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변상문 이사장은 6월 25일 전쟁 희생을 기리며 작품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 1950년 6월 24일과 25일 새벽, 육군본부와 전방 각 사단은 북한군 남침 징후와 포격 상황을 연이어 보고했다.
- 6월 25일 하루 동안 혼란 속에 장병 소집과 비상조치가 진행됐고, 오후가 돼서야 대부분이 복귀해 전선에 나섰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폭풍 전야의 무거운 정적이 감돌던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상황실은 지난 6월 22일부터 23일까지 이틀간 입수된 첩보의 궤적을 쫓으며 적 활동의 심상치 않은 기류에 깊은 우려를 품고 있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포천, 동두천, 개성 지계에 첩보대를 투입하여 적정을 면밀히 살피고, 그 결과를 익일 08:00까지 보고하라는 긴박한 지시를 하달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전선의 위급함을 꿰뚫는 지휘관심은 그 간절한 명령의 높이에 미처 닿지 못했다.

같은 날, 운명의 부름을 받은 김병수 소령의 첩보대는 7개 조로 나뉘어 옹진과 백천, 개성, 고랑포, 동두천, 포천, 그리고 동해의 강릉까지 전선의 혈관을 타고 급파되었다. 하지만 활동의 첫 장을 넘기기도 전인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거센 포화가 대지를 집어삼키며 그들의 발걸음은 허망한 메아리가 되어 전장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에 앞서 정보국은 북한 실정에 밝은 보국대대 요원들을 제6사단과 제7사단에 배속시켜 적의 움직임을 정찰하게 하며 최후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을 보국대대 박창암 중위는 후일 통한의 문장으로 되새겼다. "제7사단에 배속된 우리 중대는 G-2 참모 이세호 소령의 지휘 아래 적의 대남공작을 봉쇄하기 위한 사투를 시작했다. 6월 24일, 탈출한 북한군 대위의 제보를 쫓아 전방에 도사린 적 대부대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급거 출동했으나, 제1연대 전방 지휘소에 발을 들인 순간 운명의 6월 25일 새벽이 밝았다.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적의 전면 남침 앞에, 그들은 임무를 완수하기도 전에 비정하게 밀려오는 전화(戰火) 속에서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01:00, 옹진반도의 짙은 어둠을 뚫고 타전된 제17연대의 긴급 보고는 잠든 강산을 뒤흔들 거대한 비극의 전조였다. "현재 국사봉 북쪽 능선으로부터 병력 미상의 북한군이 접근하고 있다." 어둠을 틈타 은밀하게 기어드는 적의 발소리는 평화의 마지막 숨통을 조여오는 불길한 태동이었다.
시계바늘이 03:00를 가리키자, 제1사단으로부터 또 한 번의 긴박한 전언이 날아들었다. "적은 구화리에서 도하용으로 보이는 주정(舟艇)을 그들 전방으로 운반하고 있다." 강물을 건너 침략의 발톱을 들이밀려는 적의 노골적인 전진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30분이 지난 03:30, 제7사단에서 들려온 다급한 상황 보고는 전선의 고요를 완전히 종결지었다. "적 포탄이 전 진지에 떨어지고 있다." 대지를 찢는 포성은 일요일 새벽의 정적을 영구히 몰아내었고, 우리 군의 진지는 적이 퍼붓는 화염 아래 처절하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당시 육군본부 상황실의 당직 함성(喊聲)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대위 조병운은 그 통한의 순간을 이렇게 술회했다. "강릉 북쪽 38도선 지역과 춘천의 수리봉, 그리고 옹진의 까치봉에서 상황이 발생하였다는 긴급 보고가 거의 동시에 들어와 충격을 받았다." 동해의 끝에서 서해의 끝까지, 한반도의 허리가 일제히 불길에 휩싸였다는 동시다발적인 비보는 거대한 파도처럼 상황실을 덮쳤고, 평온했던 강산은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의 새벽, 육본 상황실의 공기는 전방부대로부터 빗발치는 보고들로 인해 차갑게 얼어붙고 있었다. 전 전선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타오르는 화염은 단순한 충돌이 아닌, 거대한 비극의 서막인 '심상치 않은 징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상황실은 지체 없이 당직사령에게 이 위급함을 보고하였고, 전군을 향한 비상조치를 강력히 건의했다. 이에 당직사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전선의 비보를 전하기 위해 어둠을 뚫고 급히 길을 떠났다.
동시에 상황실의 당직 상황장교들은 잠든 도성을 깨우듯 정보국장과 작전국장을 비롯한 각 부처장에게 전화기를 붙들고 긴급 상황을 타전했다. 이 절박한 비상 통보에 응답하여, 작전국 대령 이치업은 05:30에, 정보국장 대령 장도영은 10분 뒤인 05:40에 황망히 육군본부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뒤이어 참모와 관계자들이 속속 집결했으나, 야속하게도 연락망과 통신 미비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 발걸음은 비상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지체되고 있었다.
흩어진 장병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위해 전화와 전령, 그리고 공중파 방송까지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 심지어 국방부 제2국 정훈국은 가두 마이크 방송이라는 최후의 수단까지 강구했다. 서울 시내의 골목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집회장마다 장병들의 원대복귀를 독촉하는 요란하고도 처절한 목소리가 종일토록 메아리쳤다. 그러나 운명의 시계는 너무나 빨리 흘러, 그날 14:00가 넘어서야 비로소 80%의 장병이 부대로 돌아와 총을 잡을 수 있었다. 전선의 불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으나, 복귀하는 이들의 발걸음 위에는 조국을 향한 무거운 결의만이 흐르고 있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