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29)
19세기부터는 조각이 미술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어 갔다. 이는 더 이상 건축이 조각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건축 양식은 그때까지만 해도 화려한 장식이 보이는 게 대종을 이루었으나 점차 합리성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변해갔다. 물론 19세기에 들어서도 조각계에는 뤼드나 바리예, 카르포 등이 등장했으나, 조각은 여전히 회화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로댕의 등장은 이러한 조각의 고정관념을 근저로부터 깨고 조각에 대한 인식을 회화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게 된다. 로댕은 미켈란젤로 이후 최대의 거장으로 불린다. 그가 창조한 형상들은 생명력이 느껴지며 만지고 싶은 유혹마저 들게 한다. 그는 점토, 석고, 대리석, 또는 청동에 최고의 솜씨로 생명력을 불어넣어 피부, 근육, 독특한 육체적 특징, 그리고 얼굴 표정 등을 재창조해냈다.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은 1840년 프랑스 파리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세 때부터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14세부터 17세까지 파리에 있는 장식미술학교인 프티 에콜(Petite École)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하였다. 당시 드로잉 선생님이었던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은 학생들에게 그들이 생각하고 관찰한 것을 그리는 것이 그들의 인격발전을 가져온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나중 로댕의 조각품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티 에콜을 졸업한 1857년, 로댕은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기 위해 자신의 동료를 모델로 만든 찰흙작품을 제출했지만 입학하지는 못하였다. 그 이후 두 작품을 더 제출하였으나 역시 거부되었다. 미술학교 입학이 거부되자 로댕은 심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건강마저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자신의 작품이 인정을 받지 못해서 생긴 우울증 때문이었다.
더욱이 1862년 누이가 젊은 나이에 죽자, 로댕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비탄에 잠긴 그는 종교에서 위안을 찾고자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로댕에게 마음을 달래기 위해 조각을 다시 시작할 것을 권유했다. 로댕은 1876년 작품 《청동시대(靑銅時代)》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주로 장식품과 건축장식을 만드는 일을 하는 장인으로 살았다.
그러던 중 1875년부터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는데, 이는 조각가로서 커다란 영감을 얻게 되는 전환점이 된다. 거기서 미켈란젤로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으며, 그것은 《청동시대》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877년 2년간의 이탈리아 체류생활을 끝내고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로댕이 최초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청동시대》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것은 인간의 외형을 단순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포착하고 생각한 인간상을 표현하기 위해 청동으로 된 한 청년의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그러나 고정된 미의 관념에 젖어있던 심사위원들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생생한 청년상을 보고 산 사람을 방불케 한다고 주장하였다.
1880년에 이 작품은 재인식되어 살롱에서 3등상을 받고 국가에서 매입하였다. 이와 동시에 장식미술관의 현관 장식품 창작을 의뢰받았다. 로댕의 조각은 이때부터 《청동시대》의 사실적 표현에 만족하지 않고 내면적인 깊이가 가미된 생명력 넘치는 표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의뢰 받은 장식미술관의 작품 모티프를 단테 《신곡》의 〈지옥편〉에서 얻은 영감에 두고, 대작 《지옥의 문》(1880∼1900)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한편 이러한 사상 속에서 그의 명성의 핵심을 이루는 갖가지 작품, 즉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칼레의 시민》, 《발자크상(像)》 등을 통해 다채롭고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다.
로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으로부터 받게 된 많은 자극과 감화를 한층 더 승화시켜 나갔다. 그는 예리한 사실의 기법을 구사하여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훌륭하게 성취시켜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조각의 전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예리한 관찰을 통해 정지(靜止)한 조각에 움직임을 부여하고 돌과 청동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뛰어난 데생, 수채화, 판화작품 외에도 중요한 예술론도 저술하는 등 현대조각의 아버지로서 그가 예술계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로댕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전시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 이후에는 대리석 작품과 소품을 제작하는 일 외에는 저술과 강연에 전념하였다. 이처럼 명성을 얻게 되자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있었는데, 그는 1905년 로댕의 비서로 활동했다.
수많은 로댕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것은 1880~1900년 기간에 제작된 186인의 인체를 높이 6.50m의 문에 조각한 《지옥의 문》이다. 이는 그가 단테의 《신곡>에서 영향을 받아 제작한 조각으로, 문에는 지옥으로 향하는 인간의 고통과 번뇌, 죽음을 보여주는 인물 조각상들이 펼쳐진다.
연이어 1895년 《칼레의 시민》, 1900년 《입맞춤》, 1904년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 1907년 《걷는 사람》, 1913년 《클레망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지옥의 문》의 한 부분이었다. 문 윗부분에서 아래의 군상(群像)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던 것을 독립된 작품으로 크기를 키운 뒤 1904년 살롱에 출품하고부터 유명해졌다. 살롱 출품 후 파리의 판테온에 놓아두었으나, 그 후 로댕미술관의 정원으로 옮겨졌다. 로댕의 묘에는 이 《생각하는 사람》의 모조품이 놓여 있다.
‘생각하는 사람’( 높이 186㎝) 로댕미술관 소장 <사진=이철환> |
로댕은 사랑도 그의 작품 활동처럼 열정적으로 했다. 인물의 심리와 감정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로댕에게 커다란 영감을 준 것은 여인들과의 사랑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자유로운 사랑을 추구했고 많은 여인들을 자신의 작품 모델로 삼았다. 로댕의 예술성을 일깨운 수많은 여자 중 유독 세 명의 여자가 눈에 띈다. 그를 조각가의 길로 인도해준 친누이 마리아, 로댕과 결혼을 하게 되는 첫사랑 로즈, 그리고 예술의 동반자 까미유 끌로델이 그들이다.
로댕의 주위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의 곁을 항상 지키며 헌신해 준 사람은 로즈 뵈레였다. 로댕이 24세이던 1864년, 20세의 아름다운 재봉사 로브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로댕이 찾던 이미지에 꼭 맞는 여인으로, 로댕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승낙으로 '젊은 여인의 초상'이라는 여성의 흉상 조각을 완성한 로댕은 로즈에게 함께 살기를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로즈는 로댕의 살림을 돕고 때로는 그의 작품을 관리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의 모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로댕은 작업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가 요청한 결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로댕은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만년에 로댕이 뇌졸증으로 갑작스레 쓰러져 혼수상태에 이르자 로즈는 그를 곁에서 끝까지 지켜주었다. 이 사실에 감동한 로댕은 로즈와 만난 지 53년 만에 뒤늦게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결혼 후 2주 만에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이후 로댕도 같은 해 로즈의 곁으로 가게 된다.
로댕은 나이 43세가 되는 1883년, 당시 18세이던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미술과 조각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까미유에게 있어 로댕은 진정으로 자신의 예술적 재능과 열정을 이해하는 동반자이자 스승이었다. 로댕에게 있어서도 까미유는 작업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그녀는 단순한 작업 모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각가로 로댕의 작품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다. 가끔 로댕도 그녀의 이 뛰어난 재능에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 파리에는 여자 예술가를 위한 어떠한 학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꿈을 사랑하는 연인 로댕을 통해 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로댕에게는 로즈가 있었기에 둘의 관계는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결국 로댕은 1893년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하게 된다. 로댕이 자신의 재능을 비롯한 모든 것을 앗아갔다고 생각한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인해 우울증과 피해의식, 편집광적 증상을 보였다. 나중에는 증상이 심각해져 거리를 방황하며 밤마다 로댕의 집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대기도 했다. 51세가 되던 1912년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30년을 보낸 뒤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외에도 로댕은 수많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다. 영국출신의 화가 그웬 존은 1904년 파리에서 로댕을 알게 되어 그의 모델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 자신보다 36살이나 많았지만 한창 전성기에 있던 로댕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거리를 두는 로댕에게 실망하여 결국 관계를 접게 된다. 이후 로댕은 1908년 또다시 하나코라는 일본 무용수를 알게 된다. 하나코는 로댕의 유일한 동양 모델이 되었고, 그녀의 동양적 매력에 흠뻑 빠진 로댕은 그녀를 위해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로댕의 사랑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결국 로댕에게 있어서 예술가로서의 성공과 명예가 여인들과의 사랑보다 더 소중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로댕은 1917년 11월 17일 77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는데,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 상대이면서 아내인 로즈 옆에 묻힌다. 두 사람의 묘지 위에는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모조품)이 놓여 있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