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망국의 옹주로 태어나 서러운 생을 살았지만 이처럼 서러운 적은 또 없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이토록 외로울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여인이 이토록 서러울 수 있을까. 내 곁에는 바람 소리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생략) 나를 낳은 나라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소. 이토록 삶이 무겁다니. 이토록 고단하다니….
권비영 작가의 소설 ‘덕혜옹주’의 한 단락이다. 비참하게 버려진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지난 2009년 출간 당시 100만 부가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그리고 이 소설은 7년 후 각색을 더해 영화로 재탄생됐다. 손예진, 박해일 주연의 ‘덕혜옹주’를 통해서.
배우 손예진(34)이 신작 ‘덕혜옹주’로 돌아왔다. 이번에 맡은 역할은 타이틀롤 덕혜옹주. 지난 7월 영화 ‘비밀은 없다’를 통해 평단을 놀라게 했던 그는 또 한 번 ‘인생연기’ ‘인생작’을 갈아치우며 충무로의 유일무이한 ‘믿고 보는 여배우’ 자리를 확고히 했다.
“첫 시나리오는 원작과 완전히 달랐어요. 영화는 한계가 있으니 빠지는 장면이 많았죠. 게다가 비극성을 너무 많이 보여주면 자칫 무겁거나 지루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실화인 망명 작전을 덧붙여 영화적 재미와 볼거리를 더했죠. 이게 또 상업 영화니까요. 물론 그러면서도 덕혜옹주의 인생을 거짓말해서는 안되기에 상상의 재미와 실제 삶의 균형을 맞추려 신경을 썼어요. 찍으면서도 (박)해일 오빠, 감독님과 계속 상의하면서 대사나 상황을 계속 바꿔갔죠. 각색이 많이 됐고, 그러면서 영화가 더 스펙터클해졌어요.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덕혜옹주의 일대기를 현실감 있게,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기보다 많은 분이 이걸 본 후 덕혜옹주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손예진의 말대로 덕혜옹주는 소설이 아닌 역사 속에 실재하는 인물이다. 데뷔 16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 배우지만, 역사적 인물을 연기한 건 이번이 처음. 소감을 묻는 말에 그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연기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랬기에 더욱 조심스러웠고, 그랬기에 매 장면 신중을 기해야 했지만.
“쉽진 않았어요. 전 연기할 때 어떤 인물이든 단순화하지 않아요. 풍성했으면 좋겠죠. 특정 역할이지만 연기적으로 하나의 선을 정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고요. 근데 이번엔 제약이 많았죠. 시대가 명확하고 인물이 살아간 시간이 사진으로 남아있으니까 접근조차 쉽지 않았어요. 평소대로라면 캐릭터를 ‘손예진화’시켜서 연기했을 텐데 안되더라고요. 계속 ‘덕혜옹주였으면 어땠을까’ 고민하게 되니까 더 어려웠죠. 감정의 폭발이 있더라도 그게 덕혜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선에서의 폭발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흔들렸지만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아팠지만 아프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지점들을 많이 고민했어요.”
혼란스러운 손예진에게 도움을 준 건 음악이었다. 평소 노래로 감정선을 잡아온 손예진은 이번에도 그 방법을 사용했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이란 가사가 담긴 나윤석의 ‘사의 찬미’가 그 중 하나다.
“음악은 ‘클래식’ 때부터 10년 넘게 듣고 있어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박태환 선수가 경기 전 음악 듣는 마음이냐고(웃음).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냥 영화에 맞는 노래를 들으면 집중하기가 좋아요. 주로 대기시간이나 메이크업 받을 때 들으면서 감정을 잡죠. 이번에는 나윤선씨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사의 찬미’ 같은 경우에는 윤심덕 선생님이 부른 버전도 있지만 아주 옛날 소리라 가사가 정확히 들리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나윤선씨 버전을 듣기 시작하다가 자연스레 그분의 노래가 우리 영화와 많이 맞는다는 걸 알았죠. ‘세노야’도 그렇고요. 어떻게 이 노래들을 알았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원래 옛날 음악을 좋아해요. 요즘 노래는 잘 모르지만(웃음).”
손예진과 ‘덕혜옹주’로 대화를 나누면서 ‘10억 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억 원은 손예진이 ‘덕혜옹주’ 촬영 당시 제작비로 투자한 금액. 그는 영화가 촬영 중반에 접어들면서 자금난에 부딪히자 자신의 출연료 두 배에 가까운 돈을 흔쾌히 내놓았다.
“배우들이 그런 경우 많잖아요. 출연료를 전액 투자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사실 이번 작품 같은 경우에는 제작 과정, 감독님이 이야기를 쓰고 투자받는 과정에서 난항이 있었죠. 또 사실 투자가 돼도 감독님들이 생각할 때 충분한 예산이 나오는 게 쉽지 않잖아요. 항상 주어진 것에 맞춰 찍어야 하는데 우리 영화는 시대극에 엑스트라도 많아 돈이 들어갈 곳이 많았죠. 시간을 더 할애할수록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고요. 아무래도 배우 입장에서 크게 찍고 싶은데 작품이 작아진다는 게 아쉬웠죠. 그래서 이러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투자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영화가 왠지 너무 잘될 거 같아서 회사에 ‘오~ 괜찮겠는데, 절대 손해 보지 않겠어’ 이러고 투자한 거고요(웃음).”
늘 바삐 움직여 온 그지만, 유독 올 상반기 손예진은 더욱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당장 지난달과 이번 달 ‘비밀은 없다’와 ‘덕혜옹주’를 연이어 선보였고, 올 초에는 한중합작영화 ‘나쁜놈은 죽는다’에 참여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만큼 이번 홍보 활동이 끝나면 당분간 휴식을 취하고 싶다.
“사실 ‘비밀은 없다’는 개봉이 일 년 정도 늦어졌어요. ‘덕혜옹주’는 올 초에 촬영이 끝났고 그사이에 ‘나쁜놈은 죽는다’를 찍었죠. 촬영 시기는 달랐는데 어쩌다 보니 ‘덕혜옹주’와 ‘비밀은 없다’ 개봉이 비슷해졌어요. 그래도 둘 다 걱정 많이 했는데 좋게 평가해주셔서 전 너무 행복하죠. 앞으로의 계획이요? 당분간은 좀 쉬려고요. 또 이러다가 바로 좋은 작품을 만난 적도 많지만, 일단 올해는 쉬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고 내년에 좋은 작품으로 인사드리고 싶어요. 근데 작품 찍을 때는 고통스러우니까 ‘이번엔 진짜 쉬어야지’하는데 돌아서면 또 시나리오 읽고 그래요(웃음). 아직은 뭔가를 정하고 싶진 않지만, 분명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또 하겠죠. 이러고 바로 나오면 안되는데. 하하.”
연기는 할수록 더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까. 손예진은 이번에도 이런 말을 덧붙였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연기 이야기가 나오면 그가 늘 습관처럼 뱉는 말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손예진이 당장 내일 차기작을 들고 온다고 해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무래도 경험이 쌓이면서 유연함이 좀 생겨요. 어릴 땐 제 역할에만 심취해 상대 연기도 못봤죠. 굉장히 시야가 좁았던 거예요. 현장에 누가 있었고 뭘 했는지 기억도 안날 만큼요. 하지만 경험이 쌓이다 보니 서서히 주위가 보이고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연기하는 데 있어 일종의 노하우도 생기고요. 단점은 나이를 같이 먹어 오지랖도 넓어진다는 거?(웃음). 어쨌든 지금은 배우로서 나름대로 깊어지고 있어서 좋아요. 더 깊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죠. 배우는 어떤 장르든 오롯이 그걸 표현해서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해야 하잖아요. 그러기 위해선 여러 감성과 정서가 필요한데 그런 지점들이 작품을 하나하나 하면서 더 깊어지고 있긴 하죠. 다만 더 오랜 선배들을 보면 흉내 낼 수 없는 깊이가 있듯 그분들처럼 더 깊어지고 싶은 바람이 커요.”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