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기생충' '동백꽃 필 무렵'의 이정은이 새 영화로 돌아왔다. 김혜수와 호흡을 맞춘 '내가 죽던 날'에서 그는 말 한마디 없이도 놀라운 존재감으로 먹먹한 위로를 전한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의 개봉을 앞두고 삼청동의 카페에서 이정은을 만났다. 그는 '기생충' 이후 뜻밖의 다작을 하게 됐다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취재진과 마주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흥행했던 출연작 KBS '동백꽃 필 무렵'과 비슷한 시기에 작업했다.
"작년에 같이 촬영하고, 그 뒤로 주말드라마 하나 끝냈죠. 이제 '로스쿨'이라는 드라마를 찍고 있고, 그동안 신수완 감독과 '오마주'라는 작품도 찍었어요. 예전에 비해 시나리오가 더 들어오기도 하고 찾아주시는 것도 늘긴 했죠. 이 시나리오가 개발될 때 꾸준히 소식을 듣고 있었어요. 이런 내용의 영화가 만들어질 거고 기회가 되면 같이 힘을 실어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었고, 주인공이 혜수씨라는 얘기에 또 끌렸죠. 좋은 배우와 함께 하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잖아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내가 죽던 날'에 출연한 배우 이정은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2020.11.11 jyyang@newspim.com |
순천댁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다. 기구한 과거 사연도 섬 주민의 대사로 짧고 간결하게 설명된다. 심지어 목소리를 잃어 말도 못한다. 그럼에도 현수(김혜수)에게 무언가를 일깨우고, 세진(노정의)에게도 삶의 의미를 던져주는 인물을 그려내야 했다. 이정은은 "순천댁이 잘 드러나지 않아야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순천댁의 정체가 스포일러적인 면이 있어서, 홍보활동이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영화에 나오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보니, 배우 이정은이 홍보를 돕고싶다,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죠. 하하. 거의 많은 장면에서 표정이 없게, 많이 과하지 않은 얼굴을 보여주려 했어요. 찍으면서도 더 평범하고, 더 바닷가 있는 여인같이 주름도 더 많았으면 했죠. 하여튼 관객분들이 저를 보고 이미 '뭔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요. 사실 크게 뭐가 있는 건 아닌데. 최대한 많이 드러나지 않게 일상성을 벗어나지 않게끔 표현하려 노력했죠."
도리어 뭔가를 많이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 이정은의 연기를 특별하게 했다. 그는 "대사가 없으니까 상대방의 말을 잘 들으려고 했다"면서 촬영 당시를 돌아봤다. 이 영화의 결말을 쥐고 있는 역할인 만큼, 순천댁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도 한다. 실제 순천댁의 삶을 생각해봤다는 이정은은 "이 나이 돼보니 괜찮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순천댁은 숨기는 입장이니까 현수가 섬에 도착했을 때 굉장히 두려움이 많았겠죠. 아무일 없던 것처럼 해야 했고, 잘 듣고 반응하는 게 제일 중요했어요. 감독님이 오히려 많이 만들지 말자고 하셨고 저도 동의했죠. 자연스레 힘을 빼가는 과정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제가 모르는 얼굴이나 표정도 나왔죠. 순천댁의 과거의 삶은 모두에게 물음표예요. 혼자 고민해봤죠. 조카가 하나 있는데 불의의 사고로 오빠와 부모님이 모두 떠나시고. 그 아이를 책임지게 됐을 때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할까? 아닐까? 제 나이가 돼보니까. 괜찮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미 벌어진 일이고 그 일상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물론 현실에 그런 분이 있다면 당연히 말벗은 좀 해드리고 싶어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내가 죽던 날'에 출연한 배우 이정은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2020.11.11 jyyang@newspim.com |
영화를 찍으면서 이정은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순천댁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었다. 그는 "농약을 마셨다고 하는데 그 순간을 어떻게 할 건가"라고 깊게 고민했음을 털어놨다. 동시에 그는 김혜수와 김선영 등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을 보며 깊게 치유받을 수 있었음을 고백하며 감사했다.
"이걸 어떡할 건가 싶었죠. 했다 치고 갈 수는 없는 거고, 그 부분을 계속 염두에 두고 연기를 했어요. 어떤 의사가 이제와서 '그런 소리 안나온다'고 하면 게임 끝이죠. 하하.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들었어요. 정말 어려웠는데, 감독님이 끝까지 관심갖고 물고 늘어져주셔서 그래도 잘 나온 것 같아요. 영화를 보고 나니 '내가 그래도 잘 듣고 있었구나' 하는 순간은 있었죠. 제 장면보다도 현수가 '그 아이에 대해 아무도 관심 없지 않냐'고 말하고, 횡단보도에서 10대 소녀를 바라보는 신부터 눈물이 났죠. 단순해보이지만 그게 내공인 것 같아요. 아직도 잔상이 많이 남아있고, 김선영씨와 혜수씨의 신도 너무 좋았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하는 친구와 자신의 감정을 이제야 알게 됐다는 고백이 너무 와닿았어요."
김혜수는 거의 매일같이 이정은과 연기한 감동을 표현했다. 이정은 역시 김혜수와 연기호흡을 떠올리며 자연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뭘 결정해놓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물처럼 흘러가는 것처럼 액션과 리액션이 좋았다"면서 고마워했다. 김혜수가 언급한 '완벽한 순간'도 이정은 역시 비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혜수씨가 걸어온 행보에 늘 관심이 많았죠. 지인을 통해 어릴 때부터 알았는데 얼굴이 점점 좋아진다, 보기 좋다고도 하고. 좋은 시너지를 내고 서로 격려하는 마음이 있어서 기운이 많이 됐죠. 순천댁으로서는 솔직히 말하면 제가 일을 만든 사람이잖아요. 고백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 사람을 수고롭게 했지 않나, 두려운데 현수의 눈이 이미 죄를 묻지 않는 눈빛이에요. 그 순간에 이게 김혜수의 마음일까 현수의 마음일까 싶었죠. 손 붙잡고 같이 울었던 교감의 시간도, 담담히 흘러간 시간도 좋았어요. 우리도 헷갈려요. 이게 배역의 호흡이었을까 그냥 배우끼리의 관계였을까. 시시콜콜 무슨 얘기를 많이 하는 사이는 아니었는데도 그냥 얼굴에 다 있었어요. 둘이 보기만 해도 아는 교감이 오고갔죠."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내가 죽던 날'에 출연한 배우 이정은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2020.11.11 jyyang@newspim.com |
김혜수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자체에 끌렸다는 이정은은 '여성감독'에 초점을 맞춘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여성감독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가 드디어 왔음에 기뻐했다. 또 시나리오가 다양화되는 추세와 묘하게 시기가 맞물리면서, 이정은에게 다양한 기회가 찾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여성감독들은 자기 주위에 있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이 갈 거고, 전형적인 여자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쓰려 할거고 저같은 조연들도 할 일이 많아지는 거죠. 캐릭터가 겹겹이 많이 나올 수 있으니 좋은 일이에요. 투자를 원활히 받는 거랑은 약간 다른 일이지만요. 시나리오 위주로 말하자면, 다양한 이야기로 변화되고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저한테 귀한 역할들이 들어온 것 같아요. 시기적으로 제가 드러나기 시작할 때 시나리오의 겹들이 달라진 때와 맞물린 느낌이죠. 예전보다는 전형적이지 않고, 다양해졌어요.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죠."
'기생충' 이후에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코로나와 맞물리면서 참여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이정은은 "우리 나라에서 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어서, 그게 뭐 중요한가 싶다"면서 웃었다. 늘 본인이 받은 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베풀고 싶다는 그는 선배들의 조언과 배려를 떠올리며 앞으로의 작은 바람을 하나둘 얘기했다.
"김영애, 김혜자 선배님들이 단 몇마디로 늘 환기를 시켜주셨어요. '너무 몽상가가 되지 말고 작업 제안이 들어올 때 성실하게 하라'고 끊임없이 얘기하셨죠. 주말드라마 하면서 KBS에 가니 그분의 영혼이 이 모든 일들을 만들어주신 느낌이 들어요. 흔들리는 순간에 꼭 촌철살인 같은 말을 해주세요. 정혜선 선생님이 '얘한테 시간을 줘라. 닥달하지 말고'라고 하셔서 덕분에 녹화를 잘 끝낸 적도 있었죠. 정말 그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저도 그러고 싶단 생각을 하죠. 내년에 제가 벌써 데뷔 30년이라는데 깜짝 놀랐어요. 하하. 당장은 '오마주'가 내년에 개봉될 수 있었으면 해요. 제 30주년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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