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황수정 기자·사진 이형석 기자] 선한 미소와 독특한 입꼬리. 장염 때문에 커피 대신 이온음료를 마셔야 했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던 배우 정욱진(29). 괴로워하고 슬퍼하던 무대 위 '병구'를 벗어난 그는 한없이 밝으면서도 진중한 사람이었다.
"배우로서 정말 즐거운 것 같다"고 말하는 정욱진은 현재 연극 '지구를 지켜라'(연출 이지나)에서 병구 역으로 열연 중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2003년 장준환 감독의 동명영화를 원작으로, 2016년 초연을 마친 후 올해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랐다.
"작품 제안을 받고 영화를 봤어요. 원작이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처음에 연출님께서 배우로서 연기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일 거라고 말씀하셨죠. 연습할 때도 그렇고, 연기할 때마다 배우로서 진짜 즐거운 것 같아요.(웃음)"
정욱진이 맡은 '병구'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불행이 외계인 때문이며 지구가 곧 멸망한다고 믿는 인물. 어렸을 때부터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에 시달렸고, 이후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어머니까지 잃게 된다.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하기는 힘들고 이해 안 되는 사람도 정말 많잖아요. 병구를 준비하면서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아픔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어요. 어떻게 하면 병구의 아픔을 내가 더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지에만 집중했죠. 이번 재연에서는 '병구가 왜 그렇게 됐는지'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려고 노력했어요."
병구를 이해하기 위해 정욱진은 그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아무리 아픔이 있어도 그가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는 병구의 터닝포인트를 '병구가 일하던 공장의 가스 누출 사고'로 꼽았다.
"병구는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병적으로 꽂혀있어요. 처음에는 지구가 엄마인가 했죠.(웃음) 그런데 공장 가스 누출 사고로 엄마가 식물인간이 되고, 여자친구도 죽고, 그때 병구도 두 사람을 구하려다 같이 쓰러졌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눈을 뜨기 전 어떤 계시 같은 꿈을 꿨다고 생각해요. 병구의 대사 중에 '병구야 지구를 지켜라' '너가 지구를 구하면' 이런 대사가 있어요. 이게 병구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꿈 속에 엄마나 여자친구가 병구에게 했던 말인 거죠. 그래서 병구는 끝까지 지구를 지키려고 하는 거죠. 이런 스토리를 짜니까 스스로 말이 되더라고요."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는 정욱진을 포함해 박영수, 강영석, 샤이니 키가 분한다. 정욱진은 자신만의 병구를 '스탠다드'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초연과 달리 애드리브보다 메시지, 상징성에 중점을 두게 되면서, 병구가 극을 끌고 가는 힘이 더욱 커졌다.
"제 색깔이 뭔지에 대한 고민은 항상 해요. 그래야 작품이 더 풍성해진다고 생각하고요. 나름대로 항상 새로운 시각과 분석으로 인물에 접근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연출님께서 '정공법으로 가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최대한 스탠다드 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다보니 오히려 매 장면 감정이나 대사에 더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기본을 중요시하면서 더 많이 배우게 됐어요."
2011년 데뷔한 정욱진은 허리를 다쳐서 쉴 때를 빼곤 끊임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해 왔다. 연극, 뮤지컬 구분 없이 왕성한 활동으로 어느새 '대학로의 아이돌'로 불리는 정욱진. 팬들의 사랑이 너무나 고맙고, 아무리 힘들어도 무대 위에만 올라가면 행복하다는 천상 배우다.
"준비기간은 힘들고 무대는 재밌어요. 연습이 마냥 즐거웠던 때는 없죠.(웃음) 하지만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남 앞에 서기를 좋아했던 사람이고, 낲들의 시선과 환호를 받으면서 엔돌핀이 나오는 것 같아요. 작품을 하면서도 원캐스트가 아니면 틈틈이 쉴 수 있어요. 팬분들께서 편지를 많이 써주시는데 하나 하나 다 읽어요. 집에 가면 다 쌓여있죠. 배우니까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편지를 통해 많이 얻죠. 팬분들과 함께 세월을 보낼 수 있는게 참 고마워요. "
정욱진의 바람은 "끝까지 연기하는 걸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하고 싶은 작품도 많고 역할도 많아 하나를 꼽을 수 없다는 그. 지난해 JTBC '팬텀싱어'에 잠깐 출연해 텔레비전의 파급력을 느낀 정욱진은 무대 구분 없이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고.
"'팬텀싱어'에서 통편집 됐는데, 잠깐 5초 정도 나온 걸 보고 할머니께서 너무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방송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웃음) 계절마다, 혹은 내 심리상태,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감정 등에 따라 하고 싶은 작품이 달라져요. 멋진 걸 하면 못생긴 걸 하고 싶고, 진지한 걸 하면 재밌는 걸 하고 싶고.(웃음) 연습 하다보면 순간 일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즐거움이 더 커요. 끝까지 연기하는 걸 즐길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죽을 때까지 즐겁게 말이죠."
타고난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즐기면서 노력까지 하는 정욱진이 연기하는 '병구'는 오는 10월 2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만날 수 있다.
"병구를 요약해서 표현하면 '정의' '사랑' '박애'인 것 같아요.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선한 영역인 거죠. 이 작품을 보고 돌아가실 때 문득 병구를 생각하면서 착하게 살고, 선한 영역이 조금이라도 터치되었으면 좋겠어요."
[뉴스핌 Newspim] 글 황수정 기자(hsj1211@newspim.com)·사진 이형석 기자(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