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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 ①정청래가 말하는 '인간 정청래'…눈물까지 보인 사연은

기사입력 : 2024년07월26일 17:33

최종수정 : 2024년07월26일 17:38

정치인들의 개인적 인생 여정을 조망하는 내용의 '폴리티션 스토리'가 뉴스핌 KYD(Korea Youth Dream)의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시작됐다. 

첫 번째 게스트로는 최근 정치권의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는 정청래 법사위원장(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출연했다. 

정 의원은 지난 25일 뉴스핌TV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폴리티션 스토리'에서 본인의 어린시절부터 부모님과의 추억, 학원을 운영하던 시절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 정청래'의 인생에 대해 자세히 털어놓았다. 

정청래 의원은 1965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대전 보문고와 건국대 산업공학과,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북한통일정책학과(정치학 석사)를 졸업했다.

건대 재학 중 학내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들였다. 이후 전국대학생대표협의회(전대협) 활동을 하면서 1989년 미 대사관저 점거 농성에 참여한 일로 옥고를 겪었다. 

출소 후 1992년부터 현재 자신의 지역구인 마포구 성산동에서 보습학원을 운영하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에 입성한 뒤 19, 21, 22대 총선에서 당선돼 4선 중진 반열에 올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윤채영 의원님의 출생부터 좀 먼저 들어가볼게요.

정청래 출생의 비밀?

윤채영 출생의 비밀 있으신가요? 충청남도 금산군 출생으로 알고 있고요. 의원님이 10남매 중에서 좀 의외로 막내이시더라고요. 저 막내 좀 의원님은 좀 앞장서서 맏이 역할을 하셨을 것 같은 이미지인데 의외로 막내세요.

정청래 10남매 중에 10번째 막내. 근데 호적상에는 5남매 중에 막내 큰 형님이 살아계신데 39년생 85세 둘째 형님이 53년생 사이에 다섯을 잃었어요.
예전에는 돌 지나서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 홍역이 와서 이렇게 죽고 홍역이 와서 죽고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다섯을 먼저 가슴에 묻고 저는 저희 큰형님이 장가 가서 첫 손주를 큰 형수가 가졌을 때 5개월 늦게 며느리보다 5개월 늦게 저를 임신해가지고 사실은 대전에 있는 산부인과에 가서 저를 안 낳으려고 지우려고 했는데 제가 좀 놔달라고 뱃속에서 생존권 투쟁을 열심히 하는 바람에 이것도 생명인데 안 낳으면 안 되지 하고 딱해서 저를 낳았다고 그랬습니다.

최연혁 6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은 대개 그런 스토리들이 가정마다 있는 것 같아요. 막내인 경우는.

정청래 제 아내도 10남매 중에 10번째 막내.

윤채영 좀 인연이신 것 같아요.

정청래 특이합니다.

윤채영 의원님이 금산군에서 이제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시다가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셨더라고요.
이렇게 대전으로 가신 이유가 있으세요?

정청래 원래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시골에 살다가 이제 도시로 가는데 저희 동네는 워낙 오지마을 산골 오지마을이라서 학생이 무슨 공부냐 이런 얘기를 실제로 많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토요일 일요일이 제일 싫었어요.
왜냐하면 논밭에 가서 일을 해야 되니까 정말 학교 가는 게 너무 좋았어요.
일을 안 해도 되니까. 제 기억으로는 6학년 때 중학교 1학년 때 이런 시골에서 평생 내가 썩으면 안 되겠다.
대전으로 무조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 되겠다 소위 말해서 철이 든다고 그러잖아요.
그게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최연혁 공부를 잘하신 모양입니다.

정청래 그때는 좀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중학교 때 진짜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 공부를 하잖아요.
그러면 새벽 1시 2시 3시 막 이렇게 공부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와서 전기세 아까우니까 빨리 끄고 자라 이런 얘기 들었고 또 다음 주 시험이면 이제 그 전 주 토요일날 일요일 날은 공부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밭에 가서 일하는 대신 몰래 새벽에 일어나서 옛날에는 도시락을 변또라고 그랬습니다.
일본말로 변또에다가 꽁보리밥 넣고 단무지 고추장 넣어가지고 몰래 그걸 아침에 일찍 새벽에 그걸 제가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로 도망을 가요.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4km를 또 잡으러 와요.
학생이 무슨 공부냐 일하러 가자 그리고 또 끌려가서 또 일하고 그런데 이제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저희 집이 화전민 출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집하고 아버지가 산에다가 불을 질러서 나무를 태워서 곡갱이로 일군 밭이 6천 평이 있었어요.
근데 그게 2km 정도 떨어져 있어요.
그러면 운반 수단이 지개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집에서 거름을 지어서 밭에다가 거름을 하고 또 거기서 곡식들이 나면 그걸 또 지게로 져서 나르고 저희 집뿐만 아니라 저희 동네 아이들은 다 지게질을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시골 생활이 너무 힘들고 고단하고 근데 제가 쟁기질만 안 해보고 다 해봤거든요.
쟁기질은 왜 못하냐 소가 무시합니다. 어린아이 목소리로 이리야 그러면 안 갑니다.
이랴 이러면 안 갑니다. 이랴 이래야 갑니다. 그 쟁기질만 제가 못 해봤어요.
나머지는 똥장군도 저보고 뭐 다 해봤습니다. 그런데 제일 힘든 일이 있어요.
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물꼬를 터야 돼요. 천수답이기 때문에 또랑에 있는 물을 다 논으로 이렇게 논에 물길을 내놨는데 비가 많이 오면 논둑이 터지는 거예요.
그러면 올해 농사 다 망치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전속력을 향해서 뛰어야 됩니다.
비가 막 쏟아지면 물꼬를 또랑 밖으로 터져야 돼요.
논으로 물이 못 들어오게. 조금만 늦으면 논둑이 다 터져버리니까 새벽 2시 3시에 초등학교 꼬마가 얼마나 잠이 많아요.
근데 깨웁니다. 그러면 비몽사몽간에 뛰어가야 돼요.
우산도 없이. 검정 고무신 신고 가거든요. 그럼 미끄러져서 검정 고무신이 벗겨져요.
그럼 양손에 검정 고무실을 들고 맨발로 뛰는 겁니다.
비는 막 쏟아지죠. 껌껌하죠. 그러면 가끔 가다가 뭐 병조각 이런 데 발이 찢어지기도 하고 제일 끔찍한 게 뱀을 밟을 때도 있었어요.

윤채영 맨발로 뛰어가는?

정청래 맨발로 뛰어가요. 전속력으로 뛰어가서 물꼬를 터주면 그때 이제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비를 맞고 다시 집으로 오는데 온몸에 김이 막 나요.
그러면서 이제 빗물인지 눈물인지 그랬던 적이 많죠.
지금도 가끔 집에서 잠자기 전에 누워서 그때 지게질했던 그 산길 지금은 이제 길도 다 없어졌지만 생생하게 지금도 다 기억하고 제가 만약에 그림을 잘 그리면 그걸 그림을 리얼하게 다 그리고 싶은 고단했던 나의 지게를 지고 올라갔던 길들 그려보고 싶은. 지금도 너무 선명하게 기억이 다 남아 있습니다.

윤채영 부모님이 고등학생 때 공부를 좀 잘하셨는데 어쨌든 더 좋은 대학을 가려고 의원님께서는 재수를 하신 거예요?

정청래 아니 공부를 그렇게 잘한 건 아니고 저는 초중고 문예반만 했어요.
시골이지만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 그래서 이제 책 읽고 글쓰고 좀 특이하게 좀 했어요.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이제 누나가 서울에 직장 다니고 있었는데 64권짜리 그때 뭐 금성출판사인지 어디 출판사인지 세계문학전집 64권짜리를 보내줬는데 누나가 한 10년 후에 얘기했어요.
그거 내가 보내준 거라고 그래서 그걸 이제 읽으면서 문학 소년이었어요.
제가 1번이 전쟁과 평화 부활, 톨스토이 스탕달의 적과 흑 뭐 이런 몽테 크리스토 백작 이런 책들, 도스프스키의 죄와벌 이런 책을 그때 다 읽었어요.
그리고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드 베니스상인 이런 거 다 읽었는데 시골에서는 그런 책을 읽는 게 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걸 얘기해 주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애들한테 책을 읽고 저도 모르게 이런 책은 우리 시골의 아이들도 알아야 돼.
근데 그 아이들은 책이 없으니까 내가 읽고 애들한테 얘기해 줘야지 그러다 보니까 책 읽는 습관이 그때 들었어요.
누구한테 얘기해줘야지라고 읽으면 앞에 읽었던 거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읽게 돼요.
이게 책 읽는 좋은 독서 습관이거든요.

최연혁 맞습니다.

정청래 그래서 그 습관이 중학교 때 좀 들었던 것 같고 고등학교 때는 특히 이제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지고 일주일에 시 한 편씩 썼습니다.
그래서 하고 대학 때 이제 학보사를 하게 되고 그런데 이게 이제 의정활동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렇게 글을 자꾸 쓴다는 것은 지금도 SNS는 제가 직접 다 쓰거든요.
지금 여기도 오기 전에 지금

윤채영 하나 올리셨잖아요. 거울 셀카 하나 올리셨던데요.

정청래 추경호 원내대표가 저보고 거울 보고 좀 반성 좀 하라고 그래서 실제로 거울 전신거울 앞에 서가지고 제가 사진을 찍었어요.
추경호 원내대표 건의대로 거울 앞에 섰다. 지극히 내가 정상적인데 그래서 법사위원장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하고 지금 페이스북도 하나 올리고 왔어.

윤채영 네 봤어요. 셀카 포즈는 좀 연구를 하셨던 거예요? 아니면

정청래 아니 이제 셀카 찍을 때 너무 위에서 찍거나 너무 아래에서 찍으면 안 되잖아요.
적당하게 말고 찍으셨더라고요.

윤채영 그래서 기자들 사이에서는 연구하신 거 아니냐 포즈를. 근데 의원님 문학 소년인데 또 이과 출신이시잖아요.

정청래 그 사연이 다 있어요. 사연이 있는데 제가 사실은 당연히 문과를 썼어요.
그 일대 근데 저희 학교가 6개 반밖에 없었는데 2개 반만 문과고 4개 반이 이과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은 그 구조에 맞춰서 이과 선생님 문과 선생님이 정해져 있지 않겠어요 제가 당연히 문과를 썼는데 문과는 경쟁률이 센 거예요.
이과로 다 보내야 되는 거예요. 고1 때의 담임선생님이 교량 선생님이었는데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러더니 위협을 하면서 남자가 말이야 이과를 가야지 무슨 문과를 가려고 밥 빌려 먹으려고 그러냐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무서워서 그냥 이과로 썼어요.
진짜 문과로 갔어야 되는데 고등학교 때 제가 이제 문과 체질이고 또 문과 과목은 너무 이제 공부를 제가 성적이 좋았는데 이과는 너무 하기가 싫은 거예요.
이게 재수할 때도 문과로 옮길까 그런데 이제 대학을 먼저 간 친구가 야 이과에도 문과 과목이 있다.
문과 학과가 있다. 그게 산업공학과다.
그러니까 너는 그게 원래는 공업경영학과다. 이건 완전 문과다.
그러니까 이과 문과 변경하지 말고 너는 그냥 이과로 가서 이과 속에 문과 학교를 가면 된다. 그래서 제가 산업공학과를 가게 됐어.

최연혁 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윤채영 대학가서는 그래도 잘 적응을 하셨어요?

정청래 별로 공부 안 했어요. 데모하느라고.

윤채영 가셔서 학보사를 생활했는데 근데 그 배경 들어보니까 경제적으로 좀 궁핍해서 시작을 했다고.

정청래 그렇습니다. 시골에서 저희는 최종 학벌이랄까 목표가 상고 나오는 거였어요.
대학 간다는 건 상상도 못한 거였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그 시골에 있는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 거예요.
제 등록금이 대학 1학년 때 66만 원이었습니다.
66만 원이었는데 농협 빚을 냈어. 제 등록금을 내주셨어요.
아버지가 제 기억으로는 70만 원 빚을 내서 등록금 66만 원인가를 내고 나머지 돈을 저한테 주셨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학교를 한번 가보자. 그래서 이제 대학을 와서 이제 등록을 하고 등록하면 이제 교양서적 이런 걸 받잖아요.
근데 책 살 돈이 없어요. 그래서 대학 때 제가 돈으로 4학년 때까지 책을 사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다 빌려서 보고 복사해서 보고 그래서 아마 대학 4년 졸업하면서 입학식 때 받은 책 말고 책 한 권도 못 사본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힘들었어요.
사는 게. 근데 시골에서 이제 대학을 갔는데 그래도 부모님께 기쁨과 선물을 드리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세 가지를 하고 싶었어요. 1학년 때 시골 촌놈이 왔는데 그래도 부모님께 기뻐하시도록 해야 되겠다.
그래서 과대표에 도전했어요. 입학식 직후에 그래서 제가 과 대표가 됐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편지를 썼어요. 그래서 이 시골 촌놈이 서울에 와서 어머니 아버지 과대표가 됐습니다.
되게 좋아하셨어요 과 대표가 됐어요. 그리고 학보사 기자에 제가 도전했어요.
학보사 기자를 하면 조금 월급이 나왔어요.

윤채영 얼마정도.

정청래 그리고 제가 3학년 때 5만 원인가 5만 5천 원 나오고 3학년 때는 등록금 반액이 면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1학년 때는 이제 월급이 없었고 2학년 때부터 정식 기자가 되고 1학년 때는 견습기자 취재 기사 쓰고 이렇게 쓰면 원고료를 조금씩 줬어요.
그래서 그걸로 간신히 연명을 했어요. 그리고 대학로에서 누나 직장 다니는데 자취를 같이 했는데 집에 갈 차비가 없으면 학보사 편집실에서 몰래 숨어서 자기도 하고 그리고 차비가 없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대학로까지 걸어갑니다. 그 차비를 빌리면 되는데 친구들한테 자존심상 못 빌리겠더라고.

최연혁 그렇죠.

정청래 내가 돈이 많으면 여유가 있으면 없을 때도 있으니까 빌릴 수도 있는데 워낙 맨날 없이 지내니까 차비가 없으면 차비가 없다고 돈을 차비를 빌리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하더라고.
그래서 이제 학보사도 이제 합격을 했어요. 그래도 부모님한테 또 편지를 했죠.
학보사 기자가 됐다고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가 너무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때는 제가 대학 1학년 때 문무대 2학년 때 전방 입소를 했습니다.
대학생들이 그래서 문무대에 갔어요. 문무대에 입소를 일주일 동안 했는데 5개 과가 모였는데 거기서 중대장을 뽑는다는 거예요.
누가 중대장 할 거냐고 이제 손 들었어요. 그랬더니 구령을 하라고 그러더라고.
열중 쉬어 차렷 이거 이제 중대장이 그 구령을 해야 되니까 그런데 제가 목소리가 굉장히 큽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제가 몇십 명을 다 제압합니다.
목소리로 그랬더니 열중샷 차례 열중 샷 이거 저 이거 했더니 제 목소리가 제일 컸어요.

윤채영 마이크 없이요?

정청래 그래서 제가 중대장이었어요. 문무대 나올 때 퇴교할 때 제가 최우수상도 받고 메달도 받았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제가 여름방학 때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한테 드리고 제가 5개 학과의 총 대장이었습니다.
중대장 했습니다. 그래서 메달 드리고 이렇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과대표를 하든 뭐 문무대 입소 중대장을 하든 학보사 기자를 하든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때는 그게 다였어요.
그래서 세 가지 목표를 1학년 때 다 이룬 거예요. 촌놈이 서울 생활하면서 성공적인 소프트 랜딩을 한 거예요. 일종의 나름대로 재밌게 살았어요.

윤채영 열심히 하셨던 것 같아요.

최연혁 말씀을 들어보니까 항상 부모님 아버님 말씀하시면서 항상 그 생각을 하시는데 효자이셨던 모양입니다.

정청래 효자는 아니죠. 제가 불효자죠. 왜냐하면 학생 운동한다고 4번 잡혔죠.
두 번 감옥 갔죠. 그리고 저 두 번째 감옥 갔을 때 어머니가 면회 왔다가 충격받고 3일 후에 쓰러지셔서 이제 못 걸으시고 누워 계시다가 6년 후에 돌아가시고 있기 때문에 이제 효자는 아닌데 중학교 때 계속 쓴 일기장이 지금도 있거든요.
근데 일기장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습니다. 오늘도 내가 또 일을 하러 가야 된다니 나는 공부하고 싶은데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데 일을 시킬까 공부를 안 시키고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면 나한테까지 이런 중노동을 시킬까 이런 시골을 탈피해야지.
그러면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 내가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27살 때부터는 내가 막내지만 부모님을 모셔야지 이런 일기를 계속 쓴 거예요.

윤채영 일기장 지금 집에 갖고 계신 거예요. 그거 저희 좀 보여주시면 안 돼요?

정청래 제가 이렇게 거침없이 정청래라는 책에 보면 그 일기가 쭉 이제 게재했는데.

윤채영 아 거기 있구나.

정청래 게재를 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그걸 보고 교장 선생님한테 얘는 상을 줘야 된다 그래서 없던 상을 만들었어요.
효행일기상이라고 효행일기상이 제가 한 번 받고 없어진 상입니다.
저희 중학교에서 그래서 상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선생님이 그 말씀을 하셨어요.
너는 진짜 착한 아이라고 그리고 부모님 생각을 이렇게 하냐고 너는 철이 들었다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뭐라 그럴까 삐뚤어지지 않은 게 참 다행이고 항상 이렇게 불만이 많았어요.
토요일날 일요일날 공부 못하게 하고 일 시키는 걸.
근데 이상하게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었어요.
한 번도 제가 재수할 때도 담배를 안 피웠거든요. 보통 당구치고 그렇죠 술 먹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이거 보면 실망하실까 그래서 대학교 2학년 때 담배도 처음 배웠어요.
1학년 때도 안 피웠습니다.

최연혁 문무대에 가서 많이들 피는데 말이죠. 그때도 안 핀 모양입니다.

정청래 우리 어머니가 실망하실까 봐. 그래서 그 고등학교에서 학력고사 끝나고 보통 나이트 클럽도 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저는 안 갔어요. 친구들이 막 가자는데 우리 어머니가 또 얼마나 실망하실까.

최연혁 그때는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겠고요.

정청래 친구들도 이제 돈 대주는 데도 안 갔어요.

윤채영 의원님 근데 그 교도소 생활 같은 경우에는 한 번 갔다 왔다가 두 번 갔을 때 어머니께서 굉장히 충격을 받으셨다고.

정청래 네 그렇습니다.

윤채영 두 번 가서 그러신 거예요? 아니면

정청래 이거 얘기하다가 또 눈물 날지 모르는데 강연 때 제가 많이 이제 쓰는 건데 짧게 말씀드리면 큰 형님부터 지금 살아계신 둘째 형님 사이에 다섯을 잃었고 그리고 6 25 때는 이제 대둔산이 높습니다.
산 게 즐기니까 빨치산이 많아요.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생과 사가 낮과 밤이 바뀌면서 왔다 갔다 하거든요.
굉장히 똑똑했어요. 어머니가 많이 알고 그리고 정무적 감각이 뛰어납니다.
그러니까 국군 인민군하고 똑같이 대했대요. 안 죽으려고 인민군을 도우면 국군이 와서 죽이고 국군을 도우면 인민군이 와서 또 뭐라고 하고 그러니까 그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인민군들이 생각할 때는 국군 편을 더 든다고 생각했나 봐요.
해가 뉘엿뉘엿지면 인민군들이 산에서 내려오는데 아버지를 끌고 간 거예요.
집 앞에 논바닥에서 인민재판을 했어요. 근데 사형 총살형 직결 처분을 받은 겁니다.
아버지가 그래서 저희 동네에 인민군 총살장이 있거든요.
저희 어머니가 얼마나 놀라고 울었겠어요.
그 남편 끌려간 뒷모습을 보면서 거기 가면 그다음 날 이제 시신 수습하러 가야 되고 걸어 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버지가 밤 10시쯤에 걸어서 나왔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 판단이 굉장히 정확했죠. 신발 벗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형님 아기 깨워서 업고 솥단지 하나만 딱 머리에 이고 4km를 야간 산행을 합니다.
그리고 지서에 가서 자수를 해요. 우리 남편이 인민군한테 끌려가서 인민재판 받고 총살형 선고받아서 끌려갔다.
살아서 돌아왔다. 근데 우리 남편이 목숨만은 부지하려고 인민군한테 협력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수하러 왔다. 지서에서 안 믿는 거예요.
이걸 이중 스파이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그때 했던 말 우리 남편이 신발도 벗지 않고 왔다.
그래서 어머니가 신발도 벗지 말라고 한 거예요. 순간 판단한 거예요.
그래서 신발을 실제로 안 벗고 자수하러 왔으니까 믿어준 거예요.
그래서 자수해서 살은 거예요.
저희 집이 저희 어머니는 다섯 아기를 묻으러 아버지가 이제 애를 안고 산으로 가잖아요.
묻으러 근데 아버지가 어디다 묻었는지를 한 번도 얘기를 안 했대요.
그래서 애가 어디 묻혀 있는지 어머니는 몰라요. 아버지만 아는데 아버지가 평생 비밀로 했나 봐요.
아 힘들어 이런 얘기하면. 

정청래 그러니까 이제 제 짐작에는 아버지가 왜 얘기를 안 하셨을까 그러면 거기 찾아가서 울까 봐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최연혁 여전히 그 그때의 아픔이 생생하게 아주 그대로 내 머리와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정청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서울에 있는 대학 서울대를 갔어요.
동네는 막 난리가 났고 좋아하고 막 이랬는데 제가 이제 첫 번째 수배를 받았습니다.
88년도에 조국통일 특별위원장 가자북으로 오라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그래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이제 수배를 받았는데 수배를 받으니까 학교 밖에도 잘 못 나가고 그래서 밖에 나가려면 그때 빡빡머리니까 삭발 투쟁도 하고 막 이랬으니까.
그래서 그때 가발 쓰고 다녔어요.

윤채영 아 진짜요 머리를 밀고?

정청래 가발 쓰고 안경도 끼고 꼭 여학생하고 같이 다녔어요.
이렇게 위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갔다가 일 보고 학교 들어올 때도 갑자기 툭 담 넘어서 뛰어오고.

윤채영 위원장 하던 시절 말씀하시는 거죠?

정청래 그렇게 석 달간 이렇게 수배 생활을 했는데 학교에서 연합집회가 있어가지고 한 2~3천 명이 모였는데 너무 총학생회 소파에 자니까 허리가 아파가지고 이제 온돌방에 자고 싶어가지고 3천명 연합제피가 있어서 여기에 내 몸을 숨겨서 나가면 되겠다.
근데 프락치도 몸을 숨긴 거예요. 제 뒤를 따라온 거예요.
몰랐죠 프락치가 있는지 그래서 후배 자취방에 갔는데 1시에 안기부가 덮친 거예요.
저를 덮쳐가지고 저는 이제 끌고 갔는데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기더라고요.
그리고 물부터 틉니다. 수돗물 호텔방 저는 물고문 시키는 건가 나중에 물고문은 이제 저는 안 당했는데 수건으로 눈 가리고 손 뒤로 결박하고 4시간 동안 맞은 것 같아요.
제가 지금도 이렇게 용감하게 사는 이유가 그때가 가장 인생에서 비참했던 때인데 한 10명 정도 건장한 안기부 요원들한테 이제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갔으니 얼마나 이게 공포스럽겠어요.
그런데도 제가 정신 승리를 했어요.
아프다고 울지 않기 그리고 봐달라고 사정사정하지 않기 그리고 구만 때리라고 애원하지 않기 그래서 때리고 벽에 구석에 가서 처박혀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와서 방 가운데 다시 또 앉아 있습니다. 또 때리라고.

윤채영 저는 궁금한 게 그 당시에 어떻게 그런 애국심 혹은 그 자긍심을 갖고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요. 그렇게 내 목숨까지 위협하면서.

정청래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반공소년이었거든요. 근데 이제 학보사 하면서 의식화가 된 거죠.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너무나 충격이었고 저희 세대는 다 그랬어요.
광주 5.18 항쟁 비디오 보면서 실제로 대한민국 군인들이 막 대검으로 여자들 찌르고 그런 게 적나라하게 다 나오거든요.
눈으로 볼 수가 없어요. 내가 체제 내화됐던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까지 박정희 정권이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을 학살하고 막 이랬던 정권이었던 거예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내 형제 내 누구도 다 이렇게 당할 수 있는 거잖아요.
독재 정권이라는 게 그래서 이거는 안 되겠다 이게 사명감이 생긴 거고 역사 의식이 생긴 거죠.
그래서 감옥은 이제 서울구치소에 사는데 우리 교수님 잘 아시겠지만 우리 윤 기자는 기억을 못할 수도 있고. 88년에 오공청문회 광주 청문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때 노태우 정권이 완전히 뒤로 밀려버리니까 화해의 제스처로 감옥에 있는 학생들을 다 풀어줬어요.
그래서 석방이 됐어요. 제가 그러니까 이제 석방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시골에서 인천에 있는 누나 집으로 와 있더라고요.
갔더니 어머니가 6.25 때 아버지한테 신발 벗지 마세요 했던 거하고 똑같이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신발 벗지 마라. 아니 석방돼서 왔는데 어머니가 신발 벗지 말라는 거예요.
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순간 이게 뭐지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쟁반에다가 생두부 두 모를 갖고 오더라고 이걸 먹고 신발을 벗어라 그래서 한 번은 먹었어요.
한 번은 먹었는데 두 번째는 못 먹겠더라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우시면서 입을 벌려서 그걸 다 넣으시더라고 두 번 다시 감옥 가지 마라.
그래서 두 모를 먹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또 간 거예요. 1년 후에 그러니까 불효자죠.

윤채영 그래서 부모님만 생각하시면 좀 울컥하시는 거구나.
여기서 좀 막간으로 MBTI 제가 검색해 보니까 ENFP.

정청래 맞아요.

윤채영 연예인으로 따지면 BTS에 RM이라고 리더가 있거든요. 맞는 것 같으세요?

정청래 그렇게 틀릴 것 같지는 않아요. 그게 왜냐하면 제가 이렇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야 이놈 자식아 노래 좀 그만 부르고 다니라고 근데 이제 저는 이제 막 그 테이프로 나오거든요.
카세트 테이프 라디오 낡은 라디오에 있으면 그걸 노래를 다 외워요.
제가 그래가지고 우리 집 앞에 바로 저기 산동네니까 산이 있거든요.
앞산 거기에 큰 둥구나무가 있었어요. 그럼 둥구나무 위에 올라가가지고 신곡 발표를 제가 이렇게 많이 했어요.

윤채영 신곡 발표요?

정청래 유행가 신곡 나오면 그러면 이제 다 들리거든요. 그러면 거기다 대고 막 노래를 불러요.
막 그러면 이제 동네 사람들이 막 잘한다고 박수를 치는 분도 있고 우리 어머니는 창피하다고 노래 좀 그만 부르라고

윤채영 누구 끼를 물려받으신 거예요?

정청래 모르겠어요. 그건 그래서 제가 대학교 1학년 학생운동권 하기 전까지 히트곡은 제가 다 부를 줄 알아요.
지금은 이제 잘 안 가는데 초선 때만 해도 노래방 많이 갔어요.
제가 왜냐하면 노래를 제가 한 700~800곡 정도 부를 수 있어요.
노래방 가면 아무거나 이렇게 펴고 그냥 노래를.

윤채영 제일 좋아하시는 곡이 뭐예요?

정청래 제가 원래 18번은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로인데 그걸로 하다가 너무 꺾기를 내가 많이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좀 듣기 안 좋다고 그래서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을 18번으로 하다가 이제 정치를 하면서 노래 부를 기회가 많아요.
동별로 무슨 망원동 성산동 주민 노래자랑 하고 그러면 거기에 또 tpo에 맞게 또 노래를 해야 되잖아요.
근데 이제 마을 주민들이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내 나이가 어때서예요.

윤채영 저도 좋아해요.

정청래 그래서 내 나이가 어때서를 많이 부르고 가끔 가다가 조광조에 만약에도 부르고 상황에 따라 이제 곡 선택을 달리하거든요.
하여튼 그래요. 저도 MBTI 이거 봤는데 솔직하게 적잖아요.
이렇게 그러다 보니까 ENFP가 나오는데.

윤채영 직접 MBTI 검사를 하신 거죠? 그게 나오신 거죠?

정청래 ENFP가 나왔어요.

윤채영 학원 이야기를 좀 빼놓을 수가 없어서 그 마포 성산에서 길잡이 학원을 차리셨잖아요. 왜 거기에 차리게 됐는지.

정청래 재수 때 동기가 있어요. 학원에서 이제 좀 공부 좀 했던 친구들.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대학 나오고 같이 뭘 하자 이렇게 도원결의 비슷한 걸 했어요.
3명이었는데 저는 이제 감옥 갔다 오고 그 친구도 이제 군대 갔다 오고 뭐 이러면서 사실 우연히 이렇게 만났어요.
제가 조그마한 학원을 강사를 하게 됐어요. 그때 인연이 됐던 재수할 때 알았던 선배 그리고 두 친구를 다 학원을 끌어들였어요.
근데 그 학원에서 같이 일을 못 하게 됐어요. 근데 책임지는 애들이 생긴 거예요.
그 애들 책임지려고 처음에는 공부방 이런 걸 하려다가 그게 안 돼가지고 학원을 차리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학원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또 이제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까 평이 좋고 그래서 이제 엄마들이 이제 애들을 많이 보내준 거예요.

윤채영 100여 명 정도 있었던 거예요?

정청래 처음에는 8명인가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점점 늘고 그래서 IMF 때 성장을 많이 했죠.
IMF 때 왜냐하면 IMF가 되니까 엄마들이 이제 애 학원을 못 보내겠다고 그러면 제가 학원을 오시라고 그래요.
진짜 돈 때문에 그러시냐 학원비 때문에 그렇대요.
그러면 그냥 다니시라고 그래서 제가 체크를 하라고 그랬어요.
전액 면제 반액 면제 10만 원 면제 그건 엄마가 자율적으로 선택하세요.
그대로 다 해드렸어요. 그래서 그게 한 달에 몇천만 원 됐어요.
그런데 엄마들이 이제 고맙잖아요. 그리고 미안하잖아요.
그 옆에 있는 엄마를 설득해서 한 애를 또 데리고 와 그러다 보니까 면제해준 금액의 2배가 매출액이 올라가더라고요.
IMF 97년도에 맞고 3년 동안 학원이 500% 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도 스파르타식 학원 그렇게 해서 이제 엄마들이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죠.
저 학원을 보내면 성적이 무조건 올라 실제로 그랬고요.
진짜로 엄청 올라왔고요. 우리 학원에 온다고 생각하면 애들이 이미 공부할 마음을 먹고 와요.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소문이 그렇게 나고 이미지가 돼가지고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 애들은 안 왔어요.
굳은 결심을 하고 그런 애들만 왔기 때문에 당에 이제 분위기도 그렇고 그래서 실제로 성적을 잘 냈고요.
그런데 이제 제가 학원을 하면서도 참 아까 조국 통일 이런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학원에 있는 모든 사진 걸개 그림 그림 액자 이런 건 다 백두산 천지로 통일했어요.
그래요. 민족을 생각하는 학원 큰 꿈 작은 실천의 배움터 길잡이 학원 그래서 우리는 통일을 생각하는 학원이다.
일관성 있게 제가 이제 한 거죠. 그래서 제가 사재를 털어서 7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4박 5일 휴가 기간이잖아요.
그때 중2부터 고2까지 백두산 제가 여행을 시켰습니다.
제 돈으로 애들 20명을 분단 조국의 현실을 봐라 그래서 갔다 오면 기행문도 쓰게 하고 그래서 그런 것도 했어요.
제가 왜냐하면 그리고 애들한테 정신 교육도 많이 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서 높은 지역에 가서 아랫사람 괴롭힐 생각이면 공부하지 마라 그랬어요.
제가 공부를 해서 높은 자리에 간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져야 될 사람이 많다는 거고 리더가 된다는 것이고 리더는 많은 사람들에게 솔선수범해야 된다.
그게 아니고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높은 자리 가서 아랫사람들을 괴롭힐 생각이라면 공부하면 안 된다.
그렇게 애들한테 정신 교육을 제가 진짜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원 사업을 했던 거는 굉장히 지금 생각해도 제가 좀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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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기자회견 대국민 사과 미흡" 71.2% [서울=뉴스핌] 이바름 기자 = 국민 10명 중 7명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 의뢰로 여론조사 전문기관 미디어리서치가 지난 11일~12일 이틀간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ARS 조사 결과 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에 대해 '미흡했다(매우 미흡+다소 미흡)'고 응답한 비율이 71.2%로 집계됐다. '진정성 있다(다소 진정성+ 매우 진정성)'고 답변한 비율은 26.4%, '잘모름'은 2.4%로 나타났다.   '윤 대통령의 사과가 미흡했다'는 남녀 모두에서 과반을 넘었다. 남성은 64.9%, 여성은 62.9%가 '매우 미흡했다'고 답변했다. '다소 미흡했다'는 각각 8.3%, 6.2%였다. 남성 71.2%, 여성 69.1%가 윤 대통령 사과에 대해 '미흡했다'는 인식을 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연령별로 보면 1020세대와 40대가 특히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40대는 87.2%가 '미흡했다'고 답변했다. 구체적으로 '매우 미흡'이 81.0%, '다소 미흡'이 6.2%였다. '진정성 있다'는 12.3%로 '다소 진정성 있다'는 5.6%, '매우 진정성 있다'는 6.8%였다. '잘모름'은 0.5%였다. 만 18세~29세도 84.8%가 '미흡했다'고 응답했다. '매우 미흡'이 78.8%, '다소 미흡'이 6.0%로 나타났다. '진정성 있다'는 14.3%로 '다소 진정성 있다'가 2.4%, '매우 진정성 있다'는 11.9%였다. '잘모름'은 0.9%였다. 50대는 '미흡했다'가 75.2%(매우 미흡 69.6%, 다소 미흡 5.5%), '진정성 있다'는 23.5%(다소 진정성 7.0%, 매우 진정성 16.5%)로 조사됐다. '잘모름'은 1.3%였다. 30대는 '미흡했다' 68.2%(매우 미흡 62.2%, 다소 미흡 5.9%), '진정성 있다' 24.3%(다소 진정성 6.9%, 매우 진정성 17.5%), 잘모름 7.5%로 나타났다. 60대는 '미흡했다' 60.2%(매우 미흡 52.0%, 다소 미흡 8.1%), '진정성 있다' 38.4%(다소 진정성 17.7%, 매우 진정성 20.8%), '잘모름' 1.4%였다. 전 연령대에서 유일하게 70대 이상만 '진정성 있다'가 48.9%(다소 진정성 23.7%, 매우 진정성 25.3%)로, '미흡했다'고 응답한 46.9%(매우 미흡 34.4%, 다소 미흡 12.6%)를 앞질렀다. 지역별로는 광주·전남·전북이 '미흡했다'가 80.1%(매우 미흡 69.8%, 다소 미흡 10.3%)로 가장 많았다. '진정성 있다'는 16.5%(다소 진정성 7.1%, 매우 진정성 9.4%), '잘모름'은 3.4%였다. 다음으로 경기·인천은 '미흡했다' 74.8%(매우 미흡 69.3%, 다소 미흡 5.5%), '진정성 있다' 25.5%(다소 진정성 8.7%, 매우 진정성 15.8%), '잘모름' 0.7%였다. 서울은 '미흡했다' 74.2%(매우 미흡 64.3%, 다소 미흡 9.9%), '진정성 있다' 24.9%(다소 진정성 7.0, 매우 진정성 17.9%), '잘모름' 0.9%였다. 강원·제주는 '미흡했다' 71.0%(매우 미흡 66.2%, 다소 미흡 4.8%), '진정성 있다' 23.3%(다소 진정성 16.2%, 매우 진정성 7.1%), '잘모름' 5.7%로 나타났다. 부산·울산·경남은 '미흡했다' 65.9%(매우 미흡 55.4%, 다소 미흡 10.5%), '진정성 있다' 30.7%(다소 진정성 12.4%, 매우 진정성 18.3%), '잘모름' 3.4%였다. 대전·충청·세종은 '미흡했다' 64.7%(매우 미흡 61.0%, 다소 미흡 3.6%), '진정성 있다' 28.0%(다소 진정성 12.9%, 매우 진정성 15.1%), '잘모름' 7.3%로 조사됐다. 대구·경북은 '미흡했다' 59.4%(매우 미흡 54.6% 다소 미흡 4.8%), '진정성 있다' 38.5%(다소 진정성 15.8%, 매우 진정성 22.8%), '잘모름' 2.1%로 가장 낮았다. 지지정당별로는 여당을 제외하고 모두가 부정적인 답변이 많았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은 윤 대통령의 사과가 '미흡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95.1%에 달했다. 이중 '매우 미흡'은 91.9%, '다소 미흡'은 3.1%였다. '진정성 있다'고 답변한 비율은 4.5%(다소 진정성 1.3%, 매우 진정성 3.2%)에 불과했다. '잘모름'은 0.4%였다. 반대로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62.6%가 '진정성 있다'고 대답했다. '다소 진정성이 있었다'는 26.1%, '매우 진정성이 있었다'가 36.7%로 집계됐다. '미흡했다'는 35.4%(매우 미흡 22.9%, 다소 미흡 12.4%), '잘모름'은 1.9%였다. 조국혁신당 지지자들은 '미흡했다' 95.8%(매우 미흡 94.7%, 다소 미흡 1.1%), '진정성 있다' 4.2%(다소 진정성 1.1%, 매우 진정성 3.1%)였다. 개혁신당은 '미흡했다' 90.0%(매우 미흡 77.9%, 다소 미흡 12.1%), '진정성 있다' 8.3%(다소 진정성 3.4%, 매우 진정성 4.9%), '잘모름' 1.7%였다. 진보당은 '미흡했다' 70.1%(매우 미흡 65.1%, 다소 미흡 5.0%), '진정성 있다' 29.9%(다소 진정성 2.3%, 매우 진정성 27.6%)로 조사됐다. 무당층은 '미흡했다' 78.6%(매우 미흡 71.3%, 다소 미흡 7.3%), '진정성 있다' 9.4%(다소 진정성 6.0%, 매우 진정성 3.4%), '잘모름' 12.0%였다. 국정지지별로는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자 중 94.8%가 '미흡했다'고 답변했다. '매우 미흡'이 87.9%, '다소 미흡'이 6.9%였다. '진정성 있다'는 3.1%(다소 진정성 2.0%, 매우 진정성 1.1%), 잘모름은 2.1%였다. 국정을 '잘 하고 있다' 응답자 중에서는 89.2%가 '진정성 있다'고 대답했다. '다소 진정성'은 32.5%, '매우 진정성'은 56.7%로 나타났다. '미흡했다'는 9.5%(매우 미흡 2.5%, 다소 미흡 7.0%), '잘모름'은 1.3%였다. 김대은 미디어리서치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은 '끝장 회견'을 예고한 것과는 달리 국민이 원하는 '속 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며 "윤 대통령의 이날 답변은 대체로 두루뭉술하고 포괄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국민 앞에 고개는 숙였지만 정작 실제 답변에선 김건희 여사를 적극 두둔해 대국민사과 효과를 '반감'시켰다는 지적과 함께 문제 인식과 처방 모두에서 '국민 눈높이'에 크게 미흡 하다보니 이번에 조사한 대통령 국정지지율과 거의 비슷하게 나왔다"고 분석했다. 이번 여론조사는 성·연령·지역별 인구비례 할당 추출 방식으로 추출된 표본을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한 무선(100%) ARS 전화조사 방식으로 실시했으며 응답률은 3.6%, 신뢰수준은 95%, 표본 오차는 ±3.1%p다. 통계보정은 2024년 1월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를 기준으로 성별 연령별 지역별 가중 값을 부여(셀가중)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right@newspim.com 2024-11-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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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지지율 26.9%…'기자회견 효과 보수결집' [서울=뉴스핌] 박성준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20%대 중후반을 기록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14일 발표됐다.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 의뢰로 여론조사 전문업체 미디어리서치가 지난 11일~12일 이틀간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2명에게 물은 결과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평가는 26.9%로 집계됐다. 부정평가는 71.5%로 나타났다. '잘 모름'에 답한 비율은 1.6%다. 긍정평가(26.9%)는 지난 조사와 달라지지 않았고 부정평가는 0.4%포인트(p) 하락했다. 긍정평가와 부정평가 간 격차는 44.6%p다. 연령별로 보면 40대에서 긍정평가와 부정평가 격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만 18세~29세에서 '잘함'은 17.1% '잘 못함' 81.1%였고, 30대에서는 '잘함' 21.3% '잘 못함' 77.2%였다. 40대는 '잘함' 10.8% '잘 못함' 88.3%, 50대는 '잘함' 24.2% '잘 못함' 75.4%로 집계됐다. 60대는 '잘함' 40.7% '잘 못함' 56.9%였고, 70대 이상에서는 '잘함' 50.8% '잘 못함' 46.2%로 집계됐다. 지역별로는 서울 '잘함' 23.6%, '잘 못함'은 73.8%로 집계됐다. 경기·인천 '잘함' 24.3% '잘 못함' 74.8%, 대전·충청·세종 '잘함' 27.3% '잘 못함' 72.1%, 강원·제주 '잘함' 14.8% '잘 못함' 74.8%로 조사됐다. 부산·울산·경남 '잘함' 33.3% '잘 못함' 65.0%, 대구·경북은 '잘함' 42.1% '잘 못함' 55.9%로 집계됐다. 전남·광주·전북은 '잘함' 18.3% '잘 못함' 79.9%로 나타났다. 성별로도 남녀 모두 부정평가가 우세했다. 남성은 '잘함' 26.2% '잘 못함' 72.6%, 여성은 '잘함' 27.6% '잘 못함' 70.4%였다. 김대은 미디어리서치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에 대해 제대로 된 해명 대신 감싸기에만 급급했고, 명태균 씨 논란에 대한 해명도 제대로 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불신만 더 키운 꼴이 됐다"며 "하지만 60-70대 이상과 영남권 등 전통적인 지지층에서는 탄핵 등의 위기감이 높아져 지지율이 오히려 상승했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며칠 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안보와 경제 등 위기감 고조로 보수층이 결집하며 추가적인 지지율 추락을 막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차재권 부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기자회견에 대해 긍정평가와 부정평가가 동시에 존재한다"며 "형식적으로나마 기자회견을 하고 사과를 했다는 점에서 만족하는 보수 지지층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지율 자체는 큰 변동이 없지만 (이번 기자회견 때문에) 부정평가한 사람들이 나중에라도 다시 긍정평가할 가능성이 더 낮아졌다"이라며 "앞으로 지지율이 개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분석했다. 이번 여론조사는 성·연령·지역별 인구비례 할당 추출 방식으로 추출된 표본을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한 무선(100%) ARS 전화조사 방식으로 실시했으며 응답률은 3.6%,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다. 통계보정은 2024년 1월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를 기준으로 성별 연령별 지역별 가중 값을 부여(셀가중)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parksj@newspim.com 2024-11-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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