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백성욱 장관이 25일 새벽 북한 남침 보고를 받고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 경찰과 내무부는 치안·경비 강화, 특별범죄 단속에 나섰다.
- 서울 시민 소개계획은 없었고 정부는 26일 밤 수원으로 이동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서울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동이 트기 전의 희뿌연 어둠이 지붕과 골목을 덮고 있었다. 시민들은 몇 시간 뒤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 전쟁이 닥치리라고는 알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내무부 청사만은 달랐다.
새벽 05:00경, 당직실의 전화벨이 다급하게 울렸다. "치안국장입니다. 장관님께 긴급 보고드리겠습니다." 잠시 뒤 백성욱 내무부 장관은 장석윤 치안국장으로부터 북한의 남침 보고를 받았다.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개시했습니다. 38도선 일대의 경찰지서와 경찰초소가 유린되고 있습니다." 보고는 짧았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사태는 결코 작지 않았다.
국지적인 충돌이 아니었다. 북한군이 38도선 전역에서 전면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백성욱 장관은 곧바로 지시하였다. "즉시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하달하시오." 전화선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서울에서 내려간 명령은 치안국을 거쳐 전국 경찰 조직으로 퍼져 나갔다.

오전 06:30,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이 하달되었다. 각 경찰서는 비상 소집에 들어갔다. 경찰관들은 평시 근무를 멈추고 무장을 갖추었다. 총기를 지급하고 탄약을 확인하는 손길이 분주했다. 경찰은 국군과 협조하여 질서 있는 작전을 수행하고, 후방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전투태세에 돌입하였다.
이날 경찰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순한 치안 유지가 아니었다. 후방이 흔들리면 전선도 버틸 수 없었다. 국가기관과 산업시설을 지키고,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막는 일도 또 하나의 전선이었다.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인 「비상사태하의 특별범죄에 관한 특별조치령」도 시행되었다. 내무부는 이에 따라 특별범죄자를 집중 단속하도록 하였다. 전쟁의 혼란을 틈탄 약탈과 방화, 유언비어 유포와 사회질서 교란 행위는 평상시와 다른 기준으로 엄중히 다루어야 했다.
전쟁은 총성과 포성만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전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내무부는 시민들의 동요를 막고 불순분자들의 만행을 방지하는 일이 전선의 작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적기의 공습이 언제 시작될지도 알 수 없었다.
곧이어 치안명령 제26호가 각 시·도에 긴급히 시달되었다. 통행금지 시간을 연장하라. 등화관제를 실시하라. 주요 기관과 산업시설의 경비를 강화하라. 각 경찰서는 곧바로 명령을 시행하였다. 발전소와 철도, 통신시설, 관공서와 주요 산업시설에는 경찰 병력이 증강 배치되었다. 밤이 되면 도시의 불빛은 하나둘 꺼졌고, 어두운 거리에는 순찰하는 경찰의 발소리와 통행금지를 알리는 호각 소리만 남게 되었다.
그 시각에도 북쪽의 포성은 조금씩 서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 대부분은 전쟁의 실상을 아직 알지 못했다. 라디오를 듣지 않은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을 맞았다. 누군가는 출근 준비를 했고, 아이들은 학교 갈 채비를 했다. 시장 상인들은 좌판을 펼치고 하루 장사를 준비하였다.
시민의 하루는 계속되고 있었으나, 국가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에게 평범한 아침은 이미 끝나 있었다. 오전이 되자 남침 소식이 서울 시내로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38도선에서 충돌이 일어났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말은 구체적으로 변했다.
북한군이 내려오고 있다. 의정부가 위험하다고 한다. 서울도 전쟁터가 되는 것 아니냐. 누가 처음 말을 꺼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불안은 사람의 입에서 사람의 귀로 옮겨 다녔다. 그것은 포성보다 소리가 작았으나, 골목을 파고드는 속도는 더 빨랐다.
시장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쌀가게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고, 소금과 식용유, 성냥 같은 생활필수품이 진열대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는 쌀 한 말을 더 사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고, 상인은 언제 다시 물건이 들어올지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아직 서울 한복판에 이르지 않았지만, 시민들의 생활은 벌써 흔들리고 있었다. 6월 26일이 되자 생필품 품귀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앞다투어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사들였고, 일부 상인들은 물건을 감추거나 값을 올렸다. 매점매석 행위가 증가하면서 백미 가격도 급격히 뛰었다.
내무부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전 국민에게 냉정한 판단과 반성을 촉구하는 한편, 백미 소두 한 말을 2,600원 이상 받는 자는 구금하고 매점매석자는 극형에 처하겠다고 경고하였다. 관계기관은 집중 단속에 나서 생필품의 원활한 유통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민심은 명령만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무엇보다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서울시민의 소개계획이 사전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수도 서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은 있었으나, 145만여 명의 시민을 어디로, 어떤 방법으로 대피시킬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 비상 국무회의에서조차 시민 철수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훗날 백성욱 내무부 장관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6월 25일 아침에 장석윤 치안국장으로부터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38도선 일대의 지서와 경찰초소가 유린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비상경계령을 하달하여 군과 협조해서 질서 있는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전선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고 피난민이 증가하여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6월 26일 아침에 대통령께서 치안국에 들러 경찰 계통으로 들어온 전선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가셨다."
전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6월 26일 14:00, 의정부가 적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내무부에 도착하였다. 경찰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와 탄약 등 상당수 보급품을 한강 이남으로 미리 후송하고 있다는 보고도 함께 올라왔다.
백성욱 장관은 곧바로 지시하였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 곧 되돌아오도록 하라." 그는 훗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아직까지도 전방에서는 국군과 경찰이 북한군과 계속 싸우고 있었고, 수도 서울을 사수하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니만큼 싸우지도 않고 보급품을 후송한다는 것이 그때 형편으로 보아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도 사수는 정부의 방침이었다. 전방에서는 국군과 경찰이 북한군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기와 탄약을 먼저 남쪽으로 옮기는 것은 전투 의지를 스스로 꺾는 일로 보였다.
그러나 전황은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선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북쪽에서 밀려드는 피난민은 늘어났고, 그 모습을 본 서울 시민들의 심리적 동요도 커졌다. 거리에는 보퉁이를 등에 지고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남쪽으로 향하는 가족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도 불안했고, 남아 있는 사람도 불안했다. 그럼에도 많은 시민은 정부가 수도 서울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수도 사수라는 말과 북쪽에서 밀려오는 피난민 행렬이 같은 거리 위에 놓여 있었다. 믿음과 현실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6월 26일 심야, 비상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수도 서울을 사수할 것인가, 정부를 이동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마침내 정부는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도 서울 시민들의 철수 문제는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정부의 이동은 결정되었다. 시민들의 길은 정해지지 않았다.
전쟁 이전인 1950년 2월 25일, 서울시는 직제를 개칭하여 내무국·재무국·교육국·산업국·건설국·사회국·경찰국 등7개 국을 두고 있었다. 산하에는 중구·종로구·동대문구·성북구·성동구·서대문구·마포구·용산구·영등포구 등 9개 구청이 있었다.
서울에는 145만여 명의 시민이 31만 9,000여 세대를 이루어 살고 있었고, 주택은 19만 1,200여 동에 이르렀다. 거대한 수도 행정조직이 있었지만, 전쟁은 그 조직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방향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식량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의 품귀 현상이 시민 생활을 위협하자 서울시는 농림부·상공부·교통부와 협력하여 정부 보관미를 긴급히 방출하도록 하였다. 생필품 조달을 촉진하고, 이들 물자 수송에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관계 직원들은 각 시장에 파견되어 유통질서와 가격통제를 위한 행정지도를 담당하였다.
직원들은 시장을 돌며 쌀값을 살피고 물자의 유통 상태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행정지도의 손길이 닿는 곳보다 불안이 퍼지는 속도가 빨랐다. 사람들은 쌀 한 되와 소금 한 봉지가 언제 생명줄이 될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후방치안의 확보가 긴요하였다. 검찰도 전 수사력을 여기에 집중하였다. 반민족적이고 비인도적인 범죄를 단속하여 거족적인 임전 태세를 확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6월 26일 09:00부터 일반 공판이 무기 연기되자, 시민 생활을 위협하는 양곡 매점매석 행위와 가격 폭등에 대한 단속도 강화되었다. 검사와 수사관들은 시장과 양곡 거래처를 살피며 폭리를 취하거나 물건을 감추는 행위를 조사하였다. 후방의 경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범죄 역시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 행위로 보았다.
검찰이 특히 예의주시한 조직은 보도연맹이었다. 정보담당 검사진은 오제도 부장검사의 지휘 아래 보도연맹 지도에 나섰다. 전쟁의 혼란을 틈탄 일탈이나 재전향을 막고, 도리어 보도연맹원들이 반공활동에 앞장서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제도 부장검사는 정보담당 검사들에게 조직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도록 하였다. 보도연맹원들이 흔들리거나 조직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고, 반공계몽의 선봉에 서도록 지도해야 했다.
보도연맹은 여순10·19사건을 계기로 1949년 1월 19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봉쇄하는 과정에서 조직되었다. 신원이 노정되었거나 자의로 전향한 사람 가운데 전과가 가볍고 개전의 정이 뚜렷한 사람들을 선도하여 사회에 적응하도록 보장하기 위한 단체였다.
조직은 시·도 단위로 지부를 두고 구·군 단위로 분회를 편성하였다. 각 지방검찰청의 정보담당 검사가 지도를 맡았고, 중앙본부는 서울에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그 조직의 의미도 무거워졌다.
검찰청에서는 각 지검에 긴급 지시하여 보도연맹 조직을 점검하고 반공계몽 활동의 선봉에 서게 하였으며, 조직 이탈을 예방하도록 하였다.
한편 의무실에는 비상구호반이 설치되었다. 이주영 검사의 지휘 아래 피난민 가운데 부상자와 병약자를 진료하였다. 다친 사람과 병든 사람들은 전황과 관계없이 몰려들었다. 치료할 손은 부족했고, 누울 자리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도 의료진은 멈출 수 없었다.
검찰은 후방질서를 붙들기 위해 움직였고, 보련 의무실은 사람의 목숨을 붙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전황이 급박해지고 서울 철수가 강요되면서 검찰의 노력도 한계에 이르렀다.
더욱이 서울을 비롯한 경인지구 형무소에 수감 중인 국가보안사범과 기타 죄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강구되지 않았다. 철수해야 할 기관은 늘어났고, 남겨진 문제도 함께 늘어났다. 사법부 역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켜설 수 없었다.

6월 25일, 대법관을 비롯한 사무직원들은 라디오 방송과 신문, 벽보를 통하여 북한군의 전면 남침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정확한 전황도, 정부의 대응 방향도 알기 어려웠다. 그날 사법부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하루를 보냈다.
법원 복도에는 평소와 같이 직원들의 발걸음이 오갔고 사무실에는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귀는 라디오를 향해 있었다. 새로운 전황이 전해질 때마다 복도와 사무실에 잠깐씩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부 사무직원들은 전황을 궁금히 여겨 개별적으로 청사에 나왔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진 숙직하며 자체 경비를 담당하였다. 법원의 불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26일 09:00, 대법원은 대법관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전날 대통령이 발표한 긴급명령 제1호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각급 법원의 일반 민·형사 재판을 이날 09:00를 기하여 무기 연기하고, 긴급명령에 따른 특별범죄 재판에 만전을 기하도록 결의하였다. 결의 내용은 곧바로 각급 법원에 긴급히 시달되었다.
법정의 문이 하나둘 닫혔다. 재판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돌아서야 했다. 평시의 사법 기능은 멈추고, 전시의 특별범죄 재판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사법부는 전황의 추이를 알 길이 없었다.
대법원은 노용호 행정처장으로 하여금 총무처장 전규홍과 연락을 유지하게 하였다. 전황과 행정부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사법부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정보는 부족했다. 행정부가 어디로 움직이는가가 사법부의 행로를 결정하게 되었다.
6월 27일 아침, 행정부의 수원 이동이 통보되었다. 대법원장 김병노는 수일 전에 다리 수술을 받아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5명의 대법관 전원과 함께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향하였다.
당시 사법부는 수원 이동을 잠정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정부 요인들만의 일시적인 대피이며, 전황이 안정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판단은 사법부의 철수를 더욱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대법원을 비롯한 각급 법원에 조직적인 철수 지시는 내려지지 않았다. 재판기록과 호적원부, 부동산 등기부 등 주요 문서에 대한 긴급조치도 강구되지 않았다.
국가의 법질서를 뒷받침하던 기록들이 서울에 그대로 남았다. 일부 법관과 사무직원들은 일반 시민들과 같이 개별적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누구는 가족을 데리고 한강을 건넜고, 누구는 손에 들 수 있는 짐만 챙긴 채 남쪽으로 향하였다. 법관도 사무직원도 그 순간에는 피난민과 다르지 않았다.
6월 27일 15:00를 전후하여 대법원 일행은 서울지방법원 수원지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수원도 머물 곳은 아니었다. 행정부의 각료들과 대통령이 대전에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법원 일행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대전에 도착한 사법부는 6월 28일부터 대전지방법원에 사법부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였다. 대법원장을 비롯한 요인들은 지방 법원장 관사에 여장을 풀었다.
개별적으로 남하한 직원들도 하나둘 합류하였다. 그 수는 13명이었다. 그야말로 명목상의 이전이었다. 조직이라고 하기에는 인원이 너무 적었다. 법관과 직원은 흩어졌고, 기록은 서울에 남아 있었다. 재판은 멈추었으며 사법행정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었다.
대법원의 간판은 남쪽으로 옮겨졌으나, 사법부의 몸체는 전쟁 속에 흩어졌다. 그것은 조직적인 이전이라기보다 전황에 떠밀린 피난에 가까웠다.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내무부와 경찰은 비상경계령과 치안 명령으로 후방을 붙들려 하였다. 서울시는 식량과 생필품을 확보하려 했고, 검찰은 범죄와 매점매석을 단속하며 보도연맹 조직을 관리하였다. 사법부는 재판을 중단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각 기관은 저마다 맡은 자리에서 국가의 기능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전쟁은 모든 것을 앞질러 가고 있었다. 명령은 내려졌으나 시민들의 피난계획은 없었다. 수도 사수를 외쳤으나 정부는 수원으로 이동하였다. 사법부는 남하했으나 기록과 조직은 서울에 남았다. 서울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의 기둥들은 이미 하나씩 제자리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