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해진 규정 해석 놓고 조합·시공사 갈등 격화
도시정비 초양극화 우려…합리적 기준 절실
[서울=뉴스핌] 송현도 기자 = 최근 도시정비 현장의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조합이 시공사에 요구하는 제안서의 세부 사항이 까다로워지는 이른바 입찰 지침 고도화 트렌드가 급격히 확산 중이다.
이로 인해 입찰 마감 과정에서 조합이 일부 시공사의 책임을 물어 유찰 사태로까지 촉발되며 도시 정비 시공권을 노리는 건설사들 역시도 제안서 작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추세다.
◆ 까다로워진 입찰…성수4지구·마포로5구역 줄유찰 선언

23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성수전략정비구역 제4지구(이하 성수4지구)의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세부지침 논란이 발생한 이후 서울 내 타 도시정비 사업장에도 조합이 요구하는 제안서를 맞추지 못할 경우 유찰을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성수4지구 재개발 조합은 지난 9일 시공사 선정 입찰 마감 과정에서 대우건설에 입찰 무효를 통보하고 입찰 자체를 유찰 통보했다. 통상적으로 경쟁입찰이 성립될 경우 제안서 비교와 보완 절차를 거쳐 조합원 총회에서 최종 평가가 이뤄지는 것을 고려하면 경쟁 입찰 성립 단계부터 제동이 걸린 것이다.
조합 측이 내세운 유찰의 표면적 사유는 제출 서류의 미비로, 대우건설에 보낸 공문을 통해 흙막이, 전기, 통신, 구조, 조경, 소방, 기계, 부대토목 등 세부 공종 분야의 설계 도면이 제출되지 않아 공사비 산출 근거 및 시공 범위의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하므로 규정에 따라 유찰되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대우건설은 입찰지침에서 요구한 필수 서류를 모두 제출했다며 즉각 반발했다. 조합이 제시한 원안 공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시공할 것을 확약하는 경우, 실시설계 수준에 해당하는 세부 공종 도서를 제출하는 것은 업계의 관행에 맞지 않으며 국토부 지침상 제출 의무가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갈등은 성동구청이 "입찰 단계에서 필수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설계 도면과 산출 내역서로 크게 명시되어 있으며, 논란이 된 세부 공종 도서의 제출 의무는 지침상 명확히 세분화되어 규정되어 있지 않다"며 대우건설의 손을 들어주고서야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
이 직후 성수4지구와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다. 마포로5구역 제2지구 조합 역시 두산건설에 대해 필수 서류 누락을 이유로 유찰을 통보한 것이다. 이를 두고 두산건설은 제출 기한을 맞춰 서류를 모두 냈고 입찰 당일 현장 확인 절차에서도 누락이 없다는 안내를 받았다고 반박했다.
앞서 해당 시공사 선정 입찰에는 중견 건설사인 두산건설과 남광토건이 참여하여 2파전의 경쟁 구도가 형성됐지만, 조합의 유찰 선언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 깐깐해진 규정 해석 놓고 조합·시공사 갈등 격화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경쟁 입찰은 워낙 다양한 구설수에 휘말릴 수 있다 보니, 가장 기본이자 핵심인 서류 작업의 공정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며 "서류 접수 후 양사가 제출한 내용을 바탕으로 비교표를 만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흠결이 발견되면 곧바로 공정성 시비로 이어지기 때문에 조합과 시공사 모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경쟁사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서류 제출 분량까지 꼼꼼하게 따지며 미비점을 찾아낸다. 규정을 완벽히 준수한 시공사 입장에서는 서류가 미비한 경쟁사와 동일한 조건에서 평가받는 것 자체가 불공평한 처사이기 때문"이라며 "조합 역시 이런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입찰 지침과 서류 구비 여부를 깐깐하게 살피고 명확히 하려는 것이 최근의 뚜렷한 트렌드"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현장의 혼란은 정부와 지자체가 정비사업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시공자 선정 기준을 강화한 것과 맞물려 조합의 눈높이가 전례 없이 높아진 탓으로 풀이된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1월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 개정안을 통해 물가 변동에 따른 공사비 조정 기준을 입찰 단계에서부터 명확히 하도록 의무화했다. 서울시 역시 '공공지원 정비사업 시공자 선정기준'을 통해 마감재 수준과 스마트홈 시스템 등을 구체화한 '공동주택성능요구서' 제출을 강제하고 있다. 조합 입장에서는 이를 근거로 마감재 규격부터 세부 설계 도면까지 깐깐한 요구 조건을 입찰지침서에 못 박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조합의 시공권 부여 권한이 비대해진 것과 별개로 규정 해석을 두고 조합과 시공사 간의 법적 해석이 달리하며 아전인수식 유권 해석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성수4지구의 경우 과거 판례를 살피면 시공자 선정 과정에서 설계 도서의 일부가 미제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쟁 입찰 참가자의 자격을 즉각적으로 박탈하는 것은 비례의 원칙에 어긋나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성립된 경쟁 자체를 무효화하는 행위 역시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낸 바 있다. 따라서 이번 성수4지구 조합의 유찰 선언은 과거 판례를 살피지 않은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 대형-중견사간 양극화 우려…합리적 기준 절실
깐깐한 지침이 공사비 인상을 억제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여의도 한양아파트(디에이치 여의도 퍼스트)의 경우 입찰 당시 치열한 수주전을 거쳤으나, 이후 층수 상향과 고급화 설계 변경이 이뤄지면서 도급공사비가 7740억원에서 8947억원으로 1년여 만에 1206억원 급증했다.
업계에서는 입찰 문턱이 높아지면서 자금력이 부족한 중견 건설사들이 설자리를 잃고 시장이 '초양극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수십억원대의 설계비와 행정 비용을 선지출해야 하는데, 유찰 리스크까지 커지면서 중견사들이 수주를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형 건설사의 독식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지난해 10대 건설사의 도시정비사업 누적 수주액은 48조6655억원으로 전년 대비 약 75% 급증했다. 반면 중견사들은 입찰 포기로 내몰리며, 조합이 스스로 선택지를 좁혀 시공사 우위의 시장을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또다른 정비업계 관계자는 "조합이 리스크 방지를 위해 입찰 지침을 고도화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지나친 진입 장벽은 유찰 반복과 사업 지연, 금융비용 증가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며 "처벌 위주의 지침보다는 합리적인 물가 연동 산식 마련 등 실질적인 공사비 검증 체계를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dosong@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