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 김영훈 기자] 재봉사에서 시작해 2012년 포브스 중국 부호 19위에 오른 저우청젠(周成建ㆍ48) 미터즈ㆍ본위의 회장은 중국 의류업계의 신화와 같은 존재다.
중국 대표 캐주얼 브랜드인 미터즈ㆍ본위는 이렇다할 로컬 의류 브랜드가 없는 중국에서 세계적인 캐주얼 브랜드 지오다노, 유니클로 등과 나란히 경쟁하고 있는 중국 의류업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저우 회장은 1965년 저장 리수이(麗水) 칭톈(靑田)현에서 태어났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어린나이에 재봉 기술을 배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최고 성적으로 현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농촌출신 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는 어린시절 열등감에 시달렸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살았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도 딱 두 가지 일만 한다. 하나는 좋아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인정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며 어린시절의 상처를 토로한 바 있다.
회사 이름을 미터즈(Meters)라고 지은 것도 촌스러운 이미지를 떨칠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맨주먹으로 시작해 흥했다가 망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 오뚜기 창업가다. 저우청젠은 고교를 졸업하고 17세에 고항에 의류 단추공장을 세웠다. 제품을 팔러 전국을 누비다 장시(江西)성에서 한 무역업체 사장을 만나 30만위안짜리 주문서를 받으면서 성공하는 듯 했지만, 이 행운은 그를 결국 파산으로 내몰았다. 원단 불량으로 의류 수출이 퇴짜 맞으면서 하루아침에 30만위안의 빚을 지게 됐다.
하지만 저우 회장은 수중에 남아있던 9000위안을 가지고 다시 시작해 재기에 성공했다. 주문이 넘치면서 잠도 자지 못하는 일상이 계속됐다.
당시만 해도 양복이 대세였던 중국 의류시장에서 그가 캐주얼 브랜드로 전향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실수로 짧게 재단한 양복 소매에 다른 천을 덧대 새로운 스타일의 캐주얼을 만들어 냈는데 이게 인기를 끌면서다. 미터즈ㆍ본위는 이 때부터 20~30대를 겨냥한 캐주얼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잡게 됐다.
1995년 4월, 원저우 매장을 시작으로 미터즈·본위는 세를 넓혀가며 전국 각지로 뻗어나갔다. 그는 또 중국에서 널리 행해지던 생산기지는 교외에 두고 영업점포는 도시에 두는 의류업계 방식을 버리고 과감히 생산과 판매를 하청업체에 맡기고 모든 자금을 고부가가치인 상품 디자인과 마케팅에 투자하는 경영방식을 채택했다.
그리고 2003년 본사를 상하이로 옮기면서 한단계 더 도약한다. 이어 2008년 선전 증시에 성공적으로 상장한다. 당시 저우 회장은 선전 거래소에 금을 입힌 작은 재봉틀을 선물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나는 시골의 재봉사였다. 지금은 운 좋게도 중국의 재봉사가 됐다. 이후에는 전세계의 재봉사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저우 회장은 “부동산 개발업에 손을 댈 기회도 있었다. 부동산 사업을 했다면 자산이 아마 지금의 수십배는 됐을 것이다. 하지만 미터즈ㆍ본웨이는 없어졌을 것이다”라며 의류업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중국의 의류시장은 전례없는 불황을 겪고 있다. 미터즈ㆍ본위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말 저우청젠 회장은 “더이상 새로운 브랜드로 확장하지 않고, 기존 브랜드에 집중하고 차별화 하겠다”며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신전략을 밝혔다.
중국 대표 캐주얼 브랜드인 미터즈ㆍ본위는 이렇다할 로컬 의류 브랜드가 없는 중국에서 세계적인 캐주얼 브랜드 지오다노, 유니클로 등과 나란히 경쟁하고 있는 중국 의류업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저우 회장은 1965년 저장 리수이(麗水) 칭톈(靑田)현에서 태어났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어린나이에 재봉 기술을 배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최고 성적으로 현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농촌출신 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는 어린시절 열등감에 시달렸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살았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도 딱 두 가지 일만 한다. 하나는 좋아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인정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며 어린시절의 상처를 토로한 바 있다.
회사 이름을 미터즈(Meters)라고 지은 것도 촌스러운 이미지를 떨칠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맨주먹으로 시작해 흥했다가 망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 오뚜기 창업가다. 저우청젠은 고교를 졸업하고 17세에 고항에 의류 단추공장을 세웠다. 제품을 팔러 전국을 누비다 장시(江西)성에서 한 무역업체 사장을 만나 30만위안짜리 주문서를 받으면서 성공하는 듯 했지만, 이 행운은 그를 결국 파산으로 내몰았다. 원단 불량으로 의류 수출이 퇴짜 맞으면서 하루아침에 30만위안의 빚을 지게 됐다.
하지만 저우 회장은 수중에 남아있던 9000위안을 가지고 다시 시작해 재기에 성공했다. 주문이 넘치면서 잠도 자지 못하는 일상이 계속됐다.
당시만 해도 양복이 대세였던 중국 의류시장에서 그가 캐주얼 브랜드로 전향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실수로 짧게 재단한 양복 소매에 다른 천을 덧대 새로운 스타일의 캐주얼을 만들어 냈는데 이게 인기를 끌면서다. 미터즈ㆍ본위는 이 때부터 20~30대를 겨냥한 캐주얼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잡게 됐다.
1995년 4월, 원저우 매장을 시작으로 미터즈·본위는 세를 넓혀가며 전국 각지로 뻗어나갔다. 그는 또 중국에서 널리 행해지던 생산기지는 교외에 두고 영업점포는 도시에 두는 의류업계 방식을 버리고 과감히 생산과 판매를 하청업체에 맡기고 모든 자금을 고부가가치인 상품 디자인과 마케팅에 투자하는 경영방식을 채택했다.
그리고 2003년 본사를 상하이로 옮기면서 한단계 더 도약한다. 이어 2008년 선전 증시에 성공적으로 상장한다. 당시 저우 회장은 선전 거래소에 금을 입힌 작은 재봉틀을 선물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나는 시골의 재봉사였다. 지금은 운 좋게도 중국의 재봉사가 됐다. 이후에는 전세계의 재봉사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저우 회장은 “부동산 개발업에 손을 댈 기회도 있었다. 부동산 사업을 했다면 자산이 아마 지금의 수십배는 됐을 것이다. 하지만 미터즈ㆍ본웨이는 없어졌을 것이다”라며 의류업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중국의 의류시장은 전례없는 불황을 겪고 있다. 미터즈ㆍ본위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말 저우청젠 회장은 “더이상 새로운 브랜드로 확장하지 않고, 기존 브랜드에 집중하고 차별화 하겠다”며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신전략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