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의 가치 알고 일찌감치 선점
유머와 개성 두루 갖춘 팔방미인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후배들을 향해) 나도 평생 조연으로 살았던 배우로서 말해주고 싶다. 지금 힘들고 슬럼프가 있더라도 이 바닥은 버티면 언젠가 되니 중간에 절대 포기하지 말라."
가을 속으로 떠난 김수미가 책을 쓰기 위해 써놓은 글에 남긴 말이다. 배우 김수미의 '조연론'이라 할만하다. 군산 출신의 김수미는 여고시절 탁월한 미모와 글재주를 가진 문학소녀였다. 국문과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서 포기하고 탤런트의 길을 걷게 됐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MBC '비디오스타'에 공개된 김수미의20대 모습. [사진 = 방송화면 캡처] 2024.10.28 oks34@newspim.com |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미는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32세의 나이에 60대 엄마인 일용네 역을 출연했다. 극중 아들인 박은수(일용이)보다 실제 나이가 어렸다. 김수미라고 빛나는 미모를 과시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멜로드라마의 주연을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실제로 초창기에 노역이 싫어서 촬영장을 이탈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불암, 김혜자, 고두심 등 노련한 연기자들 사이에서 김수미는 코믹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연기로 드라마를 살리는데 기여했다. 실제로 일용네 역으로 연기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훗날 김수미는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기자에게 조연론을 펼친 적이 있다. "방송국에 들어와보니 나같은 미모는 흔했다. 미모로 승부해서는 경쟁력이 없었다"면서 "그렇다면 아무도 노리지 않는 엄마역을 선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 역을 잘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수미요? 정말 좋은 배우예요. 한국 아니고 외국에서 태어났으면요. 정말 다양한 역할을 하는 배우가 됐을 거에요. 난 걔 어떨 때는 너무 불쌍해요. 너무 많은 걸 가졌는데, 그걸 표현해 줄 역이 없었다는 게... (그 시대에) 제일 표현해 줄 수 있는 역이 일용 엄마였어요." 동료배우인 김혜자도 김수미의 연기력을 인정했다. 김수미의 유머 또한 언제나 한 수 위였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27일 오전 열린 고 김수미의 발인식에서 유족 대표가 영정을 들고 운구행렬을 이끌고 있다. [사진 = 본사 사진] 2024.10.28 oks34@newspim.com |
"내가 혜자 언니한테 그랬지. 언니 김치 담글 줄 알아? 반찬 만드는 거 있어?(아니 없지) 그런데 왜 사람들은 허구헌 날 언니보고 국민엄마래. 맨날 내가 해주는 김치랑 밥만 먹으면서 국민엄마라고 하면 안돼지. 언니 대국민 사과 해야돼.(안돼. 나 대국민 사과하다가 웃다 쓰러져서 졸도 할지도 몰라)"
이후 '오늘의 요리','수미네 반찬'등 요리 프로그램을 통해서 김수미는 엄마 손맛을 가진 조연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또 틈틈이 글을 써서 책도 내고, 최근에는 신앙간증까지 하는 등 바쁘게 살았다. 각종 예능프로그램과 드라마, 영화는 물론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식품회사까지 운영했으니 건강에 무리가 온 것이다.
누구나 일등을 할 수는 없다. 일등이 있으면 꼴찌가 있다. 젊은 시절 '한국의 비비안 리'라는 칭송을 받던 김수미가 화려한 조명을 받는 주연배우를 고집했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일찌감치 명품조연을 목표로 최선을 다했던 '김수미의 조연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수미는 1등을 하지 못해도 괴로워하지 말고, 2등이나 3등을 목표로 달려가는 일이 더 즐거운 일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 이다.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