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4구역 건축물 높이 상향에
국가유산청 "세계유산 훼손 우려" 강공
서울시 "과도한 규제, 대법 판결도 서울시 승소"
세운4구역 주민들 '한숨'…"사업 지연 언제까지"
[서울=뉴스핌] 정영희 기자 = 서울 도심 재개발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세운4구역을 두고 국가유산청과 유네스코, 서울시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여파가 확산되고 있다. 서울 신규 아파트의 80% 이상이 정비사업을 통해 공급되는 상황에서, 상징성이 큰 재개발 사업이 장기 표류할 경우 주택 공급 부족 문제가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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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세운4구역 재개발 정비계획 변동 현황 [그래픽=AI 활용] |
◆ 종묘 옆 고층 오피스텔?…국가유산청 "승인 멈춰" vs 서울시 "문제 안 돼"
19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세운4구역 주민대표회의는 최근 입장문을 내고 정부가 재개발을 막으면 손해배상 청구 등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건은 지난달 30일 서울시가 세운4구역 정비구역 결정(변경) 및 지형도면을 고시하면서 시작됐다. 건물 최고 높이를 기존 71.9m에서 141.9m로 상향한다는 내용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사실상 고도 제한을 풀겠다는 조치에 국가유산청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세운4구역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종묘 정전 왼쪽 상부 시야에 건축물이 노출돼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훼손될 것이란 주장이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지난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종묘 앞에 세워질 높은 빌딩은 서울 내 조선왕실 유산들이 수백 년간 유지해 온 역사문화경관과 종합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것"이라며 "유네스코가 종묘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때 '경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근 지역 고층 건물 인허가는 없음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말했다.
유네스코 또한 행동에 나섰다. 전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가 송부한 공식 의견서가 국가유산청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문서에는 세운4구역 고층 개발로 세계유산인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다는 점과 이로 인한 세계유산영향평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권고가 담겼다. 서울시에는 자문기구의 긍정적 검토가 끝날 때까지 세운4구역 관련 사업 승인 중지를 요구했다.
서울시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계유산은 종묘 내에 있는 정전 그 자체와 종묘제례악 같은 콘텐츠(무형유산)가 핵심"이라며 "그 앞에 건물이 지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판단 요소인 것처럼 선동하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서울시의회 시정질문에 출석해 세운4구역 재개발 시뮬레이션 3D 이미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오 시장은 "세운4구역은 정전의 시야각 30도 범위 밖에 위치해 경관을 크게 훼손하지 않아 종묘의 가치와 정전의 건축학적 아름다움이 저해될 일이 없다"며 "영향평가의 경우 법적으로 평가 대상 지역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종묘는 유산구역으로만 지정된 상태다. 문화재의 가치를 보존하고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 행위 제어가 가능한 완충구역으로는 설정되지 않았다. 만일 완충구역이 되더라도 종묘에서 100m 이내의 땅만 해당할 확률이 높은데, 세운4구역은 180m 밖에 있어 영향평가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국가유산청 서울시의회 사이 조례 개정 소송에서 국가유산청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것도 서울시의 논리적 기반이다. 이달 6일 재판부는 문화유산 인근 건설공사 제한을 완화한 시의회의 조례 개정이 위법하다며 의결 무효 소송을 낸 국가유산청에게 패소 판결을 했다. 협의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 20년째 멈춘 세운4구역 개발… 전문가 "균형점 찾아야"
국가유산청과 서울시 간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실질적인 피해자는 세운4구역 소유주들이다. 해당 사업지는 2004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경관 보존 요구와 사업계획 변경 등 다양한 변수가 겹치며 20년 가까이 사업이 지연돼 왔다.
사업시행계획 인가를 받기 위해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의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수차례 거쳤지만, 번번이 문턱을 넘지 못했다. 결국 2018년에야 최고 높이 71.9m를 기준으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이주·철거까지 마쳤지만 매장문화재 조사에서 다시 시간이 소요되면서 첫 삽을 뜨지 못했다. 주민대표회의 관계자는 "2009년에 세입자를 모두 이주시켜 월세 수입마저 끊겼고 생활비를 대출에 의존하는 극한 상황"이라며 "매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금융비용만 200억원이며 매달 20억원 이상을 이자로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누적 채무가 7250억원에 이른다"며 "정비계획 변경 추진으로 2023년 3월 이후에만 600억원 넘는 금융비용이 누적됐다"고 토로했다.
사업비는 여전히 불어나고 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9월 건설공사비지수는 131.66으로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인건비가 오르면서 지수를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된다. 소유주들은 오락가락 행정 때문에 투입 비용이 더 늘어날까 걱정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번 갈등 해결 여부에 따라 문화재 문제를 끼고 있는 서울 정비사업지에 직·간접적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지난 8월 서울 영등포구 신길10구역 남서울아파트 재건축 현장에서 착공 직전 구석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층이 발견돼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지난해 10월 분양한 서울 송파구 '잠실래미안아이파크'(잠실진주 재건축)도 2021년 11월 착공과 동시에 백제시대 집터와 저장구덩이가 대거 발굴되면서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문화재청이 학술적, 역사적 가치를 위해 현지 보존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송파구청이 조합과 문화재청간 이견을 좁히는 데에만 1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이로 인한 정비사업 지연은 서울 전반 공급 물량의 변동 요인이 될 수 있다. 지난해 서울에서 공급된 38개 아파트 단지 중 29개 단지(76.3%)가 정비사업을 통해 나온 물량이다. 가구 수 기준으로는 2만6228가구 중 85.5%(2만2426가구)에 해당한다.
앞으로의 전망도 밝지 않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임대 제외)은 2026년 1만7687가구, 2027년 1만113가구, 2028년 8337가구로 갈수록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직전 3년(2023~2025년) 8만7515가구와 비교해 58.7% 급감하는 수준이다. 세운4구역처럼 도심 핵심지의 대형 사업이 문화재 규제, 인허가 갈등 등으로 줄줄이 지연될 경우 공급 공백이 한층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문화유산 보존과 도시 정비사업 사이의 균형점을 찾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보존 아니면 개발'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한쪽만 밀어붙인다면, 역사를 갖춘 도시인 서울의 매력과 주거 안정이라는 두 목표를 모두 잃을 가능성이 있어서다.
김태환 국토연구원 연구원은 "역사문화환경 보존과 정비사업을 함께 추진하려면, 개별 사업장에만 부담을 떠넘기지 않는 지속가능한 재원 확보가 중요하다"며 "타 부처 사업과의 연계, 중앙정부 차원의 예산 지원 등 다각적인 재원 조달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은형 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도지구 완화 같은 민감한 이슈일수록 구도심·신도심, 지역별 특성을 고려해 폭넓은 논의를 거쳐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chulsoofriend@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