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수(문학박사, 강릉원주대 교수, 탄전문화연구소장)
[태백=뉴스핌] 막장이라는 단어는 광산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광부들이 석탄을 채굴하는 작업의 현장을 가리킨다. 이곳은 더이상 삶에서 물러날 곳이 없는 광부들이 직접 석탄 채굴에 나서는 가장 위험한 장소다. 광부들이 '내 아들은 광부 만들지 않고, 내 딸은 광부 마누라 만들지 않겠다'고 소망하는 것도 막장의 두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도계광업소 '동부좌2C 좌연' 막장 현황(2024년 5월 3일).[사진=정연수 교수] 2024.10.07 onemoregive@newspim.com |
생명을 걸고 막장을 뚫는 광부에게 막장이란 단순한 물리적 장소의 의미를 넘어선다. 하여, 우리는 광부의 노고와 희생을 기리지는 못하더라도, 광부에게 상징적이자 현실적인 작업 막장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종교가 있건 없건, 타인의 종교적 제단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막장은 광부에게 있어 종교적 제단보다 더 성스러운 곳이며, 갑방·을방·병방(지금은 갑을 2교대 작업) 3교대 돌아가며 만나는 작업장이다. 모든 일은 막장에서 시작하여 막장에서 끝이 난다. 이토록 중요한 '막장'의 개념을 우리 사회가 뭉개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이 숭고한 의미를 담은 '막장'을 왜곡하여 사용하고 있다. 비윤리적이거나 극단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막장'을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TV 드라마의 불륜이나 가족 간의 극한 갈등, 사회의 충격적인 사건 등을 묘사하면서 '막장'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상황, 혹은 더 나아가 파국에 이른 사건을 지칭할 때 '막장 드라마'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신문에서도 사용할 만큼 일상적 용어로 등장했으니, 여간 속상한 게 아니다.
국어사전이 명시하고 있는 원래의 '막장' 의미와 전혀 상관없는 어휘를 언론까지 사용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다. 무지를 탓하는 것에 끝날 일이 아니라 광부에 대한 모욕을 당장 중단하라고 분노하려 것이다. 막장에서 생사를 걸고 일하는 광부들의 노고와 숭고한 정신을 모욕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분노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진짜 막장을 방문해 보았거나, 막장에서 생사를 걸고 일하는 광부의 숭고한 작업에 대해 한 번쯤이라도 관심을 기울여보았다면 그런 말을 못 쓸 것이다. 만약 농부들이 정성 들여 일군 '논'이나 '밭' 혹은 어부들의 '어장'을 불륜이나 난장판의 끝판을 표현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면 어떨까? 농부와 어부들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들게 일한 노동 현장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길 것이다.
농촌이나 어촌으로 갈 것도 없이, 삼성이나 현대의 어느 공장이나, 공무원이 일하는 시청이나 구청의 사무실을 그렇게 부른다고 상상해보라. 성당이나 교회, 사찰의 제단을 그렇게 부른다고 상상해보라. 광부의 막장을 TV의 불륜 따위에 빗대고, 막 나가는 정치인의 언사 따위에 빗대어 사용하는 우리 사회야말로 난장판이 아닐까? 남의 작업장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 예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광부를 산업전사라고 예우하지 않아도 좋지만, 한때 국가권력이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붙여놓은 찬사가 산업전사이지 않았던가. 산업전사라 칭하던 광부의 작업장을 몰상식하거나 낯뜨거운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너무 무례한 행위이다.
광부가 산업전사였다는 것을 몰랐고, 순직한 광부를 위해 대통령이 '산업전사위령탑'이라는 친필 휘호까지 써서 대형 탑을 세웠다는 것을 몰랐더라도 광부의 작업장까지 함부로 대하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언사이다.
만약 알면서도 '막장'을 그따위 불륜 드라마나 낯뜨거운 사회현실에 비유했다면 광부에 대한 예의가 없어도 한참 없는 것이다. 'TV 드라마의 난장판'을 보며 혀를 끌끌 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막장'이라고 칭하는 당신이야말로 그 드라마의 난장판보다 더 파렴치한 인간인 것이다.
'막장'이라는 단어가 이런 방식으로 오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광부들의 삶과 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와 공감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준다. 탄광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광부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막장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꽃의 생애를 모른다고 함부로 꺾을 일은 아니며, 강아지나 고양이의 생태를 모른다고 그들의 목줄을 함부로 움켜쥘 일은 아니다. 광부가 얼마나 깊은 지하에서 노동하는지 모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많은 탄가루를 흡입하는지 모르더라도 그들의 작업장인 막장은 존중해야 한다.
1970~1980년대에 해마다 평균 182명이 탄광에서 숨져간 사실을 모르더라도, 2000년대 들어서도 진폐증으로 광부가 해마다 300명씩 죽어간다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그들의 작업장인 막장은 존중해야 한다. 우리 한국 사회는 세월호와 이태원의 아픈 사건을 겪으면서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노란 리본이 상징하듯 억울한 희생에 대해 경의를 표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도 생겨났다. 탄광에선 세월호 한 척에다 이태원의 질식하는 골목을 해마다 막장에다 묻으면서 견디어왔다. 태백· 정선·영월·문경·보령·화순 등 탄광촌마다 세워진 산업전사위령탑을 찾아와 숨진 광부를 조문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막장에 대해선 경건한 마음을 지녀야하지 않을까? 아니 그건 없더라도 최소한 타인의 작업장에 대한 존중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도계광업소 본관 옆에 있는 도계농협 앞에 세워진 '석탄산업전사 안녕 기원비'는 더는 광부들이 죽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도계주민들이 세운 기원비이다. 막장으로 들어가는 광부들을 위해 '안녕 기원비' 앞에서 옷깃은 여미지 않더라도 능멸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막장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일을 한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하루하루 석탄을 캐는 그들의 노동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막장'이라는 용어가 오용되면서,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행태는 광부들의 삶과 노동에 대한 경시로 이어진다.
'막장'이라는 단어의 오용을 더 방치하다가는 석탄 산업 종사자와 석탄산업 자체에 대한 멸시로 이어질 수 있다. 단어를 사용할 때는 그 본래의 의미를 새겨야 한다. 단어는 그 자체로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바,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석탄 산업이 국가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때는 연탄 한 장에도 고마워하고, 서울지역 부녀회까지 나서서 선물을 들고 탄광에 위문 방문까지 했잖은가. 1989년 석탄합리화로 석탄 산업은 사양길을 걷고 있으며, 2025년이면 도계광업소 폐광으로 대한석탄공사까지 문을 닫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석탄 산업이나, 광부들의 노동이 경시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광부가 일하는 '막장'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광부가 이룬 성과와 노동을 평가절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계광업소 도계갱 2사갱 끝부분 권립을 지나면 '막장현황'이란 커다란 간판이 나온다. 표지판의 '도면'항목에는 막장의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2024년 5월 3일 입갱하던 날에는 3명의 광부가 막장에서 작업 중이라는 수치까지 적혀 있었다. 한 개의 막장에는 보통 2~5명의 광부가 일하고 있다.
한때 장성광업소의 경우에는 6천 명이 종사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막장이 있었겠는가. 산업전사로 불리면서 한국의 산업화를 위한 에너지를 생산하던 광부, 도계광업소 광부는 지금도 수직 563m 지하에서 생사를 넘나들면서 일하는 광부의 작업현장이 막장이다.
바다 수면보다 몇백 미터 더 내려간 깊이의 막장에서 일하는 광부들이다. 2024년 폐광한 장성광업소 광부들은 수직 1천 미터 더 깊은 곳에서 일하던 광부들이었다.
'막장'이라는 단어의 오용은 그 자체로 광부들을 무시하는 행위다. 우리는 광부들이 산업에너지원을 위해 감수했던 위험과 헌신을 기억하며, 그들의 노동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예전에 연탄 난방으로 따뜻한 겨울을 나게 했고, 오늘의 울창한 산림으로 산림휴양이나 등산 즐거운 것도 모두 광부의 공로이다.
우리 사회가 소방관이나, 군인, 혹은 의료진의 헌신을, 택배노동자의 수고를 존중하듯, 광부의 노고도 존중해야 한다. 광업소가 문을 닫고 막장이 역할을 잃고, 모든 갱도가 폐쇄되더라도 노동 현장으로서의 '막장'은 지켜져야 한다.
TV 드라마의 극단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데 광부들의 숭고한 작업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 언론이나 지식인층에서는 '막장'이라는 단어를 대신할 다른 표현을 찾아야 한다. 조어를 만들기 전에는 '난장판'이나 '끝판' 같은 단어로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한때 퇴폐적인 목욕탕을 '터키탕'으로 부르다가 '터키(튀르키예로 개명)'란 나라로부터 항의를 받고서야 증기탕으로 개명한 적이 있다. '막장'을 향한 우리 사회의 비열한 표현 역시 당장 중지되어야 한다. 그것이 산업전사로 불리던 광부, 산업사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광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2024.10.07
정연수(문학박사, 강릉원주대 교수, 탄전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