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이형석 기자] 배우 박해일(37)이 이렇게 여유 넘치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어떤 사람인지 이미 수차례 들어왔음에도 막상 그가 의도한 정적에 몇 번 휩싸이고 나니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답답함과 당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땀난다”는 말을 뱉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랑곳없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느릿느릿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터뷰 내내 그는 그렇게, 질문을 듣고 잠깐 허공을 응시하고 고개를 살짝 떨군 후 다시 상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난히 반짝이는 눈으로 지긋이 상대를 응시하면서 낮지만 맑은 목소리로 “아, 네.” 이따금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농을 건네며 상대를 긴장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느새 그의 속도에 맞춰 이야기가 오갈 때쯤,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설경구도 빠져버린) 그만의 매력을 알 듯했다.
박해일이 영화 ‘경주’, ‘제보자’에 이어 또 한 번 신작을 선보였다. 오는 30일 개봉하는 영화 ‘나의 독재자’는 대한민국 한복판, 자신을 김일성이라 굳게 믿는 남자 김성근와 그런 아버지로 인해 인생이 꼬여버린 아들 태식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는 첫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의 대역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 22년간 숨겨온 위대한 비밀을 파헤친다.
극중 박해일이 열연한 이는 독재자가 된 아버지와 살게 된 아들 태식. 언젠가 사석에서 함께 작품을 하기로 약속한 이해준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박해일의 자리를 따로 준비해뒀다. 태식 역에 박해일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쓴 셈이다. 그래서인지 박해일과 태식은 완벽한 하나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냈다.
“어느 정도 예상했죠. 감독님과 오랫동안 만남의 자리를 가지면서 이야기를 해왔거든요. 물론 그때는 시나리오 작가로요. 그래서 대사의 맛이라던가, 인물이 가지고 있는 상황 설정 등에 대해 생각해보신 지점이 있지 않았나 해요. 저 역시 태식을 연기하면서 낯설거나 크게 무리는 없었고요. 또 아무래도 나잇대가 비슷하다 보니 많은 정서가 공유됐고, 아들의 입장에서 같이 아버지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죠. 확실히 서로를 아니까 현장에서 열 마디 할 거 다섯 마디로 충분히 대화할 수 있더라고요.”
아버지에 대한 아픈 추억을 지닌 철없던 못난 아들은 아버지의 진심을 알고 자신 역시 진짜 아빠가 될 준비를 마친다. 실제로도 아들이자 아버지인 그에게 양쪽 입장 모두 공감이 됐겠다고 하자 “한 가지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아들 태식의 입장에서 아버지 성근을 바라보는 느낌이 있고 전 그렇게 연기해야 했죠. 하지만 관객으로 영화의 결과물을 봤을 때는 또 아버지 박해일이란 사람을 생각하게 돼요. 상호보완적인 셈이죠. 그래서 젊은 관객부터 다양하게 영화를 바라볼 수 있지 않나 싶고요.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우리 아버지들이 성근을 보면서 어떤 점을 느끼실지 궁금하기도 해요. 아마 위안을 받기도 하고 자신을 떠올리기도 하겠죠. 또 시대의 공기도 포함돼있으니 그때를 돌이켜 보시기도 하시겠죠. 그런 의미에서 좀 진폭이 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의 말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은 분명,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들을 생각할 거다. 그리고 거기에는 설경구와 박해일의 폭발하는 연기 시너지가 큰 몫을 했다. 두 사람은 아홉 살이라는 나이 차를 극복하고 완벽한 부자호흡을 펼치며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촬영장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냥 나온 연기는 아니었나 보다. 실제 두 사람은 선후배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로 지난 시간을 보냈다.
“이미 둘 사이가 아버지와 아들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사적인 이야기보다 말없이 서로 눈빛 교환이 자주 이뤄졌는데 확실히 진하게 느껴졌죠. 애초에 현장 들어가기 전부터 일부러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막상 하면 어색할까 봐. 근데 아직도 무의식중에 툭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아직 그 여운이 남아있는 모양이에요. 선배는 ‘그러면 다시 분장해야 할 것 같다’며 굉장히 당황스러워 하더라고요. 뭐 언젠가는 안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언제 설경구 선배가 제 나이 배우에게 아버지 호칭을 들어보겠습니까?(웃음)”
박해일은 진짜 아들처럼 귀여운 너스레를 떨면서도 이내 “선배를 떠나서 동료로서 안쓰러웠다”며 설경구의 분장 투혼에 박수를 보냈다. 영화 ‘은교’(2012)를 통해 경험해봤기에 진심으로 그를 응원했다. 물론, 이런 마음은 설경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박해일이 아니면 못했다”, “요즘 박해일 매력에 빠졌다”는 등 박해일 칭찬에 침이 마르던 설경구였다. 앞서 설경구와의 인터뷰에서 들은 이런저런 칭찬을 전해주며 “시나리오랑 콘티를 성경책처럼 품고 다녔다더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쑥스러운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배우의 열정이란 말인데 식지도 않느냐는 장난스러운 질문에는 멋쩍게 웃었다.
“원래 공부 못하는 애들이 줄긋고 항상 책 들고 있어요. 아니면 제가 건망증이 심한 건가?(웃음) 뭐, 마지막까지 더 찾아보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고요. 근데 윤여정 선생님도 끝까지 (시나리오를) 붙들고 계시는데 일개 저 같은 배우가 어떻게 그렇게 안 하겠어요. 물론 배우 개개인의 스타일이겠지만, 저는 끝까지 들고 있으면 더 찾게 되더라고요. 전 제가 계속 완벽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지점에서 구멍이 생기고 부족하다는 긴장감이 있는 거죠. 뭐, 선배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손이 심심해서 그럴 수도 있고, 일거양득이죠(웃음).”
너무 자기평가에 냉정한 거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대뜸 “당연하다. 적어도 이 일을 꾸준히 하려면 칭찬에 쓸려서 넘어가면 안 된다. 좋은 건 좋은 대로 부족한 건 부족한 대로 담아냈다가 새로운 작품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성근의 단 하나의 관객 태식은, 영원한 단 하나의 관객 자신을 위해 무던히 노력하겠노라 약속했다. 데뷔 14년차, 이렇게 자신을 쉼 없이 갈고 닦고 채찍질하는 박해일의 모습을 보며, “괜히 박해일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만일 제게 단 하나의 소중한 관객을 꼽으라면 저죠. 저부터 정리돼야 할듯해요. 정리한 만큼 수용할 수 있고, 수용해야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죠. 말이 안 되는 듯 되는 거 같죠?(웃음) 어쨌든 결국, 영화에서도 성근이 자신을 돌아보는 데 2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거고 거기에 갈고 닦은 독재자 캐릭터가 있는 거죠. 아들에게 당당하게 준비한 만큼을 보여줄 수 있는 세월과 노력이 있는 거로 생각해요. 자기 자신을 이겨낸 거고, 버텨낸 거죠. 아버지로서요.”
“성인 연극 데뷔작에서 첫 실수…돈 떼인 기분이었죠” 박해일은 1막(무명 배우 성근이 김일성 역에 캐스팅되는 과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1막 속 성근의 모습은 실제 그의 삶과 많이 닮았다. 특히 갑작스레 첫 무대에 오른 점, 그리고 첫 무대에서 잊지 못할 실수를 한 점은 꽤나 비슷하다. 아직도 시나리오를 끝까지 들고 다니며 연구하는 그에게 실수가 어울리기나 하는 단어인가. 완벽주의 박해일에게 무슨 실수냐는 말에 그는 “그 모순을 영화에서 잘 활용해야 한다”며 여유를 부렸다. 그러나 이내 털어놓는 신인 배우 박해일의 실수담은 그야말로 아찔했다. “실제 제 데뷔작이 성인 연극이에요. 아동극부터 시작했는데 연극을 처음 한 건 그때였죠. 당시 기존에 그 역할을 맡았던 선배 배우가 다른 일정으로 갑작스럽게 빠지게 됐어요. 정말 성근처럼 옆에서 청소하고 있다가 얼떨결에 무대에 오른 셈이죠. 대본 주고 며칠 안에 외워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게 제 첫 성인극 연기였어요. 성공적이었느냐고요? 어휴, 극 중간에 대사를 까먹어서 20분 통으로 넘어갔어요. 갑자기 20분 후부터 시작한 거죠. 상대방은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5초 정도 상대 배우가 뒤돌아서 한숨을 쉬더라고요. 그러더니 본인도 20분 후 텍스트를 한 거죠. 다행히 실수가 아닌 것처럼 리액션을 해줬어요. 그래서 20분 넘게 일찍 끝난 경험이 있죠. 관객도 진짜 많았는데(웃음), 모르시는 분은 그냥 넘어가고 내용을 아시는 관객은 실소를 머금기도 하셨어요. 근데 이건 정말 빙산의 일각이고 선배들 이야기 들어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많아요. 아마 모든 배우에게 그런 뼛속 깊이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이 하나쯤 있을 거예요. 처음으로 돈 떼인 기분이라고 할까?(웃음). 그만큼 잊지 못하는 거죠. 저 역시 정말 첫 크나큰 실수였어요. 그게 돌이켜 보면 웃을 수 있는 거지 막상 그 상황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니까요(웃음).” |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이형석 기자 (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