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오영상 국제부장 = 지난 2018년 10월 미국 워싱턴포스트(WP)의 칼럼니스트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왔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튀르키예(옛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됐다.
이 사건을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했으며 그가 파견한 암살단원이 카슈끄지를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은폐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제적으로 큰 논란이 일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진상 규명 요구를 외면한 채 오히려 빈 살만 왕세자를 사실상 사우디의 국가 수반으로 인정하는 행보를 보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반면 대선 기간 중 인권·민주주의 등 보편적 가치를 강조했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사우디에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다. 사우디를 국제적 '왕따'로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빈 살만 왕세자를 자신의 카운터파트로 인정하지 않았고, 지난 80년간 전략적 파트너십을 유지해 왔던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급격하게 냉랭해졌다.
[오영상 국제부장] |
그랬던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15일 취임 후 처음으로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났다. 고유가로 석유 증산이 절실해지자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수장인 사우디와 증산에 대해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바이든의 행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월가 전문가들과 주요 외신들은 "사우디는 미국의 증산 압박에 좌우되지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인권·민주주의 등 그동안 바이든 대통령이 강조해 왔던 가치가 '석유'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비판했다.
과연 바이든의 사우디 방문은 비난받을 일인가? 인권과 민주주의는 석유 앞에 무릎을 꿇었는가?
지금 전 세계는 인플레이션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인플레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시작한 통화 긴축 전환은 경기 침체 우려를 키웠고, 올해 초까지만 해도 활황세를 보였던 주식시장은 이미 베어마켓(약세장)에 진입한지 오래다.
미국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9.1%로 치솟으며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도 6.0%로 23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한 가운데, 한국은행은 사상 처음으로 금리를 한번에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했다.
최악의 인플레 상황에서 미국인 10명 중 6명은 먹고 사는 데 급여를 전부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연봉이 10만달러(약 1억3000만원) 이상인 응답자의 36%가 급여를 먹고 사는 데 다 쓰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인플레의 원인을 한 가지로 규정할 순 없지만 고유가는 분명한 인플레의 주범이다. 국제유가가 지금은 배럴당 100달러 선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시장에서는 유가 상승세 지속에 베팅 중이다.
골드만삭스는 유가가 수개월 내로 배럴당 140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했고, JP모간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경우 유가가 38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바이든의 사우디 행은 인권 문제도 중요하지만 인플레 해소 등 국익을 우선하겠다는 결정으로 평가해야 한다.
걸프전에서의 승리로 미국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당연시됐던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한마디로 철옹성 같던 부시를 무너뜨렸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여전히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로 힐러리 클린턴에게 카운터펀치를 먹이고 승리했다. 당시 대선에서 정작 트럼프가 내세웠던 선거구호는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이다.
인권을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위대한 나라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이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바이든은 석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인플레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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