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주도해온 영·미의 반세계화 선언…한국의 선택은
[뉴스핌=이영태 기자]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계기로 촉발된 ‘신고립주의’ 후폭풍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세계를 호령하고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글로벌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했던 영국의 반세계화·반공동체주의 선언에 지구촌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나야 하는 불확실성과 카오스에 휩싸였다.
<이미지=바이두(百度)> |
‘브렉시트’는 1차 세계대전 후 심화된 글로벌경제의 불균형과 파시즘이 2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된 데 대한 반성으로 출발한 EU의 공동체주의와 통합정신이 퇴색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 유럽의 선진국으로 불리는 스웨덴과 네덜란드, 프랑스에서도 EU 탈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EU의 붕괴 조짐을 알리는 신호들이 경제여건이 나쁘고 재정상태가 불량해 유럽 내 ‘문제국가’로 꼽히던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신고립주의는 이미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안착했다. 오는 11월 대선을 치르는 미국에서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는 이민을 막기 위해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기존 자유무역질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미국인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영국인들의 EU 탈퇴 선언이 트럼프에게 백만대군보다 큰 힘이 됐을 것은 자명하다.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을 내세워 세계 정치와 경제질서를 주도하고 개입해온 영국과 미국에서 신고립주의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1970년대 이후 선진국 자본이 주도해온 ‘세계화’가 불평등과 양극화 심화로 인해 더 이상 생명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일차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세계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던 영국과 미국에서조차 자국 내 분배시스템에 대한 불만 고조로 신고립주의가 태동하는 아이러니한 현재 상황이 이를 방증한다. 지난 2011년 빈부격차 심화와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에 반발해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일어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시위도 같은 맥락이다.
두 번째 원인은 국가 간 격차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 내에서 독일 다음으로 큰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를 선택한 배경에는 EU 통합을 주도하는 독일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자국의 기여도에 비해 유럽 통합이 주는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정치적·경제적 주도권조차 2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에 뺏겼다는 불만이 ‘승전국’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자극했다.
세 번째는 세계관의 변화다. 특히 트럼프가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됐다는 것은 더 이상 미국이 ‘세계경찰국가’로서의 개입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귀찮은 ‘팍스아메리카나(미국의 지배에 의한 세계 평화질서)’를 유지하기보다는 속편한 ‘아메리카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브렉시트도 영국 경제의 부진을 EU의 각종 규제와 분담금, 이민자 유입 탓으로 돌리면서 탄생한 것이다.
◆ 신고립주의가 한국에 미칠 영향과 대안
브렉시트로 촉발된 신고립주의 확산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한국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대외의존도는 국민총소득(GNI) 대비 수출입 비율을 말한다. 수치가 높을수록 대외교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의미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로 세계 증시와 환율이 요동치고 있는 27일 오전 서울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에서 직원들이 파운드화와 유로화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김학선 사진기자> |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 대외의존도는 2014년 98.6%, 2015년 88.1%, 올 1분기 82.3%로 조금씩 하락하고 있지만 30%대에 불과한 일본이나 미국에 비하면 여전히 크게 높다. 게다가 최근 대외의존도가 하락한 이유는 내수가 확대됐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경제 불황과 보호무역 강화로 수출입이 감소해서다.
요컨대 미국 중국 EU 등 세계 52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 FTA 시장비중이 약 73.5%(세계 3위)를 차지하는 한국의 경제영토는 신고립주의가 확산될수록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정부는 영국과의 교역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을 들어 당장 브렉시트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對)영국 수출은 73억9000만 달러로 총 수출의 1.4%를 차지한다.
문제는 브렉시트로 EU가 다시 경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EU와 영국의 탈퇴 협상이 마무리되는 2018년까지 EU의 국내총생산(GDP)가 최대 0.5%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EU는 중국, 미국, 일본에 이은 한국의 4번째 교역국으로 연간 수출비중이 10%에 달한다. EU가 경기침체에 빠질 경우 중국과 미국, 일본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외교부는 27일 브렉시트에 대비한 별도의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중·장기적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필요하면 외교부에 브렉시트 TF를 개설해 체계적으로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브렉시트의 단기적 영향도 봐야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어떤 정책적 함의가 있을지를 심층 검토해 대책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브렉시트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로 풀이된다.
1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기식 (재)더미래연구소 운영위원장은 이날 ‘브렉시트를 보는 단상’이란 글에서 “브렉시트, 인종주의적 극우정당의 부상 등 선거와 투표라는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나타난 양상을 결코 긍정적으로 볼 수 없으나, 자본에 대한 민주주의적 개입, 자본에 대한 정치의 개입을 통해 세계화의 폐해를 시정해내지 못하는 한 이런 현상을 막을 수 없을 듯하다”며 “전후 수 십 년간 자본주의 황금기를 거친 이후 80년대부터 본격화된 세계화는 자본 주도로 일국적 수준의 정부를 무력화시키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화 자체를 거부하고, 반세계화, 고립주의로 가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수출입 무역비중이 절대적인 한국은 더더욱 그렇다”며 “그러나 이제 다시 자본과 국가의 역할을 다시 정립해야 할 시기인 듯하다, 그러려면 자본과 정치, 시장과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대안 모색이 필요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브렉시트를 초래한 신고립주의 확산을 ‘걸어온 어제’와 ‘걸어갈 내일’을 점검하고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선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낙오자는 없었는지(사회안전망), 아픈 사람은 없는지(분배시스템) 점검하고 보완해야 한다.
아울러 신고립주의 확산으로 세계경제가 움츠러드는 상황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만드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즉 정부는 브렉시트로 한국경제가 더 어려워졌다는 푸념과 변명에 그칠 것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일본을 묶는 ‘동북아시아연대’나 ‘유라시아연합’ 등 세계경제를 주도할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프라를 제시함으로써 신고립주의를 끊고 새로운 연대와 통합을 주도하는 방안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뉴스핌 Newspim] 이영태 선임기자 (medialyt@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