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 남침했고 정부는 비상조치를 내렸다.
- 서울로 피난민이 몰리며 교통과 치안이 마비되고 혼란이 커졌다.
- 정부와 학생·의료진은 수용·치료·구호에 나서며 혼란을 수습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38도선 전역에서 포성이 터졌다.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축선, 동두천·포천 축선, 춘천 축선, 주문진 축선에 이르기까지 북한군의 지상 공격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는 육전대와 유격대가 상륙하고 있었다.
전쟁은 어느 한 곳에서 번진 불길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허리를 따라 길게 쌓여 있던 화약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정부가 당면한 과제는 무거웠다. 전방에서는 적의 돌파를 저지해야 했다. 후방에서는 민심의 동요를 막아야 했다. 그리고 북쪽에서 서울로 밀려드는 피난민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도 시급하였다.
전선과 후방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민심이 무너지면 후방의 질서가 흔들리고, 후방이 흔들리면 전선도 버텨내기 어려웠다.
대통령은 6월 25일 긴급명령 제1호인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단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하달하였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각종 범죄를 자행할 경우 사형에서 20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치안을 안정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며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한 엄중한 조치였다.

이날 05:00, 내무부 장관은 치안국장으로부터 북한군의 남침 보고를 받았다. 보고는 짧았으나 사태는 컸다.
06:30,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이 하달되었다. 경찰은 평시의 임무를 멈추고 전투태세에 돌입하였다. 각 경찰서에서는 인원을 소집하고 무기와 탄약을 점검하였다. 국군과 협조하여 후방의 질서를 지키고 국가 기능을 보호해야 했다.
아울러 시민들의 동요와 불순분자들의 만행을 방지하고 적기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하여 치안명령 제26호가 각 시·도에 긴급히 시달되었다. 통행금지 시간을 연장하라. 등화관제를 실시하라. 주요 기관과 산업시설의 경비를 강화하라.
명령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철도와 발전소, 통신시설, 관공서와 산업시설에는 경비가 강화되었다. 밤이 되면 도시의 불빛은 하나씩 꺼질 것이었다. 어둠은 적기의 표적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의 불안까지 감추지는 못하였다.
정부는 6월 28일 긴급명령 제2호인 「금융기관 예금 등 지불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발령하였다. 전쟁의 불안으로 예금 인출사태가 일어나 경제적 혼란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전쟁은 전선의 병력만 흔드는 것이 아니었다. 시장의 쌀값과 은행의 예금, 사람들의 생계와 마음까지 함께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가장 먼저 마주한 현실은 북쪽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이었다. 전쟁 당일부터 38도선 접경지대의 주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몇 사람씩 보이던 행렬이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이 되고,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대열이 되었다. 부상자를 업은 사람도 있었고, 병약한 노인을 부축한 가족도 있었다. 어린아이의 손을 붙든 어머니와 이불 보따리를 등에 멘 노인들이 말없이 길을 걸었다.
그들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포성이 들리는 북쪽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정부는 피난민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심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서울 철수에 따른 대책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국군은 사전에 서울 철수의 필요성을 예견하지 못하였다. 철수 계획도 수립하지 못하였다. 서울 시민과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을 체계적으로 통제하며 남쪽으로 이동시키기에는 준비도 시간도 부족하였다.
서울과 수원을 잇는 국도에서도 군경은 피난민의 이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길마다 사람과 수레, 자동차와 군 수송차량이 뒤엉켰다. 전방으로 올라가야 할 차량은 남쪽으로 내려오는 피난민 행렬에 막혔고, 피난민들은 군용차량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도로상의 군 수송작전이 방해를 받았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한강은 적의 전면 남침 시 자연 장애물로서 양호한 지연진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 언급되었을 뿐이었다. 대규모 병력과 수십만 피난민을 함께 철수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는 없었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상황의 악화는 군 병력과 피난민의 신속한 철수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적시에 한강을 도하하는 일도 어려워졌다. 군은 싸우며 물러나야 했고, 주민은 살기 위해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용할 길은 하나였다. 적의 압력이 서울 가까이 다가오자 도시는 차츰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다. 서울 이북 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로 시내는 더욱 혼잡해졌다.
38도선 접경지대 주민들은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공격준비사격을 개시하자 포격 소리에 놀라 황급히 집을 나섰다. 어느 집은 밥솥에 쌀을 안친 채 떠났고, 어느 집은 대문도 닫지 못하였다. 아이를 깨워 업고, 손에 잡히는 것만 챙겨 길로 나왔다.
지역에 따라 피난 상황은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빛은 다르지 않았다. 경기도 장단서장 홍은식 경감은 당시38도선 접경지 주민들의 피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6월 25일 10:00쯤 벌써 고랑포 지서를 비롯한 모든 지서와의 연락이 끊어졌고, 피난민이 열을 지어 내려왔다."
지서와 초소의 연락은 하나씩 끊어졌다. 연락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곧 사람들이 내려왔다. 전선의 붕괴는 보고서보다 먼저 피난민의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고려대학교 조지훈 교수는 서울 거리에서 그 불길한 징조를 보았다.
"라디오에서는 전황이 좋다고 하지만, 기분 나쁜 것은 분명히 동두천이나 의정부 쪽에서 오는 피난민 대열을 보았기 때문이다."
라디오에서는 전황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두천과 의정부 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방송의 목소리와 거리의 현실 사이에는 이미 깊은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진오 박사도 당시의 청량리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바깥 큰길에 피난민들이 들어왔다. 청량리 거리는 피난민들로 떠들썩하였다."
개전 당일부터 서울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로 시내는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청량리와 동대문 일대에는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먼지와 땀에 젖은 얼굴, 울음을 참지 못하는 아이, 가족을 잃고 두리번거리는 노인들이 거리마다 늘어났다. 평소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서울의 길은 이제 피난과 전쟁의 길로 바뀌고 있었다.
서울 이북의 주민들이 맨몸으로 피난길에 오르자 경기도지사는 관할 각 군에 지시하여 급식과 치료대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피난민 대열은 끊어지지 않았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계속 서울로 쇄도하였다.
경기도지사는 보건부 장관과 서울시장을 찾아 이들의 수용과 치료 대책을 긴급히 강구하도록 건의하였다. 먹을 것을 주어야 했다. 다친 사람을 치료해야 했다. 밤을 지낼 곳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은 계속 늘어났다.
보건부는 서울 시내의 모든 개업의와 간호원에게 비상대기명령을 하달하였다. 병원마다 의료진이 호출되었고, 환자를 수용할 공간이 마련되었다. 동두천과 의정부 방면에서 내려온 피난민 환자들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과 서울시립병원 등에 수용하여 치료하도록 하였다. 개성 방면에서 온 환자들은 세브란스병원과 철도병원으로 보냈다. 옹진반도에서 온 환자들은 인천도립병원에 수용하였다.
피난민의 길을 따라 부상과 질병도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임시 방역반도 편성되었다. 많은 사람이 좁은 장소에 모이면 전염병이 번질 위험이 컸다. 전쟁이 총칼로 사람을 죽인다면, 전염병과 굶주림은 그 뒤를 따라 조용히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방역반은 피난민이 모인 곳을 찾아다니며 전염병 예방활동을 전개하였다. 사회부도 서울시에 긴급히 지시하였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비롯하여 돈암초등학교, 무학초등학교 등 시내6개소에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였다.
학교 교실에는 책상과 걸상 대신 침구가 놓였다. 아이들이 공부하던 자리에는 지친 피난민들이 몸을 누였다. 운동장에는 보퉁이와 수레가 늘어섰다. 급식이 마련되고 식사가 제공되었으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기에는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붕 아래 몸을 누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한숨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전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피난민 대열은 서울에 머물지 못하고 다시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사회부는 내무부와 협조하여 각 시·도에 피난민 수용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충북 37개소. 충남 55개소. 전북 43개소. 전남162개소. 경북 66개소. 경남 117개소. 제주 24개소. 합계 504개소의 피난민 수용소가 마련되었다. 숫자로는 504개소였으나, 그곳마다 떠나온 고향이 있었고 헤어진 가족이 있었으며 돌아갈 날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황의 악화로 피난민이 계속 남하하기 시작하자 보건부는 각 시·도에 긴급 지시를 내렸다. 공공의료기관을 개방하고 개업의와 간호원으로 의료방역반을 편성하여 피난민에 대한 진료와 방역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200개의 의료방역반이 활동하였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낯선 학교와 관공서, 임시 수용소를 돌며 환자를 살폈다. 부상자에게 붕대를 감고,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진료하고, 탈진한 노인에게 약과 물을 건넸다. 전쟁은 모든 것을 부족하게 만들었다. 약도 부족했고, 침상도 부족했으며, 사람의 손도 부족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6월 28일 아침까지 38도선 접경지에서 수도 서울에 이르는 길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황의 도가니였다. 서울 이북지역 주민에 대한 소개계획 없이 시작된 피난 행렬은 통제할 수 없는 무질서를 초래하였다. 피난민들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남쪽으로 향하였다.
자동차에 올라탄 사람도 있었고, 우마차와 손수레를 끄는 사람도 있었다. 자전거에 짐을 매단 사람, 지게에 아이를 업은 사람, 보따리를 머리에 인 사람도 있었다. 그마저 없는 사람은 맨몸으로 걸었다.
주민들은 탈출로를 찾아 아우성쳤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강을 건널 수 있는가. 기차는 떠나는가. 가족은 어디에 있는가. 누구도 분명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였다.
모든 거리는 사람들로 메워졌다. 모든 도로는 피난민과 전방부대에 보급할 탄약 및 보급품 추진차량이 뒤섞여 혼잡하였다. 남쪽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북쪽 전선으로 올라가야 할 차량이 한길에서 맞부딪쳤다.
예기치 못한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모든 도로를 점하게 되자 병력과 보급품을 가득 실은 수송차량은 움직이지 못하였다. 운전병은 경적을 울렸지만 사람들은 비켜설 곳이 없었다. 군경이 길을 터보려 했으나 피난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던 병력도 적시에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였다. 병사는 북쪽으로 가야 했고, 피난민은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다. 서로가 서로의 길을 막고 있었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살아야 했고, 모두가 급했다. 그러나 그 혼란은 방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전선의 어려움만 가중시켰다. 전쟁은 사람을 한 방향으로만 몰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피난길에 올랐고, 어떤 사람은 전선을 향해 갔다.
많은 학생들이 자원하여 피난민 구호를 담당하고 군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남침 당일 각급 학교 교정에는 학도호국단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북한군의 남침을 규탄하고 김일성도당 타도 궐기대회를 열었다.
교정에는 구호가 울렸다. 학생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가족을 북쪽에 두고 왔고, 누군가는 형이나 아버지가 군에 나가 있었다. 전쟁이 무엇인지 온전히 알기에는 어린 나이였으나, 나라가 위태롭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마침내 학도결사대가 조직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혈서까지 써가며 자원입대를 하였다. 손가락을 깨물어 쓴 글씨에는 전쟁을 막아내겠다는 젊은 혈기가 배어 있었다. 의과대학생들은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총을 들 수 없다면 부상자를 치료하겠다는 것이었다. 여학생들도 적십자 완장을 두르고 간호에 나섰다. 교실과 강의실에 있어야 할 학생들이 병원과 피난민 수용소, 군부대와 방어선으로 흩어졌다.
1950년 6월 26일, 학생대표들은 국방부 정훈국을 찾았다. 그들은 학도결사대의 참전을 간청하였다.
"우리도 싸우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군은 만류하였다. 훈련도 받지 못한 학생들을 전선에 내보낼 수는 없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학도위문대를 조직하였다.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음식과 위문품을 마련하고 창동-미아리선으로 향하였다. 학생들은 장병들을 위문하였다. 진지 구축을 돕고 탄약을 운반하였다. 삽을 들고 흙을 팠으며, 탄약상자를 둘러메고 뛰었다. 전선 가까이에서 들리는 포성에 놀라기도 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서울이 적 수중에 들어갔을 때도 그들의 활동은 끝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부상병을 찾아 지하에 숨겨주었다. 적의 눈을 피해 음식과 약을 날랐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장병에게는 민간인 옷을 구해 갈아입히고 남하를 도왔다. 군복을 벗은 장병은 피난민 속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또 다른 부상병을 찾아야 했고, 또 다른 장병을 숨겨야 했다.
국가는 미처 모든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였다. 철수계획은 없었고, 도로는 막혔으며, 피난민은 끝없이 남쪽으로 밀렸다. 병력과 보급품은 제때 움직이지 못했고, 수많은 시민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길 위에 섰다.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붙들었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였고, 간호원은 부상자를 돌보았다. 학교는 수용소가 되었으며, 학생은 군인을 돕고 피난민을 구하였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내려왔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피난길에 올랐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너지는 것을 떠받치기 위해 제자리에 남았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