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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 ①정청래가 말하는 '인간 정청래'…눈물까지 보인 사연은

기사입력 : 2024년07월26일 17:33

최종수정 : 2024년07월26일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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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의 개인적 인생 여정을 조망하는 내용의 '폴리티션 스토리'가 뉴스핌 KYD(Korea Youth Dream)의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시작됐다. 

첫 번째 게스트로는 최근 정치권의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는 정청래 법사위원장(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출연했다. 

정 의원은 지난 25일 뉴스핌TV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폴리티션 스토리'에서 본인의 어린시절부터 부모님과의 추억, 학원을 운영하던 시절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 정청래'의 인생에 대해 자세히 털어놓았다. 

정청래 의원은 1965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대전 보문고와 건국대 산업공학과,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북한통일정책학과(정치학 석사)를 졸업했다.

건대 재학 중 학내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들였다. 이후 전국대학생대표협의회(전대협) 활동을 하면서 1989년 미 대사관저 점거 농성에 참여한 일로 옥고를 겪었다. 

출소 후 1992년부터 현재 자신의 지역구인 마포구 성산동에서 보습학원을 운영하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에 입성한 뒤 19, 21, 22대 총선에서 당선돼 4선 중진 반열에 올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윤채영 의원님의 출생부터 좀 먼저 들어가볼게요.

정청래 출생의 비밀?

윤채영 출생의 비밀 있으신가요? 충청남도 금산군 출생으로 알고 있고요. 의원님이 10남매 중에서 좀 의외로 막내이시더라고요. 저 막내 좀 의원님은 좀 앞장서서 맏이 역할을 하셨을 것 같은 이미지인데 의외로 막내세요.

정청래 10남매 중에 10번째 막내. 근데 호적상에는 5남매 중에 막내 큰 형님이 살아계신데 39년생 85세 둘째 형님이 53년생 사이에 다섯을 잃었어요.
예전에는 돌 지나서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 홍역이 와서 이렇게 죽고 홍역이 와서 죽고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다섯을 먼저 가슴에 묻고 저는 저희 큰형님이 장가 가서 첫 손주를 큰 형수가 가졌을 때 5개월 늦게 며느리보다 5개월 늦게 저를 임신해가지고 사실은 대전에 있는 산부인과에 가서 저를 안 낳으려고 지우려고 했는데 제가 좀 놔달라고 뱃속에서 생존권 투쟁을 열심히 하는 바람에 이것도 생명인데 안 낳으면 안 되지 하고 딱해서 저를 낳았다고 그랬습니다.

최연혁 6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은 대개 그런 스토리들이 가정마다 있는 것 같아요. 막내인 경우는.

정청래 제 아내도 10남매 중에 10번째 막내.

윤채영 좀 인연이신 것 같아요.

정청래 특이합니다.

윤채영 의원님이 금산군에서 이제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시다가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셨더라고요.
이렇게 대전으로 가신 이유가 있으세요?

정청래 원래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시골에 살다가 이제 도시로 가는데 저희 동네는 워낙 오지마을 산골 오지마을이라서 학생이 무슨 공부냐 이런 얘기를 실제로 많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토요일 일요일이 제일 싫었어요.
왜냐하면 논밭에 가서 일을 해야 되니까 정말 학교 가는 게 너무 좋았어요.
일을 안 해도 되니까. 제 기억으로는 6학년 때 중학교 1학년 때 이런 시골에서 평생 내가 썩으면 안 되겠다.
대전으로 무조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 되겠다 소위 말해서 철이 든다고 그러잖아요.
그게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최연혁 공부를 잘하신 모양입니다.

정청래 그때는 좀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중학교 때 진짜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 공부를 하잖아요.
그러면 새벽 1시 2시 3시 막 이렇게 공부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와서 전기세 아까우니까 빨리 끄고 자라 이런 얘기 들었고 또 다음 주 시험이면 이제 그 전 주 토요일날 일요일 날은 공부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밭에 가서 일하는 대신 몰래 새벽에 일어나서 옛날에는 도시락을 변또라고 그랬습니다.
일본말로 변또에다가 꽁보리밥 넣고 단무지 고추장 넣어가지고 몰래 그걸 아침에 일찍 새벽에 그걸 제가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로 도망을 가요.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4km를 또 잡으러 와요.
학생이 무슨 공부냐 일하러 가자 그리고 또 끌려가서 또 일하고 그런데 이제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저희 집이 화전민 출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집하고 아버지가 산에다가 불을 질러서 나무를 태워서 곡갱이로 일군 밭이 6천 평이 있었어요.
근데 그게 2km 정도 떨어져 있어요.
그러면 운반 수단이 지개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집에서 거름을 지어서 밭에다가 거름을 하고 또 거기서 곡식들이 나면 그걸 또 지게로 져서 나르고 저희 집뿐만 아니라 저희 동네 아이들은 다 지게질을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시골 생활이 너무 힘들고 고단하고 근데 제가 쟁기질만 안 해보고 다 해봤거든요.
쟁기질은 왜 못하냐 소가 무시합니다. 어린아이 목소리로 이리야 그러면 안 갑니다.
이랴 이러면 안 갑니다. 이랴 이래야 갑니다. 그 쟁기질만 제가 못 해봤어요.
나머지는 똥장군도 저보고 뭐 다 해봤습니다. 그런데 제일 힘든 일이 있어요.
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물꼬를 터야 돼요. 천수답이기 때문에 또랑에 있는 물을 다 논으로 이렇게 논에 물길을 내놨는데 비가 많이 오면 논둑이 터지는 거예요.
그러면 올해 농사 다 망치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전속력을 향해서 뛰어야 됩니다.
비가 막 쏟아지면 물꼬를 또랑 밖으로 터져야 돼요.
논으로 물이 못 들어오게. 조금만 늦으면 논둑이 다 터져버리니까 새벽 2시 3시에 초등학교 꼬마가 얼마나 잠이 많아요.
근데 깨웁니다. 그러면 비몽사몽간에 뛰어가야 돼요.
우산도 없이. 검정 고무신 신고 가거든요. 그럼 미끄러져서 검정 고무신이 벗겨져요.
그럼 양손에 검정 고무실을 들고 맨발로 뛰는 겁니다.
비는 막 쏟아지죠. 껌껌하죠. 그러면 가끔 가다가 뭐 병조각 이런 데 발이 찢어지기도 하고 제일 끔찍한 게 뱀을 밟을 때도 있었어요.

윤채영 맨발로 뛰어가는?

정청래 맨발로 뛰어가요. 전속력으로 뛰어가서 물꼬를 터주면 그때 이제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비를 맞고 다시 집으로 오는데 온몸에 김이 막 나요.
그러면서 이제 빗물인지 눈물인지 그랬던 적이 많죠.
지금도 가끔 집에서 잠자기 전에 누워서 그때 지게질했던 그 산길 지금은 이제 길도 다 없어졌지만 생생하게 지금도 다 기억하고 제가 만약에 그림을 잘 그리면 그걸 그림을 리얼하게 다 그리고 싶은 고단했던 나의 지게를 지고 올라갔던 길들 그려보고 싶은. 지금도 너무 선명하게 기억이 다 남아 있습니다.

윤채영 부모님이 고등학생 때 공부를 좀 잘하셨는데 어쨌든 더 좋은 대학을 가려고 의원님께서는 재수를 하신 거예요?

정청래 아니 공부를 그렇게 잘한 건 아니고 저는 초중고 문예반만 했어요.
시골이지만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 그래서 이제 책 읽고 글쓰고 좀 특이하게 좀 했어요.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이제 누나가 서울에 직장 다니고 있었는데 64권짜리 그때 뭐 금성출판사인지 어디 출판사인지 세계문학전집 64권짜리를 보내줬는데 누나가 한 10년 후에 얘기했어요.
그거 내가 보내준 거라고 그래서 그걸 이제 읽으면서 문학 소년이었어요.
제가 1번이 전쟁과 평화 부활, 톨스토이 스탕달의 적과 흑 뭐 이런 몽테 크리스토 백작 이런 책들, 도스프스키의 죄와벌 이런 책을 그때 다 읽었어요.
그리고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드 베니스상인 이런 거 다 읽었는데 시골에서는 그런 책을 읽는 게 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걸 얘기해 주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애들한테 책을 읽고 저도 모르게 이런 책은 우리 시골의 아이들도 알아야 돼.
근데 그 아이들은 책이 없으니까 내가 읽고 애들한테 얘기해 줘야지 그러다 보니까 책 읽는 습관이 그때 들었어요.
누구한테 얘기해줘야지라고 읽으면 앞에 읽었던 거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읽게 돼요.
이게 책 읽는 좋은 독서 습관이거든요.

최연혁 맞습니다.

정청래 그래서 그 습관이 중학교 때 좀 들었던 것 같고 고등학교 때는 특히 이제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지고 일주일에 시 한 편씩 썼습니다.
그래서 하고 대학 때 이제 학보사를 하게 되고 그런데 이게 이제 의정활동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렇게 글을 자꾸 쓴다는 것은 지금도 SNS는 제가 직접 다 쓰거든요.
지금 여기도 오기 전에 지금

윤채영 하나 올리셨잖아요. 거울 셀카 하나 올리셨던데요.

정청래 추경호 원내대표가 저보고 거울 보고 좀 반성 좀 하라고 그래서 실제로 거울 전신거울 앞에 서가지고 제가 사진을 찍었어요.
추경호 원내대표 건의대로 거울 앞에 섰다. 지극히 내가 정상적인데 그래서 법사위원장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하고 지금 페이스북도 하나 올리고 왔어.

윤채영 네 봤어요. 셀카 포즈는 좀 연구를 하셨던 거예요? 아니면

정청래 아니 이제 셀카 찍을 때 너무 위에서 찍거나 너무 아래에서 찍으면 안 되잖아요.
적당하게 말고 찍으셨더라고요.

윤채영 그래서 기자들 사이에서는 연구하신 거 아니냐 포즈를. 근데 의원님 문학 소년인데 또 이과 출신이시잖아요.

정청래 그 사연이 다 있어요. 사연이 있는데 제가 사실은 당연히 문과를 썼어요.
그 일대 근데 저희 학교가 6개 반밖에 없었는데 2개 반만 문과고 4개 반이 이과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은 그 구조에 맞춰서 이과 선생님 문과 선생님이 정해져 있지 않겠어요 제가 당연히 문과를 썼는데 문과는 경쟁률이 센 거예요.
이과로 다 보내야 되는 거예요. 고1 때의 담임선생님이 교량 선생님이었는데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러더니 위협을 하면서 남자가 말이야 이과를 가야지 무슨 문과를 가려고 밥 빌려 먹으려고 그러냐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무서워서 그냥 이과로 썼어요.
진짜 문과로 갔어야 되는데 고등학교 때 제가 이제 문과 체질이고 또 문과 과목은 너무 이제 공부를 제가 성적이 좋았는데 이과는 너무 하기가 싫은 거예요.
이게 재수할 때도 문과로 옮길까 그런데 이제 대학을 먼저 간 친구가 야 이과에도 문과 과목이 있다.
문과 학과가 있다. 그게 산업공학과다.
그러니까 너는 그게 원래는 공업경영학과다. 이건 완전 문과다.
그러니까 이과 문과 변경하지 말고 너는 그냥 이과로 가서 이과 속에 문과 학교를 가면 된다. 그래서 제가 산업공학과를 가게 됐어.

최연혁 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윤채영 대학가서는 그래도 잘 적응을 하셨어요?

정청래 별로 공부 안 했어요. 데모하느라고.

윤채영 가셔서 학보사를 생활했는데 근데 그 배경 들어보니까 경제적으로 좀 궁핍해서 시작을 했다고.

정청래 그렇습니다. 시골에서 저희는 최종 학벌이랄까 목표가 상고 나오는 거였어요.
대학 간다는 건 상상도 못한 거였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그 시골에 있는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 거예요.
제 등록금이 대학 1학년 때 66만 원이었습니다.
66만 원이었는데 농협 빚을 냈어. 제 등록금을 내주셨어요.
아버지가 제 기억으로는 70만 원 빚을 내서 등록금 66만 원인가를 내고 나머지 돈을 저한테 주셨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학교를 한번 가보자. 그래서 이제 대학을 와서 이제 등록을 하고 등록하면 이제 교양서적 이런 걸 받잖아요.
근데 책 살 돈이 없어요. 그래서 대학 때 제가 돈으로 4학년 때까지 책을 사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다 빌려서 보고 복사해서 보고 그래서 아마 대학 4년 졸업하면서 입학식 때 받은 책 말고 책 한 권도 못 사본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힘들었어요.
사는 게. 근데 시골에서 이제 대학을 갔는데 그래도 부모님께 기쁨과 선물을 드리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세 가지를 하고 싶었어요. 1학년 때 시골 촌놈이 왔는데 그래도 부모님께 기뻐하시도록 해야 되겠다.
그래서 과대표에 도전했어요. 입학식 직후에 그래서 제가 과 대표가 됐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편지를 썼어요. 그래서 이 시골 촌놈이 서울에 와서 어머니 아버지 과대표가 됐습니다.
되게 좋아하셨어요 과 대표가 됐어요. 그리고 학보사 기자에 제가 도전했어요.
학보사 기자를 하면 조금 월급이 나왔어요.

윤채영 얼마정도.

정청래 그리고 제가 3학년 때 5만 원인가 5만 5천 원 나오고 3학년 때는 등록금 반액이 면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1학년 때는 이제 월급이 없었고 2학년 때부터 정식 기자가 되고 1학년 때는 견습기자 취재 기사 쓰고 이렇게 쓰면 원고료를 조금씩 줬어요.
그래서 그걸로 간신히 연명을 했어요. 그리고 대학로에서 누나 직장 다니는데 자취를 같이 했는데 집에 갈 차비가 없으면 학보사 편집실에서 몰래 숨어서 자기도 하고 그리고 차비가 없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대학로까지 걸어갑니다. 그 차비를 빌리면 되는데 친구들한테 자존심상 못 빌리겠더라고.

최연혁 그렇죠.

정청래 내가 돈이 많으면 여유가 있으면 없을 때도 있으니까 빌릴 수도 있는데 워낙 맨날 없이 지내니까 차비가 없으면 차비가 없다고 돈을 차비를 빌리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하더라고.
그래서 이제 학보사도 이제 합격을 했어요. 그래도 부모님한테 또 편지를 했죠.
학보사 기자가 됐다고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가 너무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때는 제가 대학 1학년 때 문무대 2학년 때 전방 입소를 했습니다.
대학생들이 그래서 문무대에 갔어요. 문무대에 입소를 일주일 동안 했는데 5개 과가 모였는데 거기서 중대장을 뽑는다는 거예요.
누가 중대장 할 거냐고 이제 손 들었어요. 그랬더니 구령을 하라고 그러더라고.
열중 쉬어 차렷 이거 이제 중대장이 그 구령을 해야 되니까 그런데 제가 목소리가 굉장히 큽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제가 몇십 명을 다 제압합니다.
목소리로 그랬더니 열중샷 차례 열중 샷 이거 저 이거 했더니 제 목소리가 제일 컸어요.

윤채영 마이크 없이요?

정청래 그래서 제가 중대장이었어요. 문무대 나올 때 퇴교할 때 제가 최우수상도 받고 메달도 받았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제가 여름방학 때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한테 드리고 제가 5개 학과의 총 대장이었습니다.
중대장 했습니다. 그래서 메달 드리고 이렇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과대표를 하든 뭐 문무대 입소 중대장을 하든 학보사 기자를 하든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때는 그게 다였어요.
그래서 세 가지 목표를 1학년 때 다 이룬 거예요. 촌놈이 서울 생활하면서 성공적인 소프트 랜딩을 한 거예요. 일종의 나름대로 재밌게 살았어요.

윤채영 열심히 하셨던 것 같아요.

최연혁 말씀을 들어보니까 항상 부모님 아버님 말씀하시면서 항상 그 생각을 하시는데 효자이셨던 모양입니다.

정청래 효자는 아니죠. 제가 불효자죠. 왜냐하면 학생 운동한다고 4번 잡혔죠.
두 번 감옥 갔죠. 그리고 저 두 번째 감옥 갔을 때 어머니가 면회 왔다가 충격받고 3일 후에 쓰러지셔서 이제 못 걸으시고 누워 계시다가 6년 후에 돌아가시고 있기 때문에 이제 효자는 아닌데 중학교 때 계속 쓴 일기장이 지금도 있거든요.
근데 일기장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습니다. 오늘도 내가 또 일을 하러 가야 된다니 나는 공부하고 싶은데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데 일을 시킬까 공부를 안 시키고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면 나한테까지 이런 중노동을 시킬까 이런 시골을 탈피해야지.
그러면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 내가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27살 때부터는 내가 막내지만 부모님을 모셔야지 이런 일기를 계속 쓴 거예요.

윤채영 일기장 지금 집에 갖고 계신 거예요. 그거 저희 좀 보여주시면 안 돼요?

정청래 제가 이렇게 거침없이 정청래라는 책에 보면 그 일기가 쭉 이제 게재했는데.

윤채영 아 거기 있구나.

정청래 게재를 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그걸 보고 교장 선생님한테 얘는 상을 줘야 된다 그래서 없던 상을 만들었어요.
효행일기상이라고 효행일기상이 제가 한 번 받고 없어진 상입니다.
저희 중학교에서 그래서 상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선생님이 그 말씀을 하셨어요.
너는 진짜 착한 아이라고 그리고 부모님 생각을 이렇게 하냐고 너는 철이 들었다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뭐라 그럴까 삐뚤어지지 않은 게 참 다행이고 항상 이렇게 불만이 많았어요.
토요일날 일요일날 공부 못하게 하고 일 시키는 걸.
근데 이상하게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었어요.
한 번도 제가 재수할 때도 담배를 안 피웠거든요. 보통 당구치고 그렇죠 술 먹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이거 보면 실망하실까 그래서 대학교 2학년 때 담배도 처음 배웠어요.
1학년 때도 안 피웠습니다.

최연혁 문무대에 가서 많이들 피는데 말이죠. 그때도 안 핀 모양입니다.

정청래 우리 어머니가 실망하실까 봐. 그래서 그 고등학교에서 학력고사 끝나고 보통 나이트 클럽도 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저는 안 갔어요. 친구들이 막 가자는데 우리 어머니가 또 얼마나 실망하실까.

최연혁 그때는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겠고요.

정청래 친구들도 이제 돈 대주는 데도 안 갔어요.

윤채영 의원님 근데 그 교도소 생활 같은 경우에는 한 번 갔다 왔다가 두 번 갔을 때 어머니께서 굉장히 충격을 받으셨다고.

정청래 네 그렇습니다.

윤채영 두 번 가서 그러신 거예요? 아니면

정청래 이거 얘기하다가 또 눈물 날지 모르는데 강연 때 제가 많이 이제 쓰는 건데 짧게 말씀드리면 큰 형님부터 지금 살아계신 둘째 형님 사이에 다섯을 잃었고 그리고 6 25 때는 이제 대둔산이 높습니다.
산 게 즐기니까 빨치산이 많아요.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생과 사가 낮과 밤이 바뀌면서 왔다 갔다 하거든요.
굉장히 똑똑했어요. 어머니가 많이 알고 그리고 정무적 감각이 뛰어납니다.
그러니까 국군 인민군하고 똑같이 대했대요. 안 죽으려고 인민군을 도우면 국군이 와서 죽이고 국군을 도우면 인민군이 와서 또 뭐라고 하고 그러니까 그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인민군들이 생각할 때는 국군 편을 더 든다고 생각했나 봐요.
해가 뉘엿뉘엿지면 인민군들이 산에서 내려오는데 아버지를 끌고 간 거예요.
집 앞에 논바닥에서 인민재판을 했어요. 근데 사형 총살형 직결 처분을 받은 겁니다.
아버지가 그래서 저희 동네에 인민군 총살장이 있거든요.
저희 어머니가 얼마나 놀라고 울었겠어요.
그 남편 끌려간 뒷모습을 보면서 거기 가면 그다음 날 이제 시신 수습하러 가야 되고 걸어 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버지가 밤 10시쯤에 걸어서 나왔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 판단이 굉장히 정확했죠. 신발 벗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형님 아기 깨워서 업고 솥단지 하나만 딱 머리에 이고 4km를 야간 산행을 합니다.
그리고 지서에 가서 자수를 해요. 우리 남편이 인민군한테 끌려가서 인민재판 받고 총살형 선고받아서 끌려갔다.
살아서 돌아왔다. 근데 우리 남편이 목숨만은 부지하려고 인민군한테 협력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수하러 왔다. 지서에서 안 믿는 거예요.
이걸 이중 스파이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그때 했던 말 우리 남편이 신발도 벗지 않고 왔다.
그래서 어머니가 신발도 벗지 말라고 한 거예요. 순간 판단한 거예요.
그래서 신발을 실제로 안 벗고 자수하러 왔으니까 믿어준 거예요.
그래서 자수해서 살은 거예요.
저희 집이 저희 어머니는 다섯 아기를 묻으러 아버지가 이제 애를 안고 산으로 가잖아요.
묻으러 근데 아버지가 어디다 묻었는지를 한 번도 얘기를 안 했대요.
그래서 애가 어디 묻혀 있는지 어머니는 몰라요. 아버지만 아는데 아버지가 평생 비밀로 했나 봐요.
아 힘들어 이런 얘기하면. 

정청래 그러니까 이제 제 짐작에는 아버지가 왜 얘기를 안 하셨을까 그러면 거기 찾아가서 울까 봐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최연혁 여전히 그 그때의 아픔이 생생하게 아주 그대로 내 머리와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정청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서울에 있는 대학 서울대를 갔어요.
동네는 막 난리가 났고 좋아하고 막 이랬는데 제가 이제 첫 번째 수배를 받았습니다.
88년도에 조국통일 특별위원장 가자북으로 오라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그래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이제 수배를 받았는데 수배를 받으니까 학교 밖에도 잘 못 나가고 그래서 밖에 나가려면 그때 빡빡머리니까 삭발 투쟁도 하고 막 이랬으니까.
그래서 그때 가발 쓰고 다녔어요.

윤채영 아 진짜요 머리를 밀고?

정청래 가발 쓰고 안경도 끼고 꼭 여학생하고 같이 다녔어요.
이렇게 위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갔다가 일 보고 학교 들어올 때도 갑자기 툭 담 넘어서 뛰어오고.

윤채영 위원장 하던 시절 말씀하시는 거죠?

정청래 그렇게 석 달간 이렇게 수배 생활을 했는데 학교에서 연합집회가 있어가지고 한 2~3천 명이 모였는데 너무 총학생회 소파에 자니까 허리가 아파가지고 이제 온돌방에 자고 싶어가지고 3천명 연합제피가 있어서 여기에 내 몸을 숨겨서 나가면 되겠다.
근데 프락치도 몸을 숨긴 거예요. 제 뒤를 따라온 거예요.
몰랐죠 프락치가 있는지 그래서 후배 자취방에 갔는데 1시에 안기부가 덮친 거예요.
저를 덮쳐가지고 저는 이제 끌고 갔는데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기더라고요.
그리고 물부터 틉니다. 수돗물 호텔방 저는 물고문 시키는 건가 나중에 물고문은 이제 저는 안 당했는데 수건으로 눈 가리고 손 뒤로 결박하고 4시간 동안 맞은 것 같아요.
제가 지금도 이렇게 용감하게 사는 이유가 그때가 가장 인생에서 비참했던 때인데 한 10명 정도 건장한 안기부 요원들한테 이제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갔으니 얼마나 이게 공포스럽겠어요.
그런데도 제가 정신 승리를 했어요.
아프다고 울지 않기 그리고 봐달라고 사정사정하지 않기 그리고 구만 때리라고 애원하지 않기 그래서 때리고 벽에 구석에 가서 처박혀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와서 방 가운데 다시 또 앉아 있습니다. 또 때리라고.

윤채영 저는 궁금한 게 그 당시에 어떻게 그런 애국심 혹은 그 자긍심을 갖고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요. 그렇게 내 목숨까지 위협하면서.

정청래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반공소년이었거든요. 근데 이제 학보사 하면서 의식화가 된 거죠.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너무나 충격이었고 저희 세대는 다 그랬어요.
광주 5.18 항쟁 비디오 보면서 실제로 대한민국 군인들이 막 대검으로 여자들 찌르고 그런 게 적나라하게 다 나오거든요.
눈으로 볼 수가 없어요. 내가 체제 내화됐던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까지 박정희 정권이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을 학살하고 막 이랬던 정권이었던 거예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내 형제 내 누구도 다 이렇게 당할 수 있는 거잖아요.
독재 정권이라는 게 그래서 이거는 안 되겠다 이게 사명감이 생긴 거고 역사 의식이 생긴 거죠.
그래서 감옥은 이제 서울구치소에 사는데 우리 교수님 잘 아시겠지만 우리 윤 기자는 기억을 못할 수도 있고. 88년에 오공청문회 광주 청문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때 노태우 정권이 완전히 뒤로 밀려버리니까 화해의 제스처로 감옥에 있는 학생들을 다 풀어줬어요.
그래서 석방이 됐어요. 제가 그러니까 이제 석방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시골에서 인천에 있는 누나 집으로 와 있더라고요.
갔더니 어머니가 6.25 때 아버지한테 신발 벗지 마세요 했던 거하고 똑같이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신발 벗지 마라. 아니 석방돼서 왔는데 어머니가 신발 벗지 말라는 거예요.
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순간 이게 뭐지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쟁반에다가 생두부 두 모를 갖고 오더라고 이걸 먹고 신발을 벗어라 그래서 한 번은 먹었어요.
한 번은 먹었는데 두 번째는 못 먹겠더라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우시면서 입을 벌려서 그걸 다 넣으시더라고 두 번 다시 감옥 가지 마라.
그래서 두 모를 먹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또 간 거예요. 1년 후에 그러니까 불효자죠.

윤채영 그래서 부모님만 생각하시면 좀 울컥하시는 거구나.
여기서 좀 막간으로 MBTI 제가 검색해 보니까 ENFP.

정청래 맞아요.

윤채영 연예인으로 따지면 BTS에 RM이라고 리더가 있거든요. 맞는 것 같으세요?

정청래 그렇게 틀릴 것 같지는 않아요. 그게 왜냐하면 제가 이렇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야 이놈 자식아 노래 좀 그만 부르고 다니라고 근데 이제 저는 이제 막 그 테이프로 나오거든요.
카세트 테이프 라디오 낡은 라디오에 있으면 그걸 노래를 다 외워요.
제가 그래가지고 우리 집 앞에 바로 저기 산동네니까 산이 있거든요.
앞산 거기에 큰 둥구나무가 있었어요. 그럼 둥구나무 위에 올라가가지고 신곡 발표를 제가 이렇게 많이 했어요.

윤채영 신곡 발표요?

정청래 유행가 신곡 나오면 그러면 이제 다 들리거든요. 그러면 거기다 대고 막 노래를 불러요.
막 그러면 이제 동네 사람들이 막 잘한다고 박수를 치는 분도 있고 우리 어머니는 창피하다고 노래 좀 그만 부르라고

윤채영 누구 끼를 물려받으신 거예요?

정청래 모르겠어요. 그건 그래서 제가 대학교 1학년 학생운동권 하기 전까지 히트곡은 제가 다 부를 줄 알아요.
지금은 이제 잘 안 가는데 초선 때만 해도 노래방 많이 갔어요.
제가 왜냐하면 노래를 제가 한 700~800곡 정도 부를 수 있어요.
노래방 가면 아무거나 이렇게 펴고 그냥 노래를.

윤채영 제일 좋아하시는 곡이 뭐예요?

정청래 제가 원래 18번은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로인데 그걸로 하다가 너무 꺾기를 내가 많이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좀 듣기 안 좋다고 그래서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을 18번으로 하다가 이제 정치를 하면서 노래 부를 기회가 많아요.
동별로 무슨 망원동 성산동 주민 노래자랑 하고 그러면 거기에 또 tpo에 맞게 또 노래를 해야 되잖아요.
근데 이제 마을 주민들이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내 나이가 어때서예요.

윤채영 저도 좋아해요.

정청래 그래서 내 나이가 어때서를 많이 부르고 가끔 가다가 조광조에 만약에도 부르고 상황에 따라 이제 곡 선택을 달리하거든요.
하여튼 그래요. 저도 MBTI 이거 봤는데 솔직하게 적잖아요.
이렇게 그러다 보니까 ENFP가 나오는데.

윤채영 직접 MBTI 검사를 하신 거죠? 그게 나오신 거죠?

정청래 ENFP가 나왔어요.

윤채영 학원 이야기를 좀 빼놓을 수가 없어서 그 마포 성산에서 길잡이 학원을 차리셨잖아요. 왜 거기에 차리게 됐는지.

정청래 재수 때 동기가 있어요. 학원에서 이제 좀 공부 좀 했던 친구들.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대학 나오고 같이 뭘 하자 이렇게 도원결의 비슷한 걸 했어요.
3명이었는데 저는 이제 감옥 갔다 오고 그 친구도 이제 군대 갔다 오고 뭐 이러면서 사실 우연히 이렇게 만났어요.
제가 조그마한 학원을 강사를 하게 됐어요. 그때 인연이 됐던 재수할 때 알았던 선배 그리고 두 친구를 다 학원을 끌어들였어요.
근데 그 학원에서 같이 일을 못 하게 됐어요. 근데 책임지는 애들이 생긴 거예요.
그 애들 책임지려고 처음에는 공부방 이런 걸 하려다가 그게 안 돼가지고 학원을 차리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학원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또 이제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까 평이 좋고 그래서 이제 엄마들이 이제 애들을 많이 보내준 거예요.

윤채영 100여 명 정도 있었던 거예요?

정청래 처음에는 8명인가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점점 늘고 그래서 IMF 때 성장을 많이 했죠.
IMF 때 왜냐하면 IMF가 되니까 엄마들이 이제 애 학원을 못 보내겠다고 그러면 제가 학원을 오시라고 그래요.
진짜 돈 때문에 그러시냐 학원비 때문에 그렇대요.
그러면 그냥 다니시라고 그래서 제가 체크를 하라고 그랬어요.
전액 면제 반액 면제 10만 원 면제 그건 엄마가 자율적으로 선택하세요.
그대로 다 해드렸어요. 그래서 그게 한 달에 몇천만 원 됐어요.
그런데 엄마들이 이제 고맙잖아요. 그리고 미안하잖아요.
그 옆에 있는 엄마를 설득해서 한 애를 또 데리고 와 그러다 보니까 면제해준 금액의 2배가 매출액이 올라가더라고요.
IMF 97년도에 맞고 3년 동안 학원이 500% 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도 스파르타식 학원 그렇게 해서 이제 엄마들이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죠.
저 학원을 보내면 성적이 무조건 올라 실제로 그랬고요.
진짜로 엄청 올라왔고요. 우리 학원에 온다고 생각하면 애들이 이미 공부할 마음을 먹고 와요.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소문이 그렇게 나고 이미지가 돼가지고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 애들은 안 왔어요.
굳은 결심을 하고 그런 애들만 왔기 때문에 당에 이제 분위기도 그렇고 그래서 실제로 성적을 잘 냈고요.
그런데 이제 제가 학원을 하면서도 참 아까 조국 통일 이런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학원에 있는 모든 사진 걸개 그림 그림 액자 이런 건 다 백두산 천지로 통일했어요.
그래요. 민족을 생각하는 학원 큰 꿈 작은 실천의 배움터 길잡이 학원 그래서 우리는 통일을 생각하는 학원이다.
일관성 있게 제가 이제 한 거죠. 그래서 제가 사재를 털어서 7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4박 5일 휴가 기간이잖아요.
그때 중2부터 고2까지 백두산 제가 여행을 시켰습니다.
제 돈으로 애들 20명을 분단 조국의 현실을 봐라 그래서 갔다 오면 기행문도 쓰게 하고 그래서 그런 것도 했어요.
제가 왜냐하면 그리고 애들한테 정신 교육도 많이 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서 높은 지역에 가서 아랫사람 괴롭힐 생각이면 공부하지 마라 그랬어요.
제가 공부를 해서 높은 자리에 간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져야 될 사람이 많다는 거고 리더가 된다는 것이고 리더는 많은 사람들에게 솔선수범해야 된다.
그게 아니고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높은 자리 가서 아랫사람들을 괴롭힐 생각이라면 공부하면 안 된다.
그렇게 애들한테 정신 교육을 제가 진짜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원 사업을 했던 거는 굉장히 지금 생각해도 제가 좀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ycy1486@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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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해군 2030~2040년 '건함계획' 발표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해군이 2030년대부터 2040년까지 한국형 이지스함(KDDX)을 3차까지 진행해 총 18척을 확보하고, 장보고IV 사업을 새로 시작하고, 해상초계기를 추가로 도입하기로 하는 등 새로운 '건함계획'과 '해상초계 전력 계획'을 마련한 것으로 확인됐다. 해군의 이 같은 움직임은 북한이 지난 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에서 각종 전술핵 탑재 무기와 신형 전략무기 체계를 대거 공개하며 대남 위협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는 데 따른 대응 차원으로 풀이된다. 특히 북한의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과 초음속 순항미사일 2종, 그리고 5000톤급 신형 구축함 최현함의 장거리 타격 능력 강화 정황이 확인되면서, 우리 군의 대응체계와 방어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한화오션이 서울ADEX에 선보인 한국형 이지스함(KDDX) 모형. [사진=디펜스타임스 제공] 2025.10.20 gomsi@newspim.com ◆한국형 차기 이지스 구축함(KDDX) 12척 추가 건조 = 해군은 최우선으로 만재배수량 8000톤급 한국형 차기 이지스 구축함(KDDX) 추가 전력 확보에 나서기로 했다. 해군은 세종대왕급(세종대왕함, 율곡이이함, 서애류성룡함) 구축함, 정조대왕급(정조대왕함, 다산정약용함, 3번함 건조 중) 구축함 등 이지스 구축함 6척 확보와 함께 KDDX를 최대 18척까지 보유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KDDX 사업은 배 선체부터 전투 체계, 레이더 등 무장을 국내 기술로 만드는 국산 구축함 사업이다. 미니 이지스함 6척을 건조한다. 신형 군함을 도입하는 7조8000억 원 규모의 KDDX 사업은 방위사업청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진전되지 않고 있음에도, 해군이 KDDX Batch-Ⅱ, KDDXⅡ 사업을 만들어 국산 이지스함을 추가로 확보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은 한미 간 '기술 이전 문제' 때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이 19일 해군본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해군은 지난해 6월 미 해군 측에 서한을 보내 "북한 위협 대응을 위해 정조대왕급 이지스함과 SM-3/6 함대공미사일 확보 등을 추진 중이지만, 이지스함 전투력을 크게 높이는 협동교전능력(CEC) 미탑재로 초수평선, 장거리 대공표적 대응 능력이 제한되고 있다"며 대한(對韓) 수출을 요청했다. CEC는 지구의 곡면 특성을 감안, 여러 함선과 항공기에서 레이더 등으로 추적·확보된 표적정보를 고용량 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 융합·분배해서 공통 표적을 산출, 원격교전을 치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계다. 이에 대해 미 해군은 같은 해 8월 답신에서 "미 정부의 수출통제 및 기술이전 정책은 한국에 대한 CEC 수출을 지원하지 않는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미 해군은 거부의 이유로 밝힌 '수출통제 및 기술이전 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호주는 2018년 호바트(Hobart)급 방공구축함, 일본은 2020년 8번째 이지스함이자 아타고급의 개량형인 마야급 이지스함에 CEC를 탑재하도록 허용했지만, 한국에는 CEC를 판매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명백하게 밝힌 것이다. 호주·일본에는 CEC를 제공한 미국이 같은 동맹국인 한국에는 수출하지 않으려는 '이중적 태도'에 실망한 해군이 이지스함 기술 국산화를 표방하는 KDDX 추가 건조로 방향을 틀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판매 거부에 따라 해군은 2030년대 중·후반까지 미국 CEC와 유사한 '한국형 해상통합방공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선회했다. 이를 위해 국방과학연구소(ADD) 주도로 관련 핵심기술 개발을 추진할 예정이다. ADD가 개발하는 한국형 해상통합방공체계는 이지스 구축함, 해상초계기, 항공모함 등 해군 전력과의 연동, 그리고 장거리 미사일 요격체계(L-SAM) 등 첨단 무기체계에 적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산 전투체계를 쓰는 세종대왕급·정조대왕급 이지스함에선 한·미 간 체계 연동 및 통합 여부 등이 불확실해 원활한 운용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따라서 해군은 정조대왕급 이지스함 추가 건조보다는 KDDX 추가건조를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KDDX 사업은 총 개념설계→기본설계→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후속함 건조 순으로 이뤄진다. 개념설계는 2012년 당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수주했고, 기본설계는 2020년 현대중공업(현 HD현대중공업)이 따냈다. 현재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에 착수해야 하지만, 사업자 선정을 두고 양 업체 간 갈등이 심해지며 연기됐다. HD현대중공업은 기존 관례대로 기본설계를 주도한 업체가 수의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화오션은 HD현대중공업이 보안 벌점을 받은 점을 거론하며 '경쟁입찰'로 사업자를 선정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한화와 현대가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다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면서 "KDDX 사업에서 한화와 현대의 대결은 '6척 싸움'이 아니라 '18척 싸움'이기 때문에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것 같다"고 했다. 해군은 현재 추진 중인 KDDX 6척 건조 사업이 출발하고, 차기호위함(FFX) Batch-IV 사업이 끝나는 즉시 곧바로 개량형이라 할 수 있는 KDDX Batch-II 사업을 실행한다는 계획이다. 최종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적용한 KDDX-II 사업을 2035년 이후에 도입하기로 했다.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해 지난해 말 해군에 인도한 차세대 호위함(울산급 Batch-Ⅲ) 선도함 '충남함' [사진=HD현대중공업] 2025.10.20 gomsi@newspim.com ◆차기호위함(FFX) 사업 종료 후 차기호위함(FFX)-II 사업 = 한편, 해군은 기존 차기호위함(FFX) Batch-I/II/III/IV 사업을 완료한 후, 차기호위함(FFX)-II를 계획하고 있다. 해군은 FFX-II 사업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이지만, 건조시기와 구체적 제원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현재 해군은 차기 호위함(FFX) 사업으로 총 26척의 호위함(FFG)을 전력화 한다. FFX Batch-I 사업으로 인천급 호위함 6척, FFX Batch-II 사업으로 대구급 호위함 8척을 건조했고, FFX Batch-III 사업으로 충남급 호위함 6척을 건조하고 있다. 해군은 현재 차기 호위함(FFX) Batch-IV 사업으로 2023년부터 2032년까지 약 3조2500억 원을 투입, 총 6척을 건조하는 'FFX Batch-IV'(울산급 Batch-IV) 사업을 진행 중이다. 2029~2030년경 6척의 함정 모두가 해군에 인도될 예정이다. FFX 사업이 완료되면 광개토대왕급 구축함까지 모든 해역함대의 노후화된 중·대형 함정이 교체가 완료된다. ◆AI 기반의 연안초계함(OPV) 사업을 진행 = 또한 1000t급 연안초계함(OPV) 사업을 진행해, 미사일 고속함 PK-A/고속함 PK-B로 대표되는 고속함들을 보완할 계획이다. 연안초계함(OPV)은 인력 절감과 효율성을 위해 AI(인공지능) 기반의 자동화·무인화 기술이 적용된 미래형 함정이다. 1500~2200톤급으로, 기존 초계함보다 거주성 등이 향상시켜 연안 및 해상 경비, 해양 안전, 어업 지도, 해양 오염 감시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설계된다. 2020년 11월 10일 대우조선해양 거제 옥포조선소에서 진수한 중형급 잠수함 2번함 '안무함(KSS-Ⅲ, 3000톤급)'. 안무함은 2018년 9월 진수한 도산안창호함에 이은 장보고-Ⅲ급 두 번째 잠수함이다. 해군이 건조하는 '장보고Ⅳ' 잠수함도 같은 체급의 형상이다. [사진=대우조선해양] 2025.10.20 gomsi@newspim.com ◆장보고IV 사업 추진에 이어 2040년경 원잠 추진 = 한편, 해군의 수중전력인 잠수함 전력증강 계획에 대해 살펴보자. 해군은 2035년 이후 현재 장보고III Batch-I/II/III를 끝내고, '장보고IV 사업'으로 넘어간다. 최종 결론이 나오기 전이지만, 해군이 밝힌 장보고IV 사업은 그동안 2000톤급 잠수함으로 알려졌으나, 해군이 이번에 밝힌 방향은 3000톤급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보고IV 사업 이후인 2040년 무렵, 해군은 차세대 잠수함을 건조할 계획으로, 원자력 추진 기관을 탑재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P-8A 포세이돈 후속으로 한국형 해상초계기 개발 계획 = 해군은 현재 P-3C/CK와 15대와 P-8 포세이돈 6대 등 21대의 해상초계기를 보유, 휴전선 길이의 9.5배, 남한 넓이의 3.3배에 이르는 30만㎢의 작전해역에 대한 상시감시와 주요 해상교통로를 보호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해군항공사령부 전력은 현재 P-8A 포세이돈 6대를 주력으로 2030년대를 맞이한다. 하지만 해군은 이번에 기존 P-3C/CK 대체용으로 한국형 해상초계기 사업을 추진할 계획임을 분명히 했다. 지난 5월 29일 경북 포항기지에서 발생한 P-3CK 해상초계기 추락사고는 1968년산으로, 무려 57년을 운용한 노후 항공기의 위험성을 해군에 각인시켰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서울ADEX에서 선보인 한국형 해상초계기 모형. KAI는 2017년 스웨덴 사브가 제시한 '소드피시형'의 국내 개발 해상초계기를 제시하고 있다. [사진=디펜스타임스 제공] 2025.10.20 gomsi@newspim.com 해군 관계자는 "해군은 현재의 P-3CK 기종을 2030년까지 운용하고, 그 이후에 최신예 한국형 해상초계기를 도입을 개획하고 있다"면서 "사고가 난 초계기와 동형인 나머지 P-3CK 7대의 조종사 안전, 그리고 대잠전력의 공백을 막기 위해 한국형 해상초계기 도입사업을 앞당겨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만 2025년 10월 기준, 해군은 해상초계기를 해외 직도입으로 할지, 국내개발로 할지, 획득방법을 결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내년 1/4 분기에 획득방법을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는 2017년 스웨덴 사브가 제시한 소드피시형의 국내 개발 해상초계기를 제시하고 있다"면서 "KAI가 기존의 에어버스 A320 여객기를 개조하는 개발 계획에서 한 발짝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향후 해상초계기 추가 소요는 운용인력을 감안해 11대로 알려졌다. gomsi@newspim.com 2025-10-2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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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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