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보다 사랑, 사랑보다 예술(4)
푸시킨의 고향, 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사진=이철환> |
19세기 러시아는 최악의 전제정치와 농노제의 유산, 이에 저항하는 민중의 봉기 등으로 숨 가쁘게 요동치던 시대였다. 한편으로는 표트르 대제 이래의 서구화 정책과 프랑스 혁명 등을 통해 유럽의 진보사상과 사조가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폴레옹의 침입에 맞서 싸우면서 민족의식이 크게 고양됐고, 지식인들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러시아에는 사치와 향락에 찌든 황실과 귀족사회 그리고 이들에게 수탈당하는 민중들과 농노의 비참한 현실이라는 두 개의 사회가 존재했다. 이러한 모순된 사회체제에 갈등하던 젊은이들은 새로운 조국을 만들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고 목숨을 바쳤다.
그런 가운데서도 러시아인들은 문학·예술·사상 등 모든 분야에서 문화의 꽃을 피워내었다. 그것은 실로 시대정신의 소산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푸시킨과 고골리,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로 맥을 이어가면서 그 황금기를 구가한다. 특히 이 시기의 러시아 문학은 사회현실을 농도 짙게 반영하는 독특한 리얼리즘 문학으로서 세계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푸시킨도 이 시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푸시킨의 작품세계는 도스토예프스키가 평가했듯 모든 것을 포용한 보편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시·소설·희곡·평론·기행문·역사물 등 모든 장르에 걸쳐 작품을 썼으며, 운문소설이란 새로운 장르를 창안해 내었다. 더욱이 작품마다 해당 장르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작품성이 뛰어나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전통적인 고전주의와 서구적 낭만주의, 그리고 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풍토로 자리 잡게 된 사실주의의 요체가 녹아 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은 1799년 모스크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향락과 사치에 빠져 살던 부모는 아이들의 교육을 프랑스인 가정교사에게 맡겨 놓은 채 별 관심이 없었다. 푸시킨은 성격이 급하고 게을렀으나 상상력이 무척 탁월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서재에서 문학과 철학 서적을 탐독한 그는 6년간 유서 깊은 귀족학교 리쩨이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리쩨이는 알렉산드르 1세가 황실과 귀족 출신의 자녀들을 나라의 간성으로 키우기 위해 세운 학교였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외국 유학파 교수들의 혁신적인 교육에 영향을 받아 반체제 인사로 성장했는데 푸시킨도 그중 하나였다.
1817년 리쩨이를 졸업한 푸시킨은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다른 귀족 자제들처럼 음주와 여색 등 향락에 빠져 무절제하고 방탕한 나날을 보낸다. 이때 쓴 시들은 주로 사랑·우정·기쁨 등을 주제로 한 서정시들이었지만, 진보적인 청년귀족들과 교제하게 되면서부터 점차 조국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시에 담았고 자유가 중심주제로 떠올랐다. 특히 청년혁명단체 '데카브리스트(Dekabrist)' 와 어울려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1817년 자유를 찬미하는 송시 '자유'와 1819년 농노제 붕괴를 예언한 '농촌' 등 일련의 과격한 정치적 작품을 발표하면서 푸시킨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불온시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후 시적 독창성이 뛰어나고 낭만주의의 도래를 예고한 장편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출간하여 젊은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지만, 1820년 결국 남러시아로 추방된다. 시골에 추방당해 있던 덕분에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연루되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황제가 즉위한 후 사면을 받아 몸은 자유로워지게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비밀경찰의 엄격한 감시와 검열을 받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 유배생활은 그에게 폭넓은 독서를 통해 문학적 영감을 키우고 작품 활동에 전념케 하는 기간이 되었다. 특히 남러시아 카프카즈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젖으면서 새로운 시적 영감을 얻었으며,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에 빠짐으로써 소위 푸시킨의 '바이런 시대'가 열리게 된다.
한편, 1823년에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흑해의 항구 도시 오데사로 다시 이송된다. 거기서 그는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 작품인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Evgeny Onegin)'을 쓰기 시작했다. 또 어머니의 영지가 있는 미하일로프스코예에서 연금 상태로 머물 때는 셰익스피어에 깊이 빠져 비극 시 '보리스 고두노프'와 풍자적 서사시 '누린백작' 등을 완성한다. 이후 '예브게니 오네긴'의 초고가 완성되고, '엘레지', '잠 안 오는 밤에 쓴 시', '벨킨 이야기' 등의 서정시와 산문이 쏟아져 나왔다.
푸시킨은 1831년 근 10년간에 걸쳐 쓴 역작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표한다. 일견 통속소설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은 귀족청년 오네긴의 생활상을 통해 1820년대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의 방탕과 무기력을 폭로하였다. 아울러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려 깊은 여성 타치야나의 형상을 통해 러시아의 미래와 희망을 꿈꾸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이후 러시아 사회에서 여주인공 타치야나는 강인한 러시아적 여인상으로, 오네긴은 부정적인 남성상의 전형으로 부각된다.
그 후로도 푸시킨은 많은 시를 썼는데, 특히 마지막 장편 서사시 '청동의 기사'는 전제적 국가권력과 소시민의 운명이 어떻게 대립 모순적 관계를 갖게 되는지를 조명하고 아울러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숙명을 제시하였다. 그는 또 "정확함과 간결함이 산문의 생명이며, 산문에는 사상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산문에서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리얼리즘의 경향은 오히려 시보다는 산문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대표적인 산문으로는 다섯 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벨킨 이야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원형이 된 역사소설 '대위의 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등이 있다. 특히 로마노프 왕조를 뒤흔든 당대 최대의 정치범을 소설 속에 형상화한 '대위의 딸'은 치밀한 구성과 간결한 문체로 푸시킨 산문 예술의 극치라는 평을 받았다.
푸시킨은 문학활동을 하는 가운데 삶에 대한 통찰력이 엿보이는 여러 명언들을 남겼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재빠른 성공은 반드시 빛이 바랜다, 가을 낙엽이 썩어 사라지는 것처럼.”
“어떠한 나이도 사랑에는 약하다. 그러나 젊고 순진한 가슴에는 사랑이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 앞에서는 평범하다.”
“사람이 항상 좇아야 할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다. 사람이 항상 좇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다.”
“두 신체가 한 곳에서 존재할 수 없듯, 두 가지의 다른 생각이 도덕의 영역에서 공존할 수는 없다.”
이처럼 푸시킨은 러시아인들에게 대문호로 추앙받아 왔지만 개인적인 삶은 불행했다. 부인의 끊임없는 불륜행각이 그를 괴롭혔고 끝내는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고뇌가 그를 더 집필활동에 전념케 하고 문학의 깊이를 더 심화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1828년 29세의 푸시킨은 모스크바의 한 무도회에서 16세의 미녀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보자 넋을 잃는다. 얼굴이 라파엘로의 그림 '마돈나'처럼 생긴 나탈리야는 허영심이 많고 속물적인 여자였지만, 푸시킨은 자기의 청혼을 거절하는 그녀의 냉담함에 더 깊이 빠지고 만다. 위선적이고 천박한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겨우 약혼을 승낙 받은 푸시킨은 1831년 2월 그녀와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해 가을 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연년생의 두 딸을 낳는다. 그러나 나탈리야는 남편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고 도와주기는커녕 허영과 사치에 빠진 채 러시아 사교계에서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아내 때문에 그 많던 재산이 바닥을 보이고 심지어는 귀중품을 전당포에 잡혀야 할 지경이 되었으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편 푸시킨의 고민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교계의 여왕처럼 군림한 나탈리야는 한 궁정행사에서 황제의 눈에 들게 되었다. 이후 그녀의 미모에 반한 황제는 그녀를 자주 볼 수 있도록 푸시킨을 시종보에 임명한다. 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었지만 푸시킨은 그 직책을 통해 역사의식에 눈뜨게 되면서 처량한 자신의 삶을 그나마 보상받으며 그럭저럭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삶을 더욱 황폐화시키고 결국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나탈리야가 새로운 염문을 뿌렸던 것이다. 네덜란드 공사의 양자인 프랑스 태생 단테스는 잘생긴 용모를 무기삼아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를 휘젓다가 나탈리야에까지 접근했다. 아내의 불륜을 암시하는 익명의 투서가 푸시킨과 그의 친지들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푸시킨의 진보적인 사상을 미워한 세력가들의 음모라는 말도 있고, 나탈리야와 황제 간의 불륜을 덮어두기 위한 계책이라는 말도 있지만 푸시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된다.
1837년 1월 27일 낮 4시에 결투가 벌어졌고 푸시킨은 단테스의 총에 맞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나 아내는 총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푸시킨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정부(情夫)인 단테스에게 뛰어갔다. 죽어가면서 다른 남자의 품으로 달려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된 그의 심정은 얼마나 비통하고 참담했을까? 결국 1837년 1월 29일, 푸시킨은 37년 8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푸시킨은 사랑하는 여인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다 끝내 목숨까지 잃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몸을 내던졌던 것이다.
푸시킨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그의 집 주변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민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황제는 푸시킨의 죽음을 민족적 손실로 여기고 분노하는 군중들이 시위라도 일으킬까 두려워해 장례를 조촐하게 치르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서재는 샅샅이 수색되고 의심이 드는 기록물은 모조리 압수되었다. 시인 오도예프스키는 '러시아 시의 태양이 졌다'는 추도문을 발표하여 정부의 질책을 받았고, 레르몬토프는 부패한 러시아 사교계와 궁정을 질타하는 '시인의 죽음에 부쳐'를 발표했다가 카프카즈로 유배되었다.
황실의 강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푸시킨의 시와 명성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예브게니 오네긴'은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