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철거 조건 자체는 까다로워
업계 경쟁 치열하고 주민 민원도... 졸속 공사에 영향
전문가 "문제 몰랐던 것 아니다.. 단순 땜질 처방 안돼"
[서울=뉴스핌] 황선중 기자 = 최근 서울 잠원동과 경기 부천에서 철거 건물이 붕괴하는 사고가 잇따르면서 철거 공사 안전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규정의 미비뿐만 아니라 돈과 시간, 각종 민원 등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유사한 사고가 계속될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12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 4일 발생한 서울 잠원동 철거 건물 붕괴 사고는 졸속 공사에서 초래된 '인재'(人災)라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철거 전 설치해야 할 쇠파이프 지지대가 없었으며, 철거 과정에서 나온 콘크리트 잔해도 치우지 않았다. 현장을 감독해야 하는 감리도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사전에 관할 구청에 신고한 철거 계획대로 공사가 진행되지 않은 것이다.
서울시는 2017년 1월 종로구 낙원동 건물 붕괴 사고 이후 철거 현장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건축 조례를 개정했다. 건축주가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서는 철거신청서를 비롯해 해체공사계획서·석면조사결과보고서·철거감리계약서 등을 구청에 제출해야 한다. 건축물이 지상 5층 또는 13m 이상, 지하 2층 또는 깊이 5m 이상이면 구청의 안전 심의를 거쳐야만 한다.
안전 심의는 건축기술사·구조기술사·건축공학과 교수 등 건축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의 평가를 거친다. 심의 과정에서 안전대책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면 관할 구청은 철거 신청을 반려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 뒤 공사를 진행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이 경우 건축주는 보완 계획을 담은 이행계획서를 추가 제출하고 심의를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는 계획대로 공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철거업체는 모든 안전 수칙을 일일이 지키며 공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공사 기간이 길어질수록 철거업체가 손해를 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관할 구청 심의 과정에서 철거 기간·공법·순서 등에 대한 객관적인 세부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현장에서는 졸속으로 공사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전언이다.
[서울=뉴스핌] 이한결 기자 = 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역 인근에서 건물 외벽이 무너져 내려 차량 4대가 파손되고 2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2019.07.04 alwaysame@newspim.com |
업체 간 과다 경쟁도 졸속 공사를 부추기는 요소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 내 '건물 및 구축물 해체 공사업' 사업체는 △2007년 242곳 △2008년 252곳 △2009년 257곳 △2010년 239곳 △2011년 275곳 △2012년 297곳 △2013년 320곳 △2014년 342곳 △2015년 341곳 △2016년 342곳 △2017년 361곳 등으로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한 철거업계 관계자는 "철거 공사를 오래 한다고 우리가 돈을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니다"며 "건축도 아니고 철거를 하는 거니까 건축주는 당연히 철거 공사를 빨리 끝내주기를 원하고, 우리도 다른 작업에 착수할 수 있으니 웬만하면 빨리 끝내려 한다"고 말했다.
철거 현장 인근 주민들의 민원 소음 또한 졸속 공사가 진행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지난해 서울시 소음 관련 민원 총 5만5743건 중 공사장 소음 관련 민원은 4만6069건(82.6%)이었다.
철거업계 관계자는 "공사를 하고 있으면 찾아와서 시끄럽다고 욕하고 가는 주민들이 많다"며 "규정대로 차근차근 진행하라는 것은 현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고 했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공사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주민들의 민원도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에, 철거 기간이 과도하게 길다고 생각하면 구청 심의 과정에서 반려하곤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철거 공사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고 개인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해결책은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실제로 공사 현장에서 감리가 꼭두각시에 불과하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업계에서 몰랐던 것이 아니다. 모두 알고 있었고 위험성도 인지하고 있었다"며 "다만 돈과 시간을 고려하다 보니 해결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저 관계자한테 모든 것을 책임지라고 하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 결국 관계자 몇 명 처벌받고 머지않아 똑같은 사고가 또 발생할 것"이라며 "별도의 안전 자문단을 구성하고 지역 안전을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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