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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 (상) 자선 사업가 꿈 꿨던 조경태, 정치 뛰어든 계기는

기사입력 : 2024년09월13일 16:00

최종수정 : 2024년09월13일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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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신정인 기자 = 국민의힘 6선 조경태 의원이 정치인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는 뉴스핌 '폴리티션 스토리'에 출연해 정치 입문 스토리를 공개했다.

조 의원은 13일 오후 '뉴스핌 TV'를 통해 공개된 폴리티션 스토리에서 학창시절 꿈부터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조 의원은 1968년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사하중과 경남고를 나와 부산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에서 토목공학과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대학생 때인 1988년 총선 당시 노무현 부산 동구 통일민주당 후보 선거사무소에서 자원 봉사를 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7대 총선에서 36살에 첫 금배지를 달고 22대 총선까지 부산 사하을 지역에서만 내리 6선을 하고 있다.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 [사진=뉴스핌DB]

다음은 조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신정인 기자. 이하 신)의원님 근황 먼저 여쭤볼게요. 좀 요즘 굉장히 바쁘신 걸로 아는데 어떻게 지내셨는지.

▲(조경태 의원. 이하 조)최근에 당에서 격차 해소위원회를 좀 맡아달라 해서 격차 해소위원장으로서 열심히 하고 있고요. 우리 사회가 특히 자본주의가 발달될수록 격차가 많이 벌어지고 또 새로운 영역에서의 격차들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사회적 갈등을 해소시키고 나아가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이런 위원회가 만들어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제가 좀 열심히 해서 우리 국민들 모두가 다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신)바쁘신데 혹시 여름 휴가는 다녀오셨는지

▲(조)휴가를 가려고 마음을 상당히 많이 먹었다가도 휴가철 되면 또 지역의 현안들도 많고 국민들을 위한 정책이라든지 이런 부분에서 좀 살펴야 할 게 좀 많이 있고 아직도 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가지고 제가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만큼은 휴가를 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10년 이상 아마 휴가를 안 간 것 같습니다.

-(신)10년째 휴가를 안 가신 거예요?

-(최연혁 교수. 이하 최)국민들은 휴가 떠난다고 그러면 부산으로 많이 가거든요. 부산에 계신 자체가 휴가 기간이 아닌가 또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조)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치라는 영역이 국민들 마음을 조금 더 편안하게 해줘야 하는데 제가 휴가를 가지 못하는 점부터 보면 좀 정치가 많이 국민들 마음에 쏙 들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의원님 제가 찾아보기로는 경남 고성군에서 태어나셔서 이제 부산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졸업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학창시절에 의원님 좀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조)저희 때는 이제 초등학교라고 표현을 안 하고 국민학교라고 표현했거든요. 국민학교 전부터 영유아 시절 쭉 부산 사하구, 그때는 서구였는데 신평동이라고 있어요. 신평동에서 제가 유년 시절을 보냈고 거기가 이제 부산에서도 좀 변두리다 보니까 상당히 좀 시골스러운 그런 전경들이 많이 있었거죠. 논도 있고 밭도 있었고 거기서 친구들과 또 동료들과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게 상당히 정서적으로 좋았던 것 같습니다. 가난했던 그 유년 시절이 오히려 지금 저에게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이렇게 봅니다.

-(신)혹시 의원님 어린 시절에도 꿈이 약간 정치 쪽으로 있으셨는지.

▲(조)나이가 들었을 때 이제 결혼 정년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제 꿈이 이제 자선 사업가였거든요. 그래서 이제 저의 아내한테 자선 사업가가 제 꿈이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아내가 되게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남한테 봉사하면서 살아간다는 게 그게 좀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제가 아마 중학교 때쯤 제 동료한테 제가 제 꿈을 이야기를 했대요.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제가 정치인이 꿈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정말 기억이 안 나거든요. 이십여 년 전에 당선됐을 때 이 친구가 저한테 이제 메일을 보내왔는데 '우리 경태의 꿈이 이루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때 이제 제가 '중학교 때 청소년 시기의 꿈이 정치인이었구나' 제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거든요. 간접적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은 어릴 때부터 좀 있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계기가 따로 있으셨을까

▲(조)저는 약간 이상적인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정치라는 영역을 통해서 가난하고 힘 없고 어려운 사람을 보듬어주고 도와줘야 된다 이런 직업군이 저는 정치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지금 보니까 그거는 아니더라고요. 자기들의 이익, 계파의 이익, 어찌 보면 기득권의 못된 어떤 세력들의 어떤 권력 다툼 권력화 이게 세계사적으로 다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어릴 때 생각했던 정치에 대한 어떤 교육 또는 정치에 대한 영역이 성인이 됐을 때의 정치에 대한 영역하고는 완전히 반대인 것 같아요.

-(최)제가 경력을 쭉 봤더니 토목공학을 전공을 하셨습니다.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정치에 뛰어든다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좀 상식과는 조금 멀어지는데,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세계에서 시작을 하셨는데 그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

▲(조)제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 중에 하나는 저는 문학 소년이었거든요. 약간 서정적인 부분에 가까운 사람 같았는데 이제 정부 정책에 의해서 이공계를 많이 지원하도록 그때 부추겼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제가 이과 쪽으로 이 가게 됐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생각이 좀 많았거든요. 그래서 이제 '공대에 나와가지고 건설 현장에 뛰어들면 빨리 돈을 벌 수 있겠다' 이 생각으로 그쪽 과를 선택했는데 하다 보니까 또 공부에 대한 욕심이 또 생기더라고요.
학사 과정을 마치고 석사를 마치니까 저희 학교에 선생님들께서 원서를 가져왔는데 포스코 관련된 회사의 연구원으로 신청 안 해보겠느냐 하시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대기업이고 또 연구소니까 좀 괜찮은 직장 같아 보였는데 그때 만약에 제가 포스코로 갔었으면 아마 정치인 조경태는 없었겠죠.
그래서 정치를 하게 된 계기는 앞서 제가 꿈을 이야기했을 때의 그 자선사업가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이 좀 유사하다고 보거든요.
우리 정치가 조금만 더 어떤 정치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저는 국민들이 좀 안심하고 이쪽 정치인들을 바라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최)거기서 한 가지만 더 질문을 좀 드리고 싶은 것은 자선 사업가와 정치를 아까 지속적으로 말씀을 주셨는데 부모님의 역할입니까? 아니면 본인의 어떤 그런 소년 시절에 책을 읽거나 혹은 어떤 영향을 받아서 누구를 좀 도와줘야 되겠다, 또 약자를 위해 살아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계기가 혹시 있었습니까?

▲(조)아무래도 저 같은 경우는 어릴 때 소망 중에 하나가 새 학기가 되면 새 학습지하고 새 전과가 그때 유행이었잖아요. 동아전과, 표준전과라고 있었습니다. 이게 유행했는데 보통의 집들은 새 학기니까 새 책을 주잖아요, 부모님이. 그런데 저희들 같은 경우는 가난하다 보니까 새 책을 못 주고 이제 헌책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때 어린 마음에 보면 새로운 걸 갖고 싶어 했거든요. 남의 손때가 안 묻는 새책. 근데 그걸 한 번도 가진 적이 없거든요.
저희 부모님들께서 자식을 키우면서 그 과정들을 상당히 어렵게 하다 보니까 제 이웃 세대는 좀 더 건강하고 구김살이 없는 그런 삶을,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으면 좋겠다 해서 아마 자선 사업가가 돼서 그 사람들을 좀 도와야겠다라고 정말 순진한 마음으로 한 것 같아요.

-(최) 정치를 입문하시게 돼서 첫 번째로 접했던 분이 정치인으로서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조)정치에 입문한 게 제가 28살이었거든요. 정치에 들어와서 보니까 이제 알게 된 첫 인연이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 좀 제가 마음에 들었던가 봐요. 그때부터 대통령 된 이후까지 제가 지속적인 관계를 맺게 되죠. 그래서 제가 남들은 저보고 친노라고 하는데 저는 친노가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 입장에서는 제가 제 친조가 되겠죠.
나이적으로는 그리고 훨씬 그분이 더 여러 가지 많이 갖췄지만 제가 누구 누구가 좋아서 일방적으로 쫓아가는 그런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제 나름대로의 독자 영역에서 열심히 했고 또 그분은 그분대로 독자 영역에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만난 거고 그분이 좀 도와달라고 해서 좀 도와드린 거고 뭐 이런 거거든요.

-(최)그분께 받은 어떤 정치적인 영향력이랄지 혹은 그분이 정치적 멘토로서 어떤 역할을 해주셨는지, 또 그것을 가지고 지금 어떻게 정치에서 풀어내고 계신지

▲(조)제가 96년도에 첫 정치에 들어와 왔습니다마는 그전에 참 인연이라는 게 묘하더라고요. 1988년도에 전국 선거가 있었거든요. 총선. 제가 그때 대학교 3학년인가 그랬거든요. 제 선배분이 한 분이 어느 날 저보고 부산 동구에 노무현 변호사라는 분이 있는데 한번 가서 들러보자, 그냥 단순히 들러보자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분이 누군데요?' 그러니까 인권 변호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선배가 한번 가자 하니까 한번 가봤어요. 가서 보니까 이제 선거가 한참 진행 중이더라고요.
저는 한 번 빠지면 또 좀 깊숙이 빠져들어가는 그런 성격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 달 동안 제가 거기 가서 자원봉사를 했어요.

그때만 해도 선거가 굉장히 좀 험악해서 개표하는 날도 투표함이 뒤바뀔까 싶어서 그 투표함을 지켜야 된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남아서 새벽 찬이슬 맞아가면서 꼬박 하루를 밤샘을 했답니다. 상상이 잘 안 되죠. 운동장에 앉아가지고 그때만 해도 숫자로 몇 명인지 기억이 안 납니다. 처음에는 숫자가 좀 많았다가 다 집에 가버리더라고.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끝까지 남아서 동이 틀 때까지 계속 그 구호 외치고. 이겼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노무현 그분이 이제 저희들한테 와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갈 거 아닙니까?
인사할 때가 첫 만남이거든요. 96년도니까 8년 전에. 그런데 그 이후에 저는 정치할 생각은 꿈에도 안 하다가 8년 이후에 제가 출마를 한 거예요. 그 인연은 제가 나중에 이야기를 했어요. 대통령 되시고 나서.

저는 마음으로만 갖고 있다가 96년도에 제가 같은 당을 하게 됐거든요. 또 부산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제 저하고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그런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임이 있었거든요. 일요회라고 한 열 서너명이 모이는 모임에 같은 멤버였습니다. 지금 민주당에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어요. 문재인 전 대통령도 그 멤버는 아닙니다. 제가 오리지널이죠. 노무현 전 대통령하고 인연이 그렇게 된 거고요.

영향력이라고 하면 이분이 굉장히 좀 정직한 분이잖아요. 지금 뭐 민주당에 그런 정치인이 없잖아요. 자기들이 죄를 지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되잖아요. 맞죠. 노무현 대통령은 그랬거든요. 노무현 대통령은 굉장히 양심적이었어요. 자기가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그걸 인정할 줄 아는 용감한 사람이죠. 용기 있는 사람.

근데 지금 뭐 정치인들 보면 막 생까잖아요. 죄를 지어도 안 지은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게 안 했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의 묘에 가는 분들 있잖아요. 정말 그 사람들은 망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해요. 자기들은 그런 정신은 1도 없으면서 가서 막 우는 척하고 인연도 없잖아요. 따져보면 인연도 없는데 왜 부모, 형제를 빼고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가서 울음이 나옵니까? 그건 가식과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영향을 그걸 받은 것 같아요. 겸손하되 당당해라.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개혁에 대한 마인드도 있었지만 통합에 대한 마인드도 많았거든요. 이분은 보면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어떤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를 안 했어요. 굉장히 엄격했거든요. 그런데 타인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했단 말이에요.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참여정부 때 노무현 정부 때 보면 박근혜, 그 당시에 야당이었거든요.

대연정을 제안하지 않습니까? 그 내각까지 다 책임지게 되니까 우리 같이 하자 했거든. 그걸 대연정이라고 합니다. 선거가 끝났으니까 이젠 우리가 한마음이 돼 가지고 국가 발전을 위해서 크게 같이 이바지하자. 노무현의 대연정은 노무현의 대통합과 같은 의미입니다. 근데 지금 그렇게 실천하는 정치인이 누가 있습니까? 거기 가서 읊조리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상대당하고 잘 지내보자 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이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너희들이 말할 만한, 너희들이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굉장히 솔직하고 또 정직한 분이었고. 또 이분이 가지고 있는 저하고 일치되는 철학이 뭐냐 하면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회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이거에요. 이게 정직한 사회잖아요. 저는 이게 바로 자본주의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 정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살아야지, 사기치는 사람이 잘 살면 안 되잖아요. 학생들의 입장에서도 그래요.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좋은 대학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인정받아야 되죠. 아버지, 어머니 백으로 들어가면 가짜잖아요.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고 잘 사는 사회, 이게 노무현 정신이고 조경태가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모시거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정신을 기린다고 하면 그분이 했던 그 철학을 그대로 본받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반대의 길을 가면서 그분이 인기가 있으니까, 그분이 조금 더 존경받으니까 그 이름만 따가지고 빌린다? 우리 국민들께서,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시청자 여러분께서는 꼭 그것을 명심하시고. 진짜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올리려면 내 자신이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도 타인에 대해서 타 세력에 대해서 더 존중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을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찾아보니까 의원님께서 처음에는 민주당 전신 정당에서 활동을 쭉 해오시다가 이제 보수 정당으로 오셔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혹시 그렇게 활동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

▲(조) 그 시기가 이제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고 나서 문재인 세력 일파가 당을 장악하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제가 했던 얘기가 '패권화시키지 마십시오'. 이 패권화가 굉장히 무서운 거잖아요. 패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들은 다 무시해버리거든요.
능력을 보고 사람을 뽑는 게 아니고 차별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자기들의 세력들만 막 보태기를 하고 그렇지 않은 세력들은 다 배척해버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친문 패권화를 갖다가 제가 없애라고 이야기를 주장하거든요.
우리 사회가 병들고 힘들어지는 어떤 시점들이 보면 조선시대도 그렇고 고려시대도 그렇고 패권화가 되면 일종의 독재화가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을 배격해야 된다라고 주장했는데 제 이야기를 안 듣더라고요.

저 역시도 그 권력을 더 많이 크게 쥐고 있는 사람하고 타협해서 아부하고 하면 주류로 편성될 수 있겠지만, 특권 의식을 가지고 이 세력화하는 패권 세력들하고 야합하는 것은 저는 맞지 않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뭐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제가 이제 민주당을 떠날 시기가 왔구나. 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이제 당시 새누리당으로 영입돼서. 제가 영입 1호거든요.

어차피 정치는 똑같아요. 지금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정치인의 정신이라는 것은 오로지 국민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이 당이나 저 당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생각을 하거든요. 다만 아쉬운 것은 양 정당이 아직도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에 좀 미흡하다. 이 당에서는 거의 뭐 50보 100보입니다.

아마 민주당 지지하는 사람들은 민주당 좋다라고 하지만 속살을 탁 들어가 보면 비슷한 그런 점수를 먹이면 거의 뭐 대동소이 한 50점 정도. 둘 다 그렇게 국민을 위하는 그런 마음에 있어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그러면 민주당에 있지 왜 떠났냐고 했을 때 그 패권 세력들은 저는 보기 싫더라고요. 여기는 안 그렇거든요.

-(신)제가 보니까 또 되게 화제를 모았던 게 첫 출마인 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 공보 포스터의 상반신 탈의로 되게 많은 화제를 모으셨더라고요. 누구 아이디어였는지 궁금한데요.

▲(조)저희 아내가 이제 조금 상당히 좀 진보적 사고, 앞선 사고를 한 것 같아요. 저한테 그 제안을 하더라고요. 어찌 보면 신출내기 신인이 그 인지도가 약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선거 비용도 거의 없었거든요. 당시에는 선거 홍보물을 두 번을 보낼 수 있는데 한 번은 4면짜리를 보내고 하나는 또 8면짜리를 보낼 수 있도록 돼 있거든요. 그런데 저희들은 가난한 정치 지망생이다 보니까 8면짜리 홍보물은 보낼 돈이 없었어요. 딱 한 번 4면짜리를 보내는데 좀 충격을 좀 줘야겠다. 그래서 아마 아내가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한 것 같아요.
감출 것 없는 어떤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 이런 것을 당시에 주제로 해서 그런 정신을 좀 살렸던 것 같아요.

-(최)효과는 많이 보셨습니까?

▲(조)당시에는 반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보통 지금처럼 까만 양복에 흰 와이셔츠의 넥타이 하는 정장 차림, 뭐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96년도에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유권자들한테는 가히 충격적이었고 전국적인 매스컴도 그때 탔던 걸로 기억나는데요.
새벽에 전화를 받았는데 한 40대, 50대 되신 분이신데 그 장면 보고 지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투표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던데요. 그런 효과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리고 또 하나가 유세하러 쭉 다니면 초등학교 학생들, 중학교 학생들이 그리 저를 좋아하더라고요. 아마 초중학생들이 찍었으면 제가 그때 당선되지 않았는가 생각을 해요.
저한테는 아주 좋은 어떤 기억이고, 추억이고 그런 점에서 그 부분은 제가 굉장히 좀 효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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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만 남기고... 노만석 '떳떳하게' 퇴임 [서울=뉴스핌] 김지나 김영은 기자 = 노만석(54·사법연수원 29기) 검찰총장 직무대행(대검찰청 차장검사)이 '대장동 항소 포기' 사태로 논란이 확산되자 14일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퇴임사에서도 논란의 핵심인 항소 포기 과정에서의 '윗선 압력' 의혹에 대한 진실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날 노 대행이 한 언론과 진행한 인터뷰 기사에서는 항소 포기 결정에 구조적 압력이 있었음을 시사해 퇴임 이후에도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항소 포기' 정쟁 한가운데 세워놓고...'외압 의혹'엔 입 닫은 퇴임사 이날 오전 10시 30분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노만석 직무대행의 퇴임식이 진행됐고, 약 30분 후인 오전 11시경 퇴임사가 공개됐다. 특히 관심을 모은 대목은 대장동 개발비리 사건 항소 포기 과정에서 법무부 외압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노 직무대행이 퇴임사를 통해 해당 의혹의 진실을 밝힐지 여부였다. [서울=뉴스핌] 김학선 기자 =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 항소 포기 논란 끝에 사표를 낸 노만석 검찰총장 권한대행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비공개 퇴임식을 마치고 차량을 타고 대검 청사를 나서고 있다. 2025.11.14 yooksa@newspim.com 하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은 퇴임사에 없었다. 항소 포기와 관련해 퇴임사에서 언급된 부분은 "최근 일련의 상황에 대하여 검찰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검찰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저 스스로 물러나는 만큼, 일각에서 제기되는 검사들에 대한 징계 등 논의는 부디 멈추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항소 포기 과정과 관련된 내용은 공식적으로 공개된 퇴임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전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상황과 자신의 입장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됐다. 인터뷰에서 노 대행은 "정권하고 검찰이 방향이 같았으면 무난했을 텐데 솔직히 지금은 (정권과 검찰이) 완전히 역방향"이라며 "검찰청을 폐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결이 다른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법무부가 항소 포기를 압박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모든 것은 나의 결정"이라고 밝혔다. 노 대행은 "윗선의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를 경우 선택지는 끝까지 맞서 싸우든가 받아들이든가 딱 두 가지"라며 "(윗선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건 내 생각이고 내 결정이 됐기 때문에 이제 와서 외압을 받았다는 건 우스운 이야기"라고 말했다. 윗선에서 항소 포기를 요구했고 자신은 항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생각이 달랐지만, 끝까지 맞서 싸울 수 없었다는 점을 내비친 대목이다. 노 대행은 또 자신의 결정은 조직을 위한 일로 떳떳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표를 쓴 날 아침 출근길에 왜 지하가 아니라 기자들이 모인 출입문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아느냐"고 반문하며 "조직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고, 그래서 떳떳했기 때문에 정문으로 출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퇴임식에서도 노 대행은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고 퇴청했다. ◆ 與 이참에 '검찰파면법' 강행... "내부 우려를 항명으로 보는 것 안타까워"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더불어민주당 문금주•백승아•김현정 원내대변인(오른쪽부터)이 14일 국회 의안과에 검찰청법•검사징계법개정안을 제출하고 있다. 2025.11.14 pangbin@newspim.com 노만석 대행은 스스로 '대장동 항소 포기'에 책임을 진다며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항소 포기 외압 논란이 정쟁으로 번진 만큼 검찰 조직은 외풍에 더욱 크게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곧바로 검찰총장을 포함한 검사를 탄핵 절차 없이 일반 공무원처럼 파면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검찰청법 개정안('검사 파면법')을 발의했다. 민주당은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한 검사들을 '정치검사'로 규정하며 '검사 힘 빼기' 입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7일 노만석 대행이 서울중앙지검 지휘부와 대장동 사건 수사·공판팀의 항소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항소 불허 지휘를 한 이후, 전국 검사장 18명은 노 대행에게 항소 포기 경위를 설명하라고 요구했고, 참모진인 대검 부장(검사장)들까지 노 대행을 찾아가 사임을 요구한 바 있다. 노 대행은 이에 대해 퇴임사에서 "검찰 구성원들이 검찰의 기능과 정치적 중립성 등에 대한 전반적인 우려를 내부적으로 전한 것임에도, 이를 항명이나 집단행동으로 보는 일부 시각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는 조희영 전주지검 인권보호관이 글을 올려 "검사의 징계를 일반 공무원보다 엄격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라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며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대한 검찰 내부 반발을 '정치 검사들의 항명'이라고 규정하고, '검사들의 반발을 가용한 법적·행정적 수단을 총동원해 저지·분쇄하겠다'며 발의한 법안이 '검사 파면법'이라고 한다"고 비판했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유사 입법으로 검사 파면을 강화해도 실질적으로 검찰 업무의 성격상 파면 요건에 해당할 만한 사례가 많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조직 독립성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위축될 수 있다"면서 "이번 법안은 당장의 정치적 시그널이나 검찰 견제 성격이 강하고, 실무적으로는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검찰의 반발을 무조건 정치적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우려했다.  abc123@newspim.com 2025-11-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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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왕수복, 광대 조건 다 갖춘 인물"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신개념 국악 방송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의 2-1편이 19일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스팟(K·SPOT)'을 통해 공개됐다. 앞서 제1화에서는 올해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준비됐다. 제1화 '광복'에서는 제1편 '작금'을 시작으로 2편 '김구, 판소리 배우다', 3편 '이승만과 아리랑', 4편 '광복군'이 공개됐다. 제2화는 '기생'을 주제로 다루며, 이날 2-1편에서는 '왕수복, 기생이 되다'를 주제로 한 내용이 공개됐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 제2-1편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변상문. 2025.11.13 alice09@newspim.com 왕수복은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나 2003년 사망했으며, 조선 민요를 세계에 알렸던 기생이기도 하다.왕수복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성격은 쾌활하고 명랑했다고 한다. 당시 잡지 '삼천리'에서는 '왕수복의 목소리가 청아했다',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를 잘 표현했다'고 평했다. 평안남도 강동군 입성면 남경리에서 태어난 왕수복은 , 화전을 일구는 농사꾼의 4남매 중 셋째다. 아버지가 이름을 '성실'로 지었으나 할머니가 '수복'으로 바꾸었고, 훗날 불같은 사랑을 나눈 소설가 이효석은 왕수복을 '실'로 불렀다. 변사로 나선 변상문 이사장은 왕수복에 대해 "그 당시 언론에서 표현하기를 '목소리가 청아했다',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정서인 한을 아주 잘 표현했다'라고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7살 어린 나이에 부잣집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주는 일을 했다. 그때 풍금 소리를 듣고 마음 속에 내재된 소리를 하게 되고, 이를 듣게 된 선생님의 추천으로 명륜 여자 공립 보통학교에 다니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 제2-1편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변상문. 2025.11.13 alice09@newspim.com 변 이사장은 "가난해서 3년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이후 어머니한테 기생을 권유받고, 기생 권번에 입학하게 됐다. 그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소리'였다. 가곡, 민요, 시조, 판소리 등을 배웠다"고 소개했다. 최한이 소리꾼은 "정가(가곡·시조), 민요, 판소리 등이 전통음악의 3대장이다. 저는 국악 중·고등학교를 통해 정가를 배웠는데, 변사님은 알고 계시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변 이사장은 "시조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구 장단에 맞춰서 부르는 것이고, 삼현육각 제대로 깔고 부르면 가곡이 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최 소리꾼은 "'가난'이라고 말하신 것은 개그인 걸 알고 있다. 삼현육각 편성 유무에 따라 정가가 나뉘기도 한다"라며 "시조는 한시와 고시를 가지고 운율을 붙여서 부르는 노래로, 사랑방 음악이라고도 불린다"고 설명했다. [서울=뉴스핌] 이지은 기자 = '최한이·변상문의 작금작금' 제2화 제2-1편이 공개됐다. 본편은 종합뉴스통신사 뉴스핌TV의 유튜브 채널 '뉴스핌TV'와 'K·SPOT'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맨 왼쪽부터 최한이, 변상문. 2025.11.13 alice09@newspim.com 이어 "맑은 소리는 경기 민요, 한의 정서는 판소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진도 아리랑' 한 구절을 가창했다. 그러자 변 이사장은 "우리 음악은 애이불비(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않다는 뜻)하고 낙이불류(즐거워도 지나치게 들뜨지 않다라는 뜻)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절제의 미악이 바로 우리의 소리"라고 정의했다. 또한 변 이사장은 "왕수복은 이렇게 노래뿐만 아니라 춤, 거문고, 가야금, 해금 등 악기도 배웠다"고 말했다. 이에 최한이 소리꾼은 즉석에서 가야금 연주를 선보였다. 이후 최한이는 광대(조선 말 소리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에 얽힌 판소리를 가창하며 "광대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인물치레, 두 번째 말 잘하는 사설치레, 그리고 다음이 득음이고 춤"이라며 "왕수복은 이를 다 갖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alice09@newspim.com 2025-11-1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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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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