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순혈·하향 깨고 실용·개방·수평으로
버릴 건 버리고 핵심산업 집중해 새 도약 꿈꾼다
[서울=뉴스핌] 나은경 기자 = LG그룹과 주요 계열사들이 들어선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한때 63빌딩과 더불어 여의도의 랜드마크였다. 말쑥한 감색 정장과 넥타이를 맨 비즈니스맨들이 서류가방을 들고 분주하게 드나든다. 외국인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1년 새 눈에 띄게 달라졌다. 청바지와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 더 많다. 전형적인 비즈니스맨 복장을 차려입은 이는 드물다. 전통적인 복장 코드에서 비즈니스 캐주얼 착용 허용으로 넘어갔다가 '젊은' 구광모 회장이 들어선 후 완전자율복장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완전자율복장제는 현재 LG그룹의 대부분 계열사가 전 근무일로 확대 적용했다.
지난해 6월 29일 출범한 구광모호(號) LG그룹이 어느덧 2년 차에 접어들었다. 40대 젊은 총수는 글로벌 경영 환경과 시대 변화에 발맞춰 LG그룹 전반의 DNA를 바꿔 가고 있다. 보수적이던 조직에 실용주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첫눈에 띄는 변화가 바로 완전자율복장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구 회장은 조직문화와 사업구조를 바꾸고 있다.
주요 사업에 '선택과 집중'의 결단을 보이면서도, 그 과정에서 잡음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만들어 간다. ‘젊은 LG’, 구광모호 LG그룹이 거쳐온 1년간의 변화를 짚어봤다.
◆ 보수·순혈·하향 깨고 실용·개방·수평으로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올해 첫 경영 행보로 연구개발(R&D) 인재 육성을 위한 행사인 'LG 테크콘퍼런스'에 참석했다. [사진=LG] |
LG그룹은 지난 1947년의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을 모태로 한 재계 서열 4위(자산총액 기준)의 기업집단이다. 73년 차 기업인 만큼 내부에 켜켜이 쌓여 온 보수적인 분위기를 숨기긴 어려웠다. 젊은 구광모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이 같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수적인 문화의 뿌리는 순혈주의에 있다고 진단했다. LG그룹 신입사원 공채로 입사해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임원으로 승진한 'LG맨'만 중용되는 인사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그룹이 바뀌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구 회장 주도의 첫 정기 인사에서 LG그룹 모태인 LG화학 신임 대표이사(부회장)에 3M 출신의 신학철 수석부회장이 내정됐다. LG 출신이 아닌 외부 인사가 LG화학의 CEO로 임명된 것은 지난 1947년 창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어 지주회사인 ㈜LG의 경영전략팀 사장에 글로벌 컨설팅회사인 베인&컴퍼니의 홍범식 대표가 영입됐다. 자동차부품팀장으로는 한국타이어 연구개발본부장 출신 김형남 부사장이 발탁됐다.
각 계열사 대표이사와 임원진은 회장에게 연 2회 사업을 보고한다. 이 사업보고회는 일방적인 실적 점검과 미래 계획을 발표하는 하향식 구조로 진행돼 왔다. TV 드라마에서처럼 미리 서류로 보고된 내용을 읽으면 회장이 코멘트하는 식이었다. 젊은 구 회장은 이를 토론 방식으로 개편했다. 핵심 화두를 놓고 경영진이 치열하게 토론하는 분위기로 바꿨다. 회장의 지침을 받드는 방식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실현 가능성, 과정에서 예상되는 난관 등을 짚어보는 자리로 변화한 것.
최고경영진의 토론 문화는 조직 전반의 토론과 소통을 장려하는 문화로 바뀌었다. LG전자는 최근 서울 양재동 서초R&D캠퍼스에 ‘살롱 드 서초(Salon de Seocho)’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연구원들이 소속과 직급에 무관하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 문화활동을 즐기는 곳이다. LG전자는 LG트윈타워에도 경영진과의 오픈 커뮤니케이션, 재능기부 수업, 소규모 행사가 가능한 ‘다락(多樂)’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LG전자가 역동적인 조직문화를 강화하기 위해 최근 서울 양재동 서초R&D캠퍼스 1층에 ‘살롱 드 서초(Salon de Seocho)’를 열었다. 살롱 드 서초의 재즈 공연 모습. [사진=LG전자] |
◆ 비주력사업 버리고 신성장동력 찾고...‘결단’ 이어가는 구광모號
몸에 밴 문화를 바꾸는 것 외에 사업구조의 변화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국내외 경영 환경이 급격히 바뀌는 것에 발맞추지 못하면 도태되는 건 순간이기 때문이다.
LG전자는 지난 4월 수년간 검토만 할 뿐 시행하지 못했던 결단을 내렸다. 국내 스마트폰 생산라인을 베트남으로 이전하기로 한 것. 16분기 연속 적자 행진을 이어가던 모바일커뮤니케이션(MC)사업부를 살리기 위한 LG그룹의 마지막 카드라는 게 업계의 평가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사실 재무적 실익만 따지자면 LG전자는 4~5년 전에 스마트폰 공장을 이전해야 했다”며 “정계 반응이나 여론을 의식해 선뜻 추진하지 못했던 일인데 구 회장이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2월엔 ㈜LG와 LG전자, LG CNS가 차세대 연료전지를 개발하기 위해 공동 투자했던 연료전지 자회사 ‘LG퓨얼셀시스템즈’를 청산하기로 했다. 약 5000억원을 투자했지만 수소연료 분야에서 기대한 것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판단에서다. LG CNS는 미국 병원 솔루션 사업을 정리했고, ㈜LG는 LG CNS 지분 37.3% 매각을 진행 중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골칫거리였거나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 비주력사업을 정리하는 동시에 신성장동력 발굴이나 주력사업 투자에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구 회장이 이끌어가는 ‘뉴 LG’가 주목하는 신성장동력은 올레드(OLED), 전장, 로봇 사업이다. 지금까지 투자를 지속해 온 전장 사업과 로봇 사업에선 내년부터 영업이익을 내겠다는 내부 목표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올레드에 집중하자는 그룹의 방향성을 설정한 뒤 LG화학은 미국 최대 화학업체인 다우듀폰으로부터 차세대 올레드 기술인 잉크젯 프린팅 관련 특허와 공정기술을 인수하기로 했다. 현재는 막판 협상 중이다. LG디스플레이는 올레드 모듈 생산라인인 베트남 하이퐁 법인에 2263억원을 출자했다.
전장 사업을 키우기 위한 노력도 진행 중이다. 지난 2013년 설립된 LG전자 전장부품(VC, Vehicle Components)사업본부의 명칭은 지난해 말 전장(VS, Vehicle component Solutions)사업본부로 이름을 바꾸며 ‘솔루션’을 강조했다. 향후 VS사업본부가 부품뿐 아니라 자율주행 등 관련 서비스를 아우르겠다는 의미다.
추후 LG전자의 로봇사업센터가 맡게 될 역할도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업계에선 LG CNS 지분 매각이 완료되면 약 1조원에 달하는 매각대금으로 관련 인수합병(M&A)이 진행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밖에도 신기술을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 글로벌 스타트업 투자에 힘쓰고 있다. 지난 4월 LG그룹은 미국에 투자계열사인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설립했다. 이곳을 통해 미국 스타트업에 약 1900만달러(약 219억4500만원)를 투자했다. 투자가 이뤄진 스타트업들은 자율주행차, 로봇, 차세대 디스플레이,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인공지능(AI) 등 차세대 먹거리로 주목받는 분야를 아우른다.
◆ 日 수출 규제, 계열분리 불씨 등...1차 시험대 오른 LG그룹
미·중 무역분쟁이 G20 정상회의에 맞춰 진행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회담 이후 살짝 누그러졌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의 수출 규제라는 또 다른 암초를 만났다. 일본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제조공정의 핵심 부품인 레지스트(감광제)와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 절차를 강화했다. 이들 품목은 LG디스플레이와 LG전자에 직·간접적 피해를 줄 수 있다.
이 밖에 구광모 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는 구본준 전 부회장의 계열분리다. LG그룹은 장자 승계 원칙을 따르고, 새 총수가 취임하면 다른 형제는 독립하는 전통을 지킨다. LS그룹, GS그룹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구 회장의 작은아버지인 구본준 전 부회장이 어떤 식으로든 분리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시기와 방식은 현재로선 정해지지 않았다.
nanan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