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제 15대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영욕의 85년에 마침표를 찍었다.
청와대 전 비서실장을 지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이날 2시40분 연세대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43분 서거하셨다"며 "부인 이희호 여사와 김홍일 홍업 홍걸 3형제와 며느리 등 가족과 측근들이 임종을 했다"고 발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다.
박창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장은 “김 전 대통령은 폐렴으로 입원했지만 다발성 장기부정으로 인한 심장정지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심폐소생술은 김 전대통령이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실행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부와 김 전대통령 가족은 장례형식과 절차를 협의해 처리하기로 논의를 착수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큰 정치지도자를 잃었다"며 "김 전 대통령의 생전의 뜻이 남북화해와 국민통합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여야 정치권도 심심한 애도를 표시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민주화의 상징이자, 한민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며 세계속의 인권과 평화의 명사가 된 ‘김대중’이라는 이름의 뒤에는 그의 별명처럼 '인동초'(忍冬草)같은 고난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그는 전남 신안의 외딴섬인 하의도에서 1924년 가난한 소작농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적 꿈도 사업가였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스무살이던 1944년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다.
친구 여동생인 첫 아내 차용해를 만나 홍일 홍업 두 아들도 낳았다.
하지만 그는 6•25전쟁 때 서울을 지킨다며 홀로 대전에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방송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직후 부쩍 '바른 정치'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그가 55년 정치 역정의 첫 발을 내디딘 건 서른 살이던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다.
그러나 세 번 연속 고배를 마셨고 1961년이 돼서야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했다.
첫 아내와 사별했던 그는 이듬해 1962년 이희호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그가 정치적으로 이름을 각인시킨 건 1970년 봄이었다.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어 분전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이듬해인 1972년 유신 사태를 맞이한 그는 신변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한 뒤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이다 1973년 '현해탄 납치 사건'을 당했고,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구해 강제 귀국된다.
이후 가택 연금과 징역살이를 반복하던 그는 1979년 10•26 쿠데타로 7년 만에 복권된다.
그러나 1980년 광주를 피로 진압한 신군부 세력이 '내란 음모'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그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며 죽음 직전까지 간다.
그에 대한 구명 운동이 전개됐고, 덕분에 그는 형 집행 정지를 받은 뒤 1982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귀국한 그는 최초의 '여소야대' 돌풍을 일으킨 뒤,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의장을 맡아 1887년 6•10 항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김영삼과 후보 단일화 실패와 3당 합당에 번번히 막히며 대권을 얻는데 실패했다.
결국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1997년 대선에서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으며 대통령에 올랐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정보화사회를 구현했으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가정보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청와대 전 비서실장을 지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이날 2시40분 연세대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43분 서거하셨다"며 "부인 이희호 여사와 김홍일 홍업 홍걸 3형제와 며느리 등 가족과 측근들이 임종을 했다"고 발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다.
박창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장은 “김 전 대통령은 폐렴으로 입원했지만 다발성 장기부정으로 인한 심장정지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심폐소생술은 김 전대통령이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실행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부와 김 전대통령 가족은 장례형식과 절차를 협의해 처리하기로 논의를 착수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큰 정치지도자를 잃었다"며 "김 전 대통령의 생전의 뜻이 남북화해와 국민통합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여야 정치권도 심심한 애도를 표시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민주화의 상징이자, 한민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며 세계속의 인권과 평화의 명사가 된 ‘김대중’이라는 이름의 뒤에는 그의 별명처럼 '인동초'(忍冬草)같은 고난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그는 전남 신안의 외딴섬인 하의도에서 1924년 가난한 소작농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적 꿈도 사업가였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스무살이던 1944년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다.
친구 여동생인 첫 아내 차용해를 만나 홍일 홍업 두 아들도 낳았다.
하지만 그는 6•25전쟁 때 서울을 지킨다며 홀로 대전에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방송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직후 부쩍 '바른 정치'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그가 55년 정치 역정의 첫 발을 내디딘 건 서른 살이던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다.
그러나 세 번 연속 고배를 마셨고 1961년이 돼서야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했다.
첫 아내와 사별했던 그는 이듬해 1962년 이희호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그가 정치적으로 이름을 각인시킨 건 1970년 봄이었다.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어 분전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이듬해인 1972년 유신 사태를 맞이한 그는 신변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한 뒤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이다 1973년 '현해탄 납치 사건'을 당했고,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구해 강제 귀국된다.
이후 가택 연금과 징역살이를 반복하던 그는 1979년 10•26 쿠데타로 7년 만에 복권된다.
그러나 1980년 광주를 피로 진압한 신군부 세력이 '내란 음모'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그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며 죽음 직전까지 간다.
그에 대한 구명 운동이 전개됐고, 덕분에 그는 형 집행 정지를 받은 뒤 1982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귀국한 그는 최초의 '여소야대' 돌풍을 일으킨 뒤,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의장을 맡아 1887년 6•10 항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김영삼과 후보 단일화 실패와 3당 합당에 번번히 막히며 대권을 얻는데 실패했다.
결국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1997년 대선에서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으며 대통령에 올랐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정보화사회를 구현했으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가정보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