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내 역할은 묵묵히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지난 13일 카를로스 수베로(51·베네수엘라) 전 한화 감독이 한국을 떠나며 남긴 말이다. 갑자기 수베로 감독을 떠나보낸 일부 팬들은 15일 한화빌딩 앞에서 트럭 2대를 동원해 프런트 규탄 시위를 벌였다. 한화의 젊은 선수들은 눈물로 수베로 감독을 떠나보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화구단 부임 당시 수베로 감독. [사진 = 한화] |
지난 11일 한화가 삼성을 상대로 올 시즌 첫 완봉승을 거두던 날 전격 경질이 통보돼 충격이 더욱 컸다. 다음 날 한화는 SSG 원정경기에 5대2로 승리해 3연승을 달렸다. 9회 등판해 승리를 지킨 루키 김서현은 마운드에 올라오자마자 맨손으로 '3'과 '70'으로 보이는 숫자를 써 보였다. 수베로의 등번호가 3번, 함께 떠난 호세 로사도 투수코치의 등번호가 70번이었다. 이날 홈런을 친 노시환은 "선배님들은 감독 교체의 경험이 많았겠지만 우리 같은 어린 선수는 조금 당황스럽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2021년 시즌을 앞두고 한화는 '육성 전문가'인 수베로 감독에게 팀의 전면 리빌딩을 맡겼다. 2021년 한화의 승률은 0.371이었다. 하지만 지난해엔 오히려 더 떨어진 0.324였다. 올해 4월에도 고전했다. 한화는 수베로 감독체제 1, 2년차에 뿌려진 씨앗이 3년차엔 결실을 맺길 원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승리'라는 결실이 늦어지자 한화는 일찍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됐다.
최원호 신임 감독의 취임 인터뷰에서 구단측 불만의 일단이 드러난다. 최 감독은 "이기는 야구를 해달라고 주문을 받은 것은 아니다"면서도 "내년부터는 이기는 야구를 하기 위해 올해는 이길 수 있는 셋업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주셨다"고 말했다. 구단은 수베로 감독의 방식으로는 패배가 더 익숙한 팀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어 그는 "임무가 분명한 투수 기용이나 투수의 동의를 얻지 않은 시프트를 하지 않겠다"며 "이전엔 선수들에게 맡기는 게 90%였다면 이젠 벤치가 작전이나 선수 교체 등에 10~20% 이상은 개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구단측은 못 이기는 야구, 임무 불분명한 필승조, 무분별한 시프트, 작전을 방임하는 경기 운영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화의 미래를 위해 수베로는 2년여 동안 과연 어떤 씨앗을 뿌렸을까. 한화의 공격력은 현재 팀 타율 0.231(10위), 팀 출루율 0.313(10위), 팀 장타율 0.322(10위)로 저조하다. 하지만 5월 들어 봄바람을 타고 상승세다. 최근 10경기에서 6승 3패 1무로 10개구단 중 4위다. 이런 상승 반전은 수베로가 길러낸 유망주들 이끌었다. 노시환은 타율 0.346(4위), 47안타(4위), 8홈런(2위), 출루율 0.418(5위) OPS 1.021(1위) WAR 2.19(1위)로 타선의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수베로의 간택을 받아 지난해 1군에서 타율 0.261에 16홈런을 터뜨리며 신인왕 후보까지 오른 김인환도 기대를 모은다.
한화 공격력을 이끄는 노시환. [사진 = 한화] |
마운드에선 젊은피의 두각이 더욱 뚜렷하다. 지난해 한화의 팀 평균자책점은 4.83으로 10개 구단 중 최하위였다. 그러나 올해는 3.95(7위)로 올랐다. 젊은 강속구 투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노장 선수들의 구속은 계속 하락했지만 150㎞ 이상을 던질 수 있는 국내 선수가 가장 많은 팀으로 환골탈태했다. 문동주와 김서현은 올해 리그에서 평균 구속이 가장 빠른 선수다. 최고 150㎞대를 기록한 선수를 5명이나 더 보유하고 있다. 최고 155.3㎞를 뿌리는 한승혁을 비롯해 남지민, 박상원, 윤산흠, 김범수 등 모두 140㎞ 후반에 가까운 평균 구속을 가지고 있다. 강속구 투수들이 늘어나 팀 마운드가 지난 2년에 비해 탄탄해졌다. '강속구 영건 발굴'이라는 씨앗이 장차 마운드에서 '이기는 야구'라는 결실로 맺어지리라 기대할 만하다.
한화 마운드의 강속구 영건중 한 명인 김서현. [사진 = 한화] |
수베로 감독은 승리가 급한 상황에서도 원칙을 깨면서 선수를 당겨쓰지 않았다고 한다. 투수들을 혹사시키지 않고 젊고 잠재력 있는 선수들에게 고르게 기회를 주며 가능성을 봤다. 올 시즌 전에도 "계약 마지막 해이지만 선수 미래를 위해 보호하고 관리하는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 모든 결정은 한화 미래를 위해 할 것이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승리하는' 한화를 보지 못하고 떠나는 수베로는 아쉬움이 클 것이다.
고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서 그는 "내 역할은 묵묵히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외부 압박에 흔들리지 않고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친 것에 감사하다"며 "정말 많은 선수들을 아들처럼 대했다. 여러 팀을 감독하면서 많은 이별이 있었지만 이번만큼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어 "한화 팬들의 진심어린 사랑을 잊지 못할 것이다. 장담하는데 앞으로 한화는 좋은 팀이 될 것이다. 한화 팬들이 웃을 날이 머지 않았다. 끝까지 한화를 응원해달라"고 덧붙이고 밝게 웃으며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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