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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과 장미를 사랑한 로맨티스트, 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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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보다 사랑, 사랑보다 예술(7)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 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을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소요할 것입니다.

릴케는 '가을 날'을 이렇게 시로 표현하였다. 아련한 향수와 그리움을 자아내는 이름,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야말로 시인의 대명사다. 세계인에게 가장 많은 애송시를 제공한 시인이다. 또 그는 여인과 장미를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였다.

스위스 라롱에 있는 릴케의 무덤과 묘비명 <사진=이철환>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187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교로서 입신을 꿈꾸었으나 실패하고 제대하여 하급관리가 되었다. 허영심 강한 어머니는 결혼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처럼 릴케는 어린 시절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결혼 후 처음으로 낳은 딸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드러낸다. 죽은 딸을 잊지 못한 어머니는 릴케를 여자아이처럼 키웠다. 그래서 일곱 살 때까지 여자 옷을 입고 자라야 했다. 여덟 살 때 부모가 이혼하자 릴케는 따뜻하지 않은 어머니 품에서 자라게 된다.

1886~1890년까지 아버지의 뜻을 좇아 육군 군사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섬약한 시인의 감수성을 타고난 데다 병약한 릴케에게는 군사학교의 생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1891년에 신병을 이유로 중퇴하고 말았다. 그 뒤 20세 때인 1895년 프라하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예술사와 문학사를 공부하였고, 곧이어 1896년 뮌헨 대학으로 옮겨 예술사, 미학 등을 공부하였다.

1897년, 릴케는 성공한 작가이자 평론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열네 살 연상의 여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나게 된다. 루 살로메는 릴케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899년과 1900년 2회에 걸쳐서 루 살로메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한 것이 시인으로서의 릴케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떨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또 릴케는 1902년에는 파리로 가서 조각가 로댕의 비서가 되었다. 로댕과 한집에 기거하면서 로댕 예술의 진수를 접하게 된 것도 그의 작품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6월 스위스의 어느 문학 단체의 초청을 받아 스위스로 갔다가 거기서 영주하였다.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나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Sonnette an Orpheus)' 같은 대작이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릴케의 문학이 처음부터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독학하다시피한 문학청년 시절에 첫 시집을 냈으니, 미숙했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릴케가 처녀시집 '삶과 노래'를 낸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사실 첫 시집을 비롯하여 루 살로메를 만나기 전까지의 시들은 완성도가 다소 떨어진다. 다만, 격정을 숨기지 않는 청년의 감수성은 십분 느낄 수가 있다.

루 살로메를 만나 러시아 여행 등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게 되면서 릴케의 문학은 바야흐로 날개를 달게 되었다. 1905년에 씌어진 '기도시집(祈禱詩集)'을 통해 비로소 릴케는 평단과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1907년 발표한 '신 시집'에서는 한층 더 성숙된 그의 시세계를 선보인다. 또한 이 무렵 로댕과 함께 일하면서 조각의 세계를 통해 사물을 보는 눈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1910년 만들어진 소설 '말테의 수기'도 릴케 문학의 완숙기에 창작된 중요한 작품이다. 덴마크 출신의 젊은 시인 말테가 파리에서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수기 형식으로 담은 이 소설은 릴케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신 시집'에 대응되는 산문으로 된 작품이다. 그동안의 시들이 상징주의자의 순수시였다면, '말테의 수기'는 실존주의자적 관점으로 만든 첫 작품이라 할 것이다. 다만 좀 난해한 측면이 없지 않다. 여하튼 이 대작을 발표한 이후 그는 후유증으로 집필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오랫동안 글 쓰는 것을 중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마지막 조국으로 여기는 스위스에서 살면서 그의 문학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1923년 연이어 집필한다. '두이노의 비가'는 릴케 시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릴케의 문학세계와 삶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사랑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수많은 여인들이 스쳐지나갔다. 누군가 릴케의 여자들을 ‘항성’과 ‘혜성’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르면 루 살로메와 같은 여인이 릴케의 생애 내내 사라지지 않은 항성이라면, 화가 발라디네 클로소프스카 등은 잠깐 스쳐 지나간 유성 내지 혜성과 같은 존재라 할 것이다.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여인은 단연 루 살로메다. 릴케가 22세였던 1897년, 당시 36세인 루 살로메를 만나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루와의 만남은 릴케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루는 릴케에게 연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성애를 풍기는 여인으로서 그의 감성적 역량과 자질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릴케 시의 세계에 많은 영감을 준 러시아를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그들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루는 릴케의 절친한 친구로 남아 있게 되었다.

1897년 5월 12일, 뮌헨의 소설가 야콥 바서만의 집에서 열린 다과 모임에서였다. 젊은 시인 릴케는 당대 멋진 여성의 대명사였던 루 살로메를 만나자마자 사랑의 거센 폭풍에 휘말려 들어갔다.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아니 그러했기 때문에 루 살로메는 릴케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모성의 여인이었다. 시원하면서도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그녀의 정신세계는 또한 릴케의 젊은 열정과 만나 불꽃을 튀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만나자마자 릴케의 가슴은 루 살로메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릴케에게 루 살로메가 각별했던 것은 그가 한 해 전에 읽은 그녀의 에세이 덕분이기도 했다. 루의 에세이 '유대인 예수'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릴케는 익명으로 그녀에게 몇 편의 시를 우송하기도 했다. 그녀의 에세이를 탐독하고 또 함께 했던 각별한 시간을 추억하는 젊은 시인에게 루도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는 급진전되어 금세 연인 사이가 된다.

릴케에게 루는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반려자였다. 그녀는 릴케에게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모성적인 사랑의 제공자였고,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데 미숙한 시인에게 현실적인 길을 안내하는 정신적 후원자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공부하고 몇 차례에 걸쳐 여행을 떠나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가까워졌다. 루는 릴케에게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을 알려주었으며, 나아가 러시아 문학의 세계를 소개해 주었다.

루를 만난 후 릴케에게 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우선 하나는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1897년 빈의 한 잡지에 ‘르네 마리아 릴케(René Karl Wilhelm Johann Josef Maria Rilke)’라는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작품을 게재한다. 이는 루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릴케는 줄곧 이 이름을 쓰게 된다. 또 다른 변화는 릴케의 시 세계가 더욱 원숙해지게 되어 그는 이 무렵 초기 시의 미성숙한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루 살로메에게 헌정한 ‘기도시집’의 제2부에서-

릴케에게 이다지도 큰 영향을 끼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는 1861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미모에 지적 편력이 더해져 평범한 여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21세 때 스위스로 건너온 루는 38세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역시 같은 시대의 철학자였던 33세의 파울 레를 만난다. 두 사람 모두 루에게 빠져들었으나 루는 레를 선택해서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자 니체는 패배감과 상실감으로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했다. 당시 니체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기 위해 열흘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탈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 역시 오래 가지 않아 루에게서 버림받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루 살로메는 26세 되던 때 베를린의 문헌학자 프리드리히 칼 안드레아스 교수와 우정 관계를 전제로 결혼했으며, 28세에는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과 사귀었다. 36세 때는 22세의 문학청년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만나 러시아 여행길에 나섰다. 루를 향한 릴케의 사랑은 온 영혼을 다한 것이었지만, 루는 릴케의 어두운 영혼을 오래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뒤 루는 국제정신분석학회 바이마르 회의에서 프로이트를 만나 그 밑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다 프로이트의 제자 타우스크와 한때 열애에 빠지기도 했으나, 루는 타우스크를 버렸고 그 역시 루가 떠나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이처럼 거침없는 남성편력으로 인해 그녀를 남자를 파멸시키는 팜므파탈이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루는 사랑과 성을 남녀의 인생을 잡아끄는 커다란 자력의 운명적 힘으로 여겼고, 그러면서도 사랑과 성에 자신을 구속시키지 않은 자유의 여신이었다는 평가가 대세를 이룬다.

릴케에게 있어 많은 사랑의 경험은 그의 문학생활에 커다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여인들과의 사랑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많은 곳을 떠돌아다닌 덕분이기도 하다. 실제 릴케는 수많은 곳을 여행했다. 그는 여행을 통해 많은 시적 영감을 얻게 된다. 특히 12년간 살았던 프랑스, 두 차례에 걸쳐 루와 함께 여행했던 러시아, 만년에 정착해 7년여 살았던 스위스는 ‘자신이 선택한 또 하나의 조국’이라고 표현했다.

러시아는 비록 두 차례의 여행을 한 것이 전부이지만 그 어떤 지역보다 릴케에게 깊은 인상과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해준 곳이었다. 루 살로메와 함께 1899년 봄에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했으며 다음해인 1900년 여름 다시 그곳을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내면적인 깊이를 더해 나가는 계기를 접하게 된다. 러시아는 릴케의 내면세계에 원초적이며 거의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곳이다.

릴케는 만년에 스위스에 정착해 살다가 1923년 12월 29일 51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아름다운 론 강 계곡에 위치한 자신의 거처지 뮈제트 성으로 찾아온 이집트 여자 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린 것이 원인이 되어 패혈증으로 고생하다 죽었다는 설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릴케가 백혈병을 앓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의 시신은 이듬해 1월 2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유언에 따라 거처지 인근에 위치한 라롱의 언덕 위 교회 옆에 묻혔다. 묘비에는 릴케 자신이 직접 작성한 묘비명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
(Rose, oh reiner Widersprl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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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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