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주식 비중 조정, 개인투자자 표심 의식한 것 아닌가
국민의 노후 달린 문제, 운용계획은 전문적이고 신중해야
[서울=뉴스핌] 임성봉 기자 = 주식시장에는 '왝더독(Wag the dog)'이란 용어가 있다. 선물시장(꼬리)이 현물시장(몸통)을 흔드는 것을 지칭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현물거래에서 파생된 선물거래가 시장 영향력이 커지면서 오히려 몸통인 현물시장을 좌우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쉽게 말해 '주객전도'다.
국민연금이 최근 국내주식 자산 비중 이탈 허용범위(SAA)를 조정했다. 시장 상황이 바뀌어 SAA를 조정해야 한다는 게 표면적 이유다. 시장 상황이 어떻게, 얼마나 바뀌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국민연금의 최장기 매도세를 비판하는 개인 투자자들의 여론이 고조된 상황과 이번 결정이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개인 투자자들의 표심을 의식해 정치적 결정을 내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뉴스핌] 임성봉 금융증권부 기자 |
개인 투자자에게 국민연금의 이번 결정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반면 국민연금 가입자에게는 우려스러운 일이다. 가입자의 노후자금을 바탕으로 수익을 극대화해야 할 국민연금이 엉뚱하게도 개인 투자자에게 백기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가입자 중 자신의 노후자금이 증시부양에 사용되길 바라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물론 가입자 중에는 개인 투자자도 있지만 모든 개인 투자자가 국민연금 가입자인 것은 아니다.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 원칙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수익'이다. 국민연금재정추계위원회가 지난 201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적립기금은 2042년부터 적자로 돌아선 뒤 2057년에는 완전히 고갈될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기금 고갈 시점은 국민연금재정추계위원회가 분석한 결과보다 조금씩 앞당겨지고 있다. 앞으로 국민연금 가입자가 더 가파르게 줄어들 것이란 관측까지 고려하면 전망은 어둡다.
개인 투자자들은 '국민연금이 국내주식에서 수익을 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그래서 국민연금은 더더욱 SAA를 조정하지 않아야 했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증시 폭락 당시 국민연금이 사들인 국내주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자산 비중도 목표치를 크게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개인 투자자 여론에 밀려 당초 계획까지 바꿔가며 SAA를 조정, 매도 속도를 늦추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국민연금 산하 위원회와 전문가들이 SAA 조정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어쩐지 찝찝함이 가시질 않는다. 굳이 왜 지금 시점에 SAA를 조정했느냐는 질문에 국민연금이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점도 개운치 않다. 국민연금이 SAA 조정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때 마침 개인 투자자들이 국민연금의 매도세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환상적이고 드라마 같은 상황이 우연히 연출된 것일까.
얇은 월급봉투에서 매달 얼마씩 떼어 국민연금에 납부하는 가입자들의 기대는 분명하다. 지금 맡긴 돈을 국민연금이 대신 잘 운용해주고 후에 넉넉한 노후자금으로 돌려달라는 것. 그래서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계획은 매우 전문적으로 수립돼야 하고 한 번 결정이 됐다면 우직하게 시행하되 변경이 필요할 땐 거듭 신중을 기해야 한다.
1990년대 개봉한 미국의 영화 '왝더독'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꼬리는 왜 개에게 흔들리는 걸까. 그것은 개가 꼬리보다 똑똑하기 때문이다. 만약 꼬리가 더 똑똑했다면 꼬리가 개를 흔들어 댔을 것이다"라는. 지금 한국에서는 개인 투자자가 국민연금을 흔든다. 그럼 개미가 똑똑한 걸까. 국민연금이 바보인 걸까. 그도 아니면 국민연금이 바보인 척 흔들리는 걸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국민연금을 흔들어서도, 국민연금이 흔들려서도 안 된다는 것. 국민연금이 흔들리면 국민의 노후도 흔들린다. 그래서 국민연금의 이번 결정은 곱씹을수록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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