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 수첩', 직접 증거로 채택 안돼
[뉴스핌=최유리 기자] 빈수레가 요란했던 것일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공여 혐의를 입증할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으로 꼽혔던 안종범 수첩이 결국 직접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당시 정황을 가늠할 간접 자료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 재청구를 가능케 했던 특검의 '승부수'가 사실상 '무리수'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6일 새벽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재판장 김진동)는 이 부회장 등 삼성 전현직 임원 5명에 대한 36차 공판에서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업무수첩을 직접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독대에서 (수첩에 적힌 대로) 말을 했다는 진술 증거로는 인정할 수 없다"며 "다만 둘 사이 대화가 있었다는 정황 증거로 보겠다"고 판단했다.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독대 당시 안 전 수석이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첩에 메모한 내용이 곧 대화 내용이라고 동일시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안종범 전 청와대 수석이 지난 1월 9일 서울 강남구 특검사무실에 출석하고 있다. / 이형석 기자 leehs@ |
당초 특검은 '삼성 엘리엇 대책', 'M&A(인수·합병) 활성화 전개' 등의 단어가 적힌 안종범 수첩을 핵심 증거로 내세웠다. 이 부회장이 대통령 독대에서 청탁을 했고 박 전 대통령이 이를 들어줬으며, 그 대가로 삼성이 최순실씨에게 승마지원 등을 했다는 고리를 연결하려면 청탁 여부부터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반부를 넘어선 재판 현장에 수십명의 취재진과 일반인 방청객이 몰려든 것도 안종범 수첩의 무게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 전 수석은 "대통령은 여러 행사에서 만난 기업인들에게 여러 현안을 듣고 필요한 지원 방안을 지시하기도 한다"면서 삼성의 독대가 다른 기업과 다를 게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삼성물산 합병이나 삼성생명 금융지주사 전환과 관련된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독대 후 삼성 현안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받아쓴 것이지 지시 사항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특검이 자신했던 것과 달리 청탁 여부를 입증하지 못한 셈이다.
삼성 측 관계자도 "특검이 주장하는 핵심 내용인 경영권 승계나 최순실, 정유라 등의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면서 "만약 수첩에 정말 민감한 내용이 담겼다면 회의 때 참고하라고 비서관에게 넘기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검의 힘을 빼는 것은 안종범 수첩 만이 아니다. 안 전 수석을 비롯해 '키맨'으로 불리던 정호성 전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은 "독대 내용을 모른다"며 혐의 입증의 헛바퀴만 돌렸고,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는 기존 진술을 뒤집어 특검을 당혹케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개월 가까이 된 삼성 재판은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총 300여 시간을 넘긴 36차례 재판과 44명의 증인 신문이 있었지만 특검은 여전히 추가 증인에 목이 마른 상황이다. 특검은 증인 추가를 위해 주말 재판이나 주 5일 재판을 요구하고 있다.
스모킹 건이 나오지 않으면서 특검의 조바심도 엿보인다. 유도 신문이나 증거 해석을 두고 재판부에게 지적을 받는 빈도가 높아졌다는 게 이를 방증한다.
지난 5일 이상화 전 KEB하나은행 독일 프랑크푸르트 지점장 신문에서 재판부는 특검에게 "증인이 알지도 못하는 내용에 대해 (개인적인 판단을) 물으면 유도신문 밖에 안 된다"고 꼬집었다. 안종범 수첩에 대한 증인 신문이나 언론 기사에 대한 서증조사를 두고도 "증거를 제시하면 되지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안종범 수첩이라는 '묘수'는 확실한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면 애초부터 무리한 기소였다는 '자충수'가 될 뿐이다. '세기의 재판'으로 이목을 끌었지만 아직도 클라이막스가 나오지 않는 삼성 재판이 어떻게 흘러갈 지 지켜볼 일이다.
[뉴스핌 Newspim] 최유리 기자 (yrchoi@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