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전설(戰說)] 국회를 떠도는 '빨간 동그라미'의 공포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도전할 수 있을까"
[뉴스핌=이승제 선임기자] '여의도 전설(戰說)'은 정치권에서 격렬하게 오가는 말과 논쟁 속에 숨겨진 또다른 욕망, 본심일 수도 있는 속내를 뽑아내려는 시도입니다. 한국 정치권의 지나친 엄숙주의를 벗어나 자유롭게 유희하려 합니다. 틀을 깨는 탈주를 꿈꿉니다.
죽을 맛이다.
옆에 앉은 동료의원은 하루종일 울려대는 휴대폰 탓에 노이로제 걸리겠다고 투덜거린다. 바보 같이…, 그냥 꺼 두면 될 일을. 진작에 새 휴대폰 번호를 지역구 주요 인사에 알렸다. "절대 여기 사람들, 특히 기자들에게 알려선 안 된다"고 말해 뒀다. 특히 표창원을 조심해야 한다.
차기 총선까지 3년 5개월. 예전 같으면 여유 좀 부릴 때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한숨만 나온다. 짐을 싸야 하나. 간다면 어디로? 문득 김용태 의원이 부러워진다. 지역구 민심 챙기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그가 아니던가. 탈당 1호가 됐으니 도움이 될 수도. 그 사이 어디에서 둥지를 틀 것이다. 그가 더불어민주당에 간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지난 2일 오후 국회 앞에서 한 시민이 '탄핵' 문구가 쓰인 깃발을 흔들고 있다. <사진=김학선 사진기자> |
촛불을 단디 봤어야 했다. 200만이건 10만이건 1만이건, 그냥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였을 뿐이라 믿고 싶었다. 언제나처럼 정치공학상 '주요변수 1'이나 '주요변수 2' 정도가 돼야 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질서 있는 퇴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4월말 사퇴, 6월말 대선'이란 글귀에 솔깃해지다니. 이를 협상안으로 내놓은 김무성 전 대표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려야 할 것 같다. 유승민 의원이라면 달라질까.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장 두려운 소리다. 3년 5개월 뒤에 다시 끌어모을 수 있을까. 다시 도전할 수나 있을까.
친박 선배 의원은 "너희들이 우리보다야 한결 낫지 않냐"고 했다. 그 복잡할 속내를 생각하면, 불쌍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친박' 간판이 무너져 내리는데야 버틸 재간이 없을 테지. 그렇다고 지금 당장 박차고 나갈 방법도 없다. 어차피 시간 문제다. 입밖으로 내지 않을 뿐 모두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친박은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고 있다.
오는 9일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이 예고된 가운데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는 당론 없이 양심에 따른 자유투표를 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4일 새벽 내년도 예산 수정안에 대한 투표 결과가 전광판에 표시되고 있다. 반대표를 던진 의원의 이름 앞에 빨간 동그라미가 켜져 있다. <사진=국회 의사중계시스템 캡처> |
친박에서 탄핵에 대한 당론을 포기했다. 탄핵투표가 진행되면 양심에 따라 자유투표하기로 했단다. 드디어 버리는가. 탄핵투표는 무기명으로 진행되지만, 의원들의 찬반 여부는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의원 이름 앞의 빨간 동그라미는 평생의 악몽이 될 것이다. 국민보다 박근혜를 사랑했던, 국가보다 친박을 추종했던, 박근혜를 이용해 자기 잇속을 챙겼던 정치꾼….
그러니 비주류로 올망졸망 지내온 게 다행스럽다. 충성심 운운하며 끼어주기를 거절했던 절대친박 선배가 고맙다. 김무성의 갈팡질팡, 유승민의 뚝심 있는 침묵, 비주류의 줏대없음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한번 충전으로 하루종일 별 탈 없는 내 휴대폰이 대견하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계절, 감사하기에 바쁜 나날이다.
[뉴스핌 Newspim] 이승제 선임기자(openeye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