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배우 김혜수가 운명처럼 만난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평생에 다시 없을 경험을 했다. 거의 스스로와 동일화된 인물을 연기했고, 배역과 실제 배우를 넘어서는 감정의 교감을 처음으로 느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의 개봉을 앞둔 김혜수와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혜수는 조금은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침착하게 극중 현수와 영화에 관해 얘기했다. '운명처럼' 다가온 작품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만큼 답변마다 진지함과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영화에 미스터리도 나오지만 수사물이라고 규정하긴 어렵죠. 오히려 사건을 통해서 인물들의 감정이 나아가는 여정을 담았달까요. 서로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만나고 나서도요. 결국은 여러 과정을 거쳐 자신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죠. 제목부터 '내가 죽던 날?' 하면서 저도 모르게 이끌렸어요. 글을 다 읽을 즈음엔 전혀 예상치 못한, 기대하지 않았던 묵직하고 뭉클한 위로와 위안이 찾아왔죠. 이 마음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다면, 전달할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저한테 너무 필요한 얘기였고, 누군가에게도 꼭 만나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죠."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내가 죽던 날'에 출연한 배우 김혜수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2020.11.10 jyyang@newspim.com |
신인 박지완 감독의 입봉작이자, 주연 세 명이 모두 여성. 김혜수와 이정은이 든든히 받쳐주기는 했지만 개봉까지 오는 여정이 쉽지는 않았다. 김혜수는 "이야기에 끌려 선택했지 여자들이 많은 건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동시에 이 영화가 여기까지 온 건 '진심이 만난 결과'라고 돌아봤다.
"우리 영화도 그렇지만 모든 작품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굉장히 많아요. 올해는 코로나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장벽이 더 생겼죠. 여기까지 오게 된 건 초지일관 만난 사람들의 진심 하나였어요. 이 시나리오를 보고 거기서 진심을 읽어낸 사람들이 만났고, 투자자들도 똑같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해요. 투자라는 건 상업적인 수익구조가 가장 안전할 때 좋은 거잖아요. 진행 중에는 사실 어떤 걸 바꿔달라는 제안을 전해 들은 적도 있었죠. 그때마다 우리끼리 손 붙잡고 '이게 본질이야. 이걸 전달해야해'라는 진신 하나로 버텼어요. 모두가 이 시나리오만이 갖는 힘과 미덕에 굉장히 크게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했죠."
특히나 김혜수는 "이 글이 이 시기에 나에게로 와서, 마치 나에게 들려주는 얘기 같았다"면서 이 시나리오만의 힘을 강조했다. 실제로 여느 영화와는 달리 새로운 이야기와 구성, 접근 방식을 자랑하는 '내가 죽던 날'. 각자 삶의 벼랑 끝에 선 세 여자가 서로 손을 잡고 연대감을 보여주지만, 직접적인 대화나 소통이 거의 없다. 심지어 현수(김혜수)는 세진(노정의)와 거의 마주치지조차 않는다.
"이미 시나리오에서 만나지 않은 인물간에 촘촘하고 깊은 연결선이 느껴졌어요. 셋은 각자 다르지만 연결돼있죠. 현수와 세진은 현재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내고 있고요. 본인들이 잘못한 건 아닌데, 그럼에도 그 이후를 떠맡아야 하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순간, 절망스러운데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오죠. 현수는 사실 괴로운 현실을 잊으려고 이 사건을 맡은 거예요. 이 아이의 손을 잡아주겠단 마음은 없었죠. 거의 종결이 된 사건을 보고서만 쓰면 완결되는데 이 사연을 통해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보기 싫었던 나의 얼굴을 만나죠. 이입시키고 동일시하고 결국 놓을 수가 없게 돼요. 주요 증인이라 보호 차원에서 섬으로 보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유배 혹은 감금이죠. 또 가장 신뢰했던 사람이 남긴 상처라는 지점에서도 현수와 세진은 연결돼있어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내가 죽던 날'에 출연한 배우 김혜수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2020.11.10 jyyang@newspim.com |
세진과도 그렇지만 침묵의 목격자 순천댁과도 현수는 겉으로 거의 교감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두 사람이 마주하는 장면은 객석에 조용하지만 강력한 감정의 파장을 전달한다. 김혜수는 어려운 과정이었음을 담담히 돌아보며 모든 공을 시나리오와, 함께 호흡한 훌륭한 배우들과의 시너지로 돌렸다.
"순천댁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어떤 시도를 하려고 했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죠. 자신을 구제하지 못했지만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또 손을 내밀게 되고요. 그런 점에서 또 세진과, 현수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에요. 어떤 의도 없이도 현수만 주욱 따라가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죠. 최대한 이 글에서 운영되는 대로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복잡하고 드러나지 않는 것들, 만나지 않은 사람들의 연대감, 그게 우리가 해내야 하는 일이었죠. 작은 디테일의 힘이 쌓이고 만나고, 이후에 진실을 접했을 때 폭발하는 파장이 중요했거든요. 다행히 모든 게 시나리오에 잘 갖춰져 있었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덕에 시너지가 나왔어요. 오로지 이 진심을 어떻게 진실로 전달할지 주력했죠."
이전에도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김혜수는 이정은과 함께 연기하면서 꽤나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극중 현수와 순천댁이 모든 진실을 알고 부둣가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신에 들어가기도 전에 둘은 마주보고 한참을 눈물을 흘렸다. 어떤 말도 없이, 배역으로서 또 같은 배우로서, 인간 김혜수와 이정은으로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교감을 했다고. 김혜수는 이같은 경험은 연기생활 중 처음이었다고 고백했다.
"이걸 어떻게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고 기대도 됐죠. 현장에서 준비하면서 바라보는데 수레를 끌고 오는 정은씨가 진짜 그냥 순천댁이었어요. 고마워서 눈물이 났죠. 가까이 오는 순천댁이 또 울고 있어요. 손 잡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참 울었어요. 우리끼리는 이미 그 신이 다 됐다 싶었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캐릭터의 감정과 우리의 연대감이 묘하게 일치하는 순간을 겪었죠. 그 순간이 길었는지 짧았는지 기억이 안나요. 너무 특별했고 처음 겪는 감정이었죠. 그러고 촬영에 들어갔어요. 어떤 영화에서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순간은 아니에요. 우연히 캐릭터로서도, 인간적으로서도 제 생각에 완벽한 순간같은 느낌. 그걸 경험했죠. 정말 오래 기억할 것 같아요. 이 작품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것만으로 아주 큰 의미로 남을 것 같아요. 정말 기대하지 못했던 특별한 순간이니까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내가 죽던 날'에 출연한 배우 김혜수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2020.11.10 jyyang@newspim.com |
진심으로 이 이야기를 아꼈던 만큼, 김혜수는 예상치못한 두려움에도 부딪혔다. 그는 "글을 보고 느낀 걸 영상으로 재현한다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라면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아직은 어린 배우 노정의와 호흡을 묻자 "저라고 다를 것 없다"면서 그의 표현방식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정말 두려웠죠. 이걸 보고 글에서 느낀 그 감정이 느껴질까. 소설과 영상을 보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잖아요. 그 간극을 제대로 메꿔가느냐가 가장 무겁고 유일한 숙제였죠. 연기는 잘한단 얘길 들어도 와닿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시나리오는 좋던데'라는 말을 듣지 않게, 본질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 역할을 다하려 애를 썼죠. 노정의 양도 그렇고 배우가 어리다고 해서 뭘 배우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현장은 늘 우리가 준비한 것 이상을 해내야 하는 곳이고 계속 배우고 느끼고 영향을 받아야 하는 곳이죠. 경험이 많다고 해서 어떤 노하우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가장 고마웠던 건 다 그상태로 자연스럽게 집중할 수 있게 내버려둔 것. 방치가 아니라 다들 무언의 배려로 어디 하나 요란하지 않게 유지해줬죠. 그게 참 도움이 됐어요."
80년대에 데뷔해 30년이 넘게 연기자로 살아온 김혜수. 아주 영화적이고 극적인 캐릭터, 전형적인 캐릭터, 또 최근의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행보까지 두루 거쳐왔다. 모두가 그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예전과는 달라졌다. 김혜수는 "작품은 마음가는 대로 한다"면서도 확실히 이전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음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대중이 저를 많이 기다려주신 것 같다"면서 감사했다.
"운이 좋고 다행인 것 같아요. 20대, 30대 땐 대부분 천편일률적이고 배우로서 욕망을 비껴가는 역이 많이 들어왔죠. 뭔가를 해볼 수 있는 작품을 만나는 것 자체가 행운이에요. 어릴 땐 왜이렇게 작품을 못고르냐는 말도 들었어요. 근데 나한테 오는 것 중엔 최선이었죠. 많은 배우들이 고민하는 문제예요. 어떤 배우도 게으르지 않아요. 뭐든 해낼 수 있게끔 준비는 하지만 이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다양하게 오진 않거든요. 또 기회를 얻으려면 계속 뭔갈 증명해야 하죠. 저도 그랬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는 배우들, 아직 무언가를 뛰어넘지 못한 배우들에 대해 판단이나 평가를 조금 유보해주시면 어떨까요. 우리 대사처럼 인생이 길더라고요. 저도 참 느렸어요. 그 중에 무언가를 해나가다보니 여기까지 왔죠. 배우와 작품이 정비례하지 않아도 너무 작품 하나로 가혹한 평가를 내린다면 그 다음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기다려주시면 좋겠어요. 하하. 감사하게도 저는 많이 기다려주신 것 같아요."
jyy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