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48)
1956년 4월 18일, 전 세계의 이목은 아름다운 지중해에 위치한 자그마한 나라 모나코에 집중되었다. 다름 아닌 이날은 모나코의 왕 레이니에 3세와 은막의 여왕 그레이스 켈리의 화려한 결혼식이 거행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식 행사는 무려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당시 레이니에 3세와 켈리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3천명 이상의 유명인들이 기차, 비행기, 선박, 요트를 이용해 모나코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들이 쓰고 간 돈이 무려 모나코 전체 국가예산의 절반에 이를 정도였다고 했다. 결혼식 이후 켈리는 그레이스 공비(Princess Grace)라고 불리게 된다.
켈리는 영화계에 데뷔한 지 5년 만에 단역에서 톱스타로 성장했고, 또한 배우로서의 인생을 산 지 딱 5년 만에 할리우드를 떠나게 되었다. 모나코 왕비가 되면서 그녀는 가장 정점의 시기에 은막의 세계를 떠나야 했다. 켈리의 팬들은 더 이상 그녀를 은막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며 커다란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1955년 4월 30일,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미국 할리우드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1929~1982)는 프랑스 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칸에서 머무는 동안 기대 이상의 만족을 느꼈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어느 여배우들보다 자신에 대한 팬들의 성원이 더 뜨거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예상치 않게 모나코 왕궁으로부터 초대까지 받았다. 왕궁에서 열리는 사진촬영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게 초청장의 내용이었다. 칸에서 모나코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기에 그녀는 바람이나 쐬자는 생각에서 모나코 왕궁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왕궁에서 레이니에 3세가 그녀를 맞았다.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켈리가 모나코를 방문하고 6개월 정도가 지난 1955년 11월, 레이니에 국왕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모나코 왕궁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방미 이유는 여행이었다. 미국에서는 당시 32세이던 그가 왕비를 구하러 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그가 뉴욕에 도착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결혼상대로 어떤 여자를 찾고 계신가요?”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최고의 여자?”
이후 레이니에 3세는 크리스마스를 부모와 함께 지내기 위해 필라델피아의 부모님 집에 가있던 켈리를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그해의 마지막 날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켈리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1956년 4월, 그레이스 켈리는 레이니에 3세의 영원한 신부가 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모나코에서 레이니에 국왕을 만나고 미국으로 돌아간 켈리는 영화 '백조'에서 한 유럽왕국의 공주 역할을 맡았었다.
이 세기의 결혼이 언제부턴가 순수한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그 뒤에는 다분히 정략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는 이야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당시 프랑스의 백만장자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재산을 조세피난처인 모나코로 빼돌렸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세금을 환수하는 조치를 고려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당시 모나코 왕 레이니에 3세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모나코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만드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미국 최고 여배우와의 결혼이었다. 이 경우 프랑스가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여론을 의식해 모나코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도 나왔다. 1918년에 체결된 ‘프랑스-모나코 조약’에 의하면 모나코 왕이 후사를 얻지 못할 경우 모나코는 프랑스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모나코의 관광사업이 주춤했던 터라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니에 3세는 세계 최고의 흥행녀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전략을 구상했던 것이다.
여기에 레이니에 3세의 오랜 친구이던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도 이 정략적인 결혼을 적극적으로 권장했었다. 모나코의 관광산업이 부흥하면 선박사업을 하고 있던 오나시스 또한 자연히 커다란 수익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오나시스는 누구보다 이 결혼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것이다.
당시 왕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유명 여배우는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그레이스 켈리 등 세 사람이었다. 우선 오드리 헵번이 집중적으로 검토되었다. 그러나 헵번은 이런 저런 결격사유가 드러나 탈락했다. 이유인즉 그녀가 벨기에 태생이라 초강대국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점, 더욱이 헵번의 아버지가 나치 추종자였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왕비 후보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한편, 할리우드 섹스심벌로 불리던 마릴린 먼로의 경우 왕비가 되기에는 무언가 품위가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어 탈락했다.
결국 그레이스 켈리가 최종 낙점이 되었다. 물론 켈리 또한 당시 25세의 나이에 오스카상을 수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캐리 그랜트, 개리 쿠퍼 등 유명 남자 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는 등 스캔들을 낳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이미지가 우아하고 고상했기에 상대적으로 가장 나았다. 여하튼 레이니에 3세는 마음을 굳힌 후부터는 켈리와의 결혼을 서둘렀다.
사실 레이니에 3세에게는 왕세자 시절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프랑스 여배우 지젤 파스칼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동거를 했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의사가 파스칼은 불임이라고 진단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왕세자비가 아기를 낳지 못할 경우 왕세자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는 모나코 왕가의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프랑스와 맺은 조약에 의하면 왕세자에게 후계자가 생기지 않으면 모나코는 프랑스에 병합되어 일개 도시가 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막다른 상황에서 레이니에 3세에게는 그레이스 켈리가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레이스 켈리가 왕비로 살았던 모나코의 전경 <사진=이철환> |
이 세기의 결혼식 이후 모나코는 예상대로 전 세계로부터 커다란 관심을 끌게 되었다. 켈리 또한 자신의 유명세와 매체를 이용해 국가적 위기상황을 전 세계에 알려 국제여론을 모나코 편으로 만들었다. 특히 켈리는 결혼 이후 남편 레이니에를 도와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쳐 모나코를 관광대국으로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모나코는 프랑스에게 합병당할 위기의 나라에서 당당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뒤바뀌었다. 모나코는 관광수입이 급증하면서 경제 또한 활발하게 돌아갔다.
여기에다 켈리는 모나코의 사람들이 매우 사랑하는 캐롤라인 그리말디 공주를 낳아 모나코를 강제합병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또한 1958년 알베르 왕자를 낳아 왕실의 후계 구도를 확실히 구축했으며, 1965년 스테파니 공주를 낳아 더 이상 프랑스의 위협을 받지 않는 당당한 후계자가 버티고 있는 나라로 확정지었다.
모나코는 행복했다. 레이니에 3세 또한 행복했다. 그는 나라를 지키고 모나코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또 아름다운 켈리를 아내로 옆에 둔 남편이자 세 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삶을 이어갔다. 반면, 켈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
은막의 여왕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자유롭게 살았던 켈리는 왕실의 안주인이 되면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법도와 외부의 시선 때문에 많은 부담과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나코에서는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켈리는 프랑스어에 능하지 못해서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또 왕실의 엄격한 규칙이나 전통을 제대로 지켜야 하고, 언제나 긴장하며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크게 웃을 수도, 누구와 잡담을 할 수도 없는 생활이었다.
모나코 시민들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마저 그녀를 힘들게 했다. 여기에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레이니에 3세와의 갈등과 마찰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결국 날이 갈수록 켈리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세가 심해졌다. 그녀는 자유롭고 싶었고, 다시 여배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레이니에 3세는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켈리를 위로해 주기 위해 화려한 파티를 연이어 열었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켈리가 왕비로서 또 어머니로서의 본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뜻에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모나코에서 상영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런 레이니에 3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켈리는 틀에 갇힌 왕실 생활에 지쳐갔다. 마침내 그녀는 알코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처럼 할리우드의 자유로운 생활을 그리워하던 차에 때마침 1962년에 히치콕 감독이 영화 출연을 제안해 왔다. 그녀는 배우로 복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 이에 응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의 배역이 도벽이 있는 캐릭터인 것으로 알려지자 품위 문제를 들어 모나코 언론과 국민들이 반대해서 스크린 복귀계획은 무산됐다.
1982년 9월 13일, 켈리는 막내딸 스테파니 공녀와 함께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였다. 그러던 중 그들이 타고 가던 차가 그만 산비탈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같이 타고 있던 스테파니 공녀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켈리는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날인 9월 14일, 5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사고원인을 조사한 결과 공식적으로는 운전미숙으로 인한 사고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이후 여러 가지 음모론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켈리가 마피아 조직의 모나코 카지노 유입을 강하게 반대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마피아가 제거했다는 설, 왕실 일가와의 잦은 갈등으로 왕실 측에서 암살을 시도했다는 설, 남편과의 불화로 인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을 것이라는 설 등 아직도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다양한 루머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언젠가 미국의 여성잡지 〈woman's journal〉이 역사상 가장 우아한 여성이 누구인지 여론조사를 벌였다. 독자 투표 결과 그레이스 켈리가 1위를 차지했다. 170cm의 훤칠한 키에 눈처럼 흰 피부, 빛나는 금발과 호수처럼 파란 눈, 차갑고 도도한 듯하면서도 따뜻해 보이는 매력, 기품이 우러나오는 귀족적인 우아함... 인기 절정의 배우에서 왕비로 신분이 바뀐 켈리의 이야기는 현대판 신데렐라 그 자체였다.
켈리는 임신한 상태에서도 그녀의 우아한 매력을 한껏 발휘하였다. 오늘날 전 세계 여성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에르메스 켈리백은 바로 ‘그레이스 켈리’의 이름에서 따왔다. 1956년 미국의 시사화보 잡지인 〈라이프(LIFE)〉 에 켈리가 임신으로 만삭인 배를 가리기 위해 에르메스 가방을 든 사진이 실리게 되면서 그 가방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이후 에르메스(Hermès)사는 모나코 왕실의 허락을 받아 이 백을 ‘켈리백(Kelly bag)’이라고 명명하고 마케팅에 활용했다.
이제 그레이스 켈리는 이 세상에 없지만 가장 아름답고 우아했던 모나코 왕국의 왕비이자 은막의 여왕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