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배정길 役
몸·마음 피폐해져…우울증까지 겪었다
[서울=뉴스핌] 장주연 기자 = 연기 경력 44년. 웬만한 경험은 다 해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만이었다. 배정길로 살았던 지난가을 그는 감정의 끝을 맛봤다.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다. 난생처음 캐릭터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다. 영화 ‘허스토리’는 배우 김해숙(63)을 매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김해숙의 신작 ‘허스토리’가 오는 27일 베일을 벗는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일본 정부에 맞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관부 재판 실화를 소재로 했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김해숙은 “모든 게 새로웠던 작품”이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언론시사회 때도 정말 긴장했어요. 처음에는 영화를 보기 싫을 정도로 두려웠죠. 제 모습을 보기 무섭더라고요. 보고 나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죠. 멍하고 허하달까요. 해냈다는 감동과 동시에 이게 부족했던 건 아닐까, 저게 부족했던 건 아닐까 하는 묘한 감정이 많았어요. 아직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느낌이에요.”
[서울=뉴스핌] 이윤청 기자 = 배우 김해숙이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06.08 deepblue@newspim.com |
극중 김해숙은 위안부 피해자 배정길을 열연했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며 일본에 당당히 맞서는 할머니. 관부 재판을 위해 세상에 나선 10명의 원고단 중 한 명이다.
“어떤 역할을 맡으면 감정을 어느 정도 알고 가요. 사실 저도 그동안 힘든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감정의 끝도 안다고 생각했죠. 근데 아니었어요. 블랙홀 같았죠. 시간이 지날수록 무서웠어요. 감정의 폭을 상상하고 느끼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어떤 날은 촬영장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죠. 그러다 나중에는 날 버렸어요. 인간 김해숙, 배우 김해숙을요. 그래도 힘들더라고요. 매 신, 하루하루가 슬펐어요. 정말 많이 울었죠.”
특히 관부 재판 신은 유난히 그를 아프게 했다. 김해숙은 그때를 떠올리며 몇 번이고 허공을 응시했다. 곧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원고로 나온 우리들은 그 신이 끝나면 쓰러질 정도로 쏟아냈어요. 몸에 있는 모든 물기가 빠져나간 느낌이었죠. 실제로 저는 물도 안마셨어요. 할 수 있는 일이 그거 뿐이기도 했고요. 그분들은 얼마나 입이 마르셨겠어요. 다른 배우들도 그 장면 찍을 때는 화장실도 안가더라고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에서 정말 처절하게 연기했죠. 스태프들 역시 감정을 깨지 않게 하려고 한마음으로 움직여줬고요.”
[서울=뉴스핌] 이윤청 기자 = 배우 김해숙이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06.08 deepblue@newspim.com |
후유증은 생각보다 더 거셌다. 김해숙도 모르는 사이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었다. 벗어나기 위해 곧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갔다. 지난 1월 종영한 SBS 드라마 ‘이판사판’이었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모든 사물이 슬퍼 보이고 모든 게 무기력해졌죠. 처음이었어요. 제가 원래 성격이 낙천적이라서 깜짝 놀랐죠. 그래서 몸이 아픈 줄 알고 드라마 찍고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어요.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더라고요. 그 순간 ‘아, 내가 아직도 영화에서 못 빠져나왔구나’를 직감했죠. 그러고 두 달 전쯤인가 여행을 다녀왔어요. 다행히 온전히 제시간을 보내고 나니 완전히 빠져나온 게 느껴지더라고요.”
지독히 힘들었던 시간. 하지만 김해숙은 “그래도 일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연기를, 다음 작품을 말하는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거 하나는 저의 좋은 점이죠(웃음). 사실 연기 말고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어요. 골프도 안좋아하고 취미도 없고요. 유일하게 흥분되는 게 새로운 캐릭터를 만났을 때죠. 그 순간이 제일 행복해요. 왜 연애를 시작할 때,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게 됐을 때 느껴지는 그런 설렘과 비슷해요. 더욱이 그 새로운 캐릭터가 내가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라면 더 짜릿하죠. 저도 모르게 엔도르핀이 돌아요. 감사한 일이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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