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배우 고아성이 의도치 않게 연달아 '을의 대변자'가 됐다. 전작 '오피스' '항거'에 이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도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의미있는 캐릭터를 찾아나섰다.
15일 삼청동 한 카페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개봉을 앞둔 고아성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화장기 없이 수수한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그는 "개봉 앞두고 굉장히 긴장된다. 영화를 보신 분들 얘기 들을 때마다 너무 설렌다"면서 흥분되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완성된 영화가 시나리오랑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어요.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데, 인물들이 정말 많이 나오잖아요. 다같이 모여서 각자의 캐릭터가 돼서 말과 행동을 하니까 더 다채로운 풍경이 많이 만들어진 느낌이에요. '항거'보다는 좀 밝고 유쾌하지만, 마냥 가벼운 작품은 아니죠. 그래도 그런 지점에서 끌렸어요. 친구들과 함께 파이팅하는 얘기고,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가니까 대단한 반전은 아니어도 이면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라 좋았죠."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출연한 배우 고아성[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2020.10.15 jyyang@newspim.com |
극중 자영은 20대 특유의 밝고 유쾌한 감성의 인물이자, 과도한 오지랖으로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다. 무단 폐수방류라는 사건을 목격하고, 해결을 자처하는 그를 보며 영화를 보는 내내 극을 끌어가는 자영에게 깊게 몰입하고 응원하게 된다. 고아성은 "시나리오대로 잘 표현하려 했다"고 신경쓴 부분을 말했다.
"시나리오에 자영이가 정말 탄탄하게 그려져 있었어요. 첫 인상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선하고 정의로운데 뻔하지만은 않고 같이 옆에 있고 싶은 그런 친구예요. 제 주변의 그런 사람들이 떠올랐죠. 사실 제가 자영이랑 많이 비슷하진 않아요.(웃음) 좀 내성적이거든요. 자영이는 좀 닮고 싶고,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나서는 저를 좀 바꾸려고 하긴 했어요. 의도적으로 에너지를 좀 끌어올려서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좀 더 외향적으로 바꾸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1995년도를 배경으로 대기업 사내문화를 그린 장면이나, 여사원들의 패션, 처우 등에는 꽤 사실적인 고증이 따랐다. 고아성은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그 시절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그때 회사원이었던 이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할머니댁에 있을 때 이모가 퇴근하던 장면이 아직 잔상처럼 남아있다"고 털어놨다.
"기억이라고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어렴풋한 잔상이죠. 90년대를 그린 작품도 시대극이긴 하지만 그다지 먼 과거는 아니니 기억하고계신 분들도 많을 거예요. 보시고 아닌데? 하시면 안되니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시대극을 여러 개 많이 해봤는데도 이번엔 더 특별한 느낌도 있었어요. 이모가 자영과 비슷한 느낌의 회사를 다녔기도 해요. 이모한테 사진 좀 달라고 해서 으리으리한 회사 건물 뒤켠에서 찍은 걸 받아 감독님께도 보여드렸죠.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세 친구가 담겨있었어요.(웃음)"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출연한 배우 고아성[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2020.10.15 jyyang@newspim.com |
모두가 고증에 최선을 다한 덕에, 영화 속에선 90년대 고졸 여사원들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출근하자마자 남긴 음식과 담배꽁초가 쌓여있는 야근의 흔적을 치우는 일, 모닝커피를 타고 담배 심부름을 하는 일 등의 장면은 유쾌하게 표현됐지만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이 말하려는 바는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도 꽤 중요했다.
"자영을 충실히 연기하는 건 당연하지만, 작품 전반적인 느낌을 파악할 필요는 있었죠. 영화 초반에 호기롭게 출근하고 첫 하는 일이 쓰레기 치우는 일이에요. 청소하고 '오늘도 화이팅' 하고 담배 심부름하고 구두 가져다 놓고. 그 장면만 보였다면 그냥 시대 고증으로 끝났겠죠. 그런데 김원해 선배 대사 중에 '왜 남의 일을 우리한테 시키고 그래?' 하는 대사가 깔려요. 그게 참 절묘하더라고요.(웃음) 촬영 초반에 찍었거든요. 아 이런 톤을 우리 영화가 가지고 가는구나 하고 파악할 수 있었죠."
고아성은 이번 영화에서 비슷한 나이대의 동료 이솜, 박혜수와 트리오로 호흡을 맞췄다. 그 외에 '영어토익반'의 친구들과 똘똘 뭉쳐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고 위기를 타개한다는 게 이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있다. '작고 작은 존재'들이 뭉쳐 '위대한 우리'가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또 통쾌하게 보여주는 게 숙제였다.
"언니랑 혜수랑 두살씩 터울이에요. 촬영 끝난 후에도 많이 시간을 같이 보냈죠. 나이차는 있었지만 영화 취지에 맞게 아메리칸 스타일로 친구처럼 지냈어요. 하하. 마지막엔 사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연대해서 돌파구를 만드는데, 그게 이 영화의 특징이자 주제 같아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합을 이루지만 그 누구의 사정이나 가정사가 두드러지지도 않아요. 전체의 힘을 보여주려는 시각이 유지되는 느낌이죠.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연기했고, 자영의 내면이나 추진력도 중요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뭉쳐서 해낸다는 게 좋았어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출연한 배우 고아성[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2020.10.15 jyyang@newspim.com |
이 영화엔 모두의 작은 노력이 모여서 큰 성취를 이루는 것과 함께, 또 하나의 주제의식이 담겨있다. 여사원들이 시달렸던 잡무,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이는 작은 능력이 결국은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된다. 이종필 감독은 아주 작은 디테일들을 영화 곳곳에 숨겨뒀다. 고아성은 이같은 언급에 "제가 연기하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줬다"면서 감격했다.
"처음에 작은 일들이 나중에 크게 쓰이는 걸 알고 연기를 하더라도, 그 상황 속에서 감정은 쌓이죠. 아무래도 엔딩 장면을 찍을 때 연기 외적으로도 통쾌한 심정이었어요. 감독님이 디테일하게 설정해놓는 걸 좋아하세요. 뭘 하나 쓰시더라도 그냥 쓰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여쭤봐요. 그럼 자세히 설명도 해주시죠. 누구나 무시하던, 혹은 불편해하던 일들도 쓸모가 있다는 게 자영도 그래요. 자영이의 오지랖 어린 성격이 결국 이 사건을 승리로 이끈 거죠. 그렇게 표현되기를 바랐어요."
영화 '괴물'의 아역으로 알려진 후, '오피스' '설국열차' '항거'를 거쳐오며 고아성은 의도치 않았지만 어쩐지 약자를 대변하는 '을의 대표'를 연기해왔다. 그는 "그런 캐릭터를 좋아해서 하게 된 듯 하다"고 돌아봤다. 고아성은 앞으로 연기변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당분간은 스스로가 끌리는 '의미있는'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는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약자의 입장을 연기한다는 게 매번 쉽지 않은 일이긴 해요. 이자영도 어떻게 보면 비슷한 상황이지만 든든한 사람들이 주변에 함께 한다는 점이 좀 달랐죠. 그동안 극을 이끌어가는 역도 해봤고 작은 일원으로서 참여해본 적도 있어요. 저는 그 두가지가 똑같이 재밌고, 의미있게 느껴져요. 한 가지 길만 고수하고 싶진 않아요. 명확하게 의미있는 캐릭터의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시나리오를 보고 자연스레 느껴지는 걸 따르는 편이에요. 제가 보고 있는 세상의 일부분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캐릭터라면 끌리는 것 같아요. 악역이요? 한번만 더 이런 역 하고 하겠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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