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CP 편입 후 다른 계좌에 고가 매도해 수익률 보장
이복현 원장 "너무 많은 대상에 책임 묻는 건 적절치 않아"
금투업계 "제재심 결정에 모호한 부분 있어...예의주시 중"
[서울=뉴스핌] 이석훈 기자 = 금융감독원이 하나증권과 KB증권 등 9개 사가 채권형 랩어카운트·특정금전신탁 운용 과정에서 불법 거래를 통해 일부 고객의 손익을 다른 고객에게 전가한 사실을 적발했다.
28일 금감원은 전날 열린 제재심의위원회(제재심)에서 KB증권과 하나증권에 대해 일부 영업정지 제재 방침을 정했다. 이홍구 KB증권 대표를 포함한 감독자에게는 경징계인 주의적 경고 조치가, 양사 운용 담당 임직원에는 중징계가 결정됐다.
앞서 금감원은 이들 증권사가 법인 거액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과도하게 높은 수익률을 제시했고, 수익률 달성을 위해 다른 증권사와의 연계·교체거래를 통해 특정 고객 손실을 다른 고객에게 전가한 사실을 확인했다. 연계·교체거래는 자본시장법상 자전거래 규제 등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른 증권사와 종목이 서로 다른 채권, 기업어음(CP) 등을 주고받는 거래 방식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이들 증권사는 장기(1년~3년 이상)거나 유동성이 낮은 CP 등을 편입해 상품을 판매했고, 만기 시점에는 운용 중인 다른 계좌에 고가로 매도하는 방법을 주로 활용했다. 원래 증권업계 내 관행으로 자리잡았으나, 레고랜드 사태 이후 시장 경색으로 유동성 위기가 확대되면서 이러한 방법으로 수익률을 보장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서울=뉴스핌] 이석훈 기자 = [사진=금융감독원] 2024.06.28 stpoemseok@newspim.com |
제재심 위원들은 위법적 관행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기관과 관련자들에 대한 중징계를 심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복현 금감원장도 올해 2월 열린 금융감독원 업무 계획 브리핑에서 랩·신탁 불법 관행에 대해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다만 이 원장은 당시에도 너무 많은 대상에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최고경영자(CEO) 내지 임원이 의사 결정에 관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급적 너무 많은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채권 파트 업무 담당자 중 시장을 흐리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에 대한 엄정한 제재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업계 내 관행에 징계를 내리는 이례적 사례기 때문에, 금융감독원의 입장이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중형사 관계자는 "영업정지 제재는 실질적으로는 증권사에 큰 타격을 주는 것 아니"라며 "그런데 영업정지라는 글씨 자체가 주는 경고 메시지가 상당하기 때문에,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금융 당국의 속내가 어떤지 알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도 "증권업계에서는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제재 수위가 높게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며 "보통 제재는 각 증권사 사정에 따라 달라진 것이긴 하지만, 이번 금감원의 태도가 워낙 강경하기 때문에 나머지 증권사에 대한 제재심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금융감독원은 한국투자증권과 KB증권을 제외한 7개 사에 대해서도 순차적으로 제재심을 열 계획이다. 제재심에서 결과가 확정되면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가 해당 제재안에 대한 심의를 진행, 최종적으로 징계가 결정된다.
stpoemseok@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