접 구매해 들고 나가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일본 내 쌀값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밥맛 좋은 한국 쌀'이 대체제로 급부상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3일 <뉴스핌>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상반기 동안 일본 여행객이 한국에서 직접 구매해 일본으로 들고 간 국산 쌀은 3만3694kg로 집계됐다. 일본은 지난 2018년부터 휴대식물 반출 시 수출국 검역증을 의무화한 나라로, 병해충과 기생식물 등 식물위생 문제에 매우 엄격하다. 특히 쌀처럼 가공되지 않은 곡류는 검역 과정이 매우 까다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여행객들의 한국산 쌀 열풍은 지속됐다. 지난해 한 해 동안 일본 여행객이 반출한 국산 쌀은 1310kg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상반기에만 무려 25배 이상 급증했다. 같은 기간(2024년 1~6월)으로 비교하면 작년 106kg에서 올해 3만3694kg로 약 318배 증가한 셈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일본 여행객들의 '쌀 쇼핑'이 열풍을 불면서 관련 문의가 급증했다"며 "한국쌀이 일본쌀에 비해 맛과 품질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반출되는 양도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쌀을 화물로 탁송하는 사례도 동반 상승했다. 올해 상반기 기준 화물검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된 국산 쌀은 43만1020kg에 달한다. 지난해 화물 검역 실적이 1.2kg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폭증 상태다. 업계에서는 이번 흐름이 국산 쌀에 대한 일시적 특수로 끝나지 않고 국내에서 정체된 쌀 소비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는 "일본에서 쌀 가격이 두 배 이상 올랐으니 한국에 와서라도 쌀을 구매하는 여행객이 늘어난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다만 일본의 쌀 관세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한국 쌀의 가격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국산 쌀의 품질이 높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합격점이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종도=뉴스핌] 윤창빈 기자 = 1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에 중국발 여행객들이 입국하고 있다. 2023.03.11 pangbin@newspim.com 정부 역시 이같은 수요에 대응해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검역제도 안내·홍보에 나서기로 했다. 현재는 농림축산검역본부를 통한 사전신청, 수출검역, 식물검역증 발급, 일본 통관까지 최소 3단계 이상이 요구된다. 다만 한국 쌀을 일본으로 반출할 때 한국에서 식물검역증을 발급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본 관광객이 일본에 돌아가 쌀을 폐기하는 일이 생기면서 홍보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농식품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달 오사카 엑스포 현장 방문을 계기로 일본 농림수산성과 예방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쌀 검역 문제가 논의됐다"며 "한국 정부는 일본 여행객이 애써 한국 쌀을 구매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폐기하는 일이 없도록 제도 홍보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전했다. plum@newspim.com 2025-07-0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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