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이형석 기자] “박범신의 ‘고산자’를 찍지 마라. 강우석의 ‘고산자’를 찍어라.” 강우석 감독(56)이 고민 끝에 소설 ‘고산자’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원작자인 박범신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눈물과 웃음, 감동과 해학, 그리고 아름다움이 깃든 강우석 표 김정호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강우석 감독의 스무 번째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지난 7일 베일을 벗었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고산자’와 김정호의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나라가 독점한 지도를 백성에게 돌려주고자 했던 김정호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작품. 강우석 감독은 널리 알려진 김정호의 삶을 더듬으며 다양한 시선으로 그를 재조명, 김정호를 지도에 미친 예술가, 딸을 둔 아비, 권력층과 충돌하는 힘없는 백성으로 묘사했다.
“쉽게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틀어버리면 더 복잡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가족들이 편하게 보면서 그의 업적과 대동여지도가 왜 가치가 있는지 정확하게 전달하자는 생각이었죠. 김정호가 백성들에게 지도를 나눠주려고 했던 이유 등이 선명하게 나오면 자극을 주지 않아도 감성을 건드릴 수 있다고 봤어요. 조금 더 세게 가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고문, 구타 등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없었고 수위도 낮춰서 찍었어요. 내가 내 입으로 ‘가족 영화’라고 처음 선언해서(웃음). 물론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다가 자칫 너무 얇은 영화가 나올까 봐 마음고생도 했죠. 근데 사람 사는 이야기, 아버지와 딸, 흠모하는 연인, 작업 조수와 티격태격하는 과정 등의 내용이 있으니까 절대 얇은 영화는 아닐 거라고 확신했어요.”
반면 박범신 작가가 특별히 요청한 것도 있었다. 자신이 활자로는 담지 못한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스크린에 펼쳐달라는 것. 강우석 감독은 기꺼이 동의했다. 하지만 촬영이 시작되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과정이 너무나 고됐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 말을 옮겨적자면, 매일 차를 타고 팔도를 누벼 자동차 트라우마가 생겼고, 전국에 단 두 개 남은 피나무를 구하느라 피가 말랐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그저 감사하지만, 촬영 초반엔 ‘이런 소설을 써서 날 죽이나?’ 싶었어요(웃음). 원망도 많이 했죠. 7시간씩 차에서 짐짝처럼 이동했거든요. 장소 찾는 거부터 선택하는 거, 찍는 거 모두 힘들었고 찍어놓고도 이게 맞는 건가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죠. 게다가 다른 영화들은 서너 군데서 찍는데 이건 10초 나오는 것 때문에 전국을 누볐잖아요. 정말 한 번도 기분 좋게 간 적이 없죠(웃음). 이제 산도 싫고 강도 싫고. 피나무도 이제 다 중국에서 수입해서 정말 전국을 뒤졌어요. 찍은 그대로 움직이면서 이거 한 번 더하라고 하면 안찍을 거예요. 하하. 이 고생할 줄 몰랐으니까. 머리에 쥐가 나서 저녁에 술을 안마시면 잠을 못잘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밤에 스태프들 불러서 술 마시고 술기운 빠지기 전에 잠들고 했죠.”
불행(?) 중 다행인 건 이런 강우석 감독의 노력을 관객들이 알아봐 준다는 것. 실제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관람한 관객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풍광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물론 김정호의 삶을 고스란히 옮겨 담으며 묵직한 감동을 준 스토리에도.
“감독들 다 똑같지, 뭐. 관객하고 만날 때 칭찬 들으려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다행히 ‘실미도’ 때 반응과 비슷해요. 관객이 그만큼 든다는 뜻이 아니라 다들 좋아해 주시니까 만들기 잘했구나 싶더라고요. 지인들한테 ‘감사합니다’라는 문자도 들어오더라고요. 이런 문자 정말 오랜만에 받았죠. ‘이끼’부터 ‘전설의 주먹’ 때까지 한 번도 문자 안보내던 사람들이(웃음). 이럴 때 고생이 보람으로 오는 거죠. 사실 다수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기 쉽지 않아요. 그래서 내 기본은 쉬운 영화를 어렵게 풀지 말자는 거예요. 수준만 유지하면서 유치하다는 소리만 안들으면 되지 않습니까. 온갖 직업, 온갖 연령, 온갖 생각, 그 다수를 만족하게 하려면 자기를 버려야 한다고 봐요. 그들과 호흡해야 하니까.”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강우석 감독이 중요시하는 건 결국 소통이었다. 그는 함께 작업하는 스태프들은 물론, 즐겨가는 카페 아르바이트생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며 더 많은 사람과 생각을 공유하고자 했다.
“소통은 가장 중요해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외곬으로 빠져서 혼자 예술가인 척하는 외골수 감독은 관객이 받아주지 않는 영화를 만들죠. 영화 하는 놈은 오래 쉬면 잘 만들 수가 없어요. 갈고 닦고 나온다? 투 레이트(too late)죠. 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또 그런 사람일수록 남의 말, 표현들을 안듣고 안읽죠. 모든 게 그렇듯 자주 만드는 사람이 잘 만들 확률이 높아요. 나이가 드는 거 하고 올드해지는 거 하고는 다르다고 봐요. 겉이 올드해져서 깊어지는 건 좋은데 ‘나이 들었구나’하는 건 경계해야죠. 전 임권택 감독님의 ‘화장’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연세에 감각이 정말 대단해요. 근데 보면 임권택 감독님은 늘 공부하세요. 후배들 시사회도 늘 찾아와주시고. 자기를 계속 출연하는 사람은 절대 못이기죠.”
강우석 감독은 그렇게 한참 동안 임권택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그러나 사실 강우석 감독 역시 임권택 감독 못지않은 노력파 현재진행형 감독. 역시나 최근 본 영화를 묻는 말에 ‘부산행’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터널’ 등 극장가 대작부터 저예산 독립 영화까지, 대답이 끊길 줄 몰랐다.
“영화 보는 사람이 영화 안보면 뭐합니까(웃음). 지금 애들은 어떻게 영화를 만드나, 어떻게 해석해나 하고 보는 거죠. 사실 남의 영화를 안본다는 사람도 있는데 봐야 자기 영화 만들 때 그들처럼 같은 방향으로 안가요. 난 새롭다고 했는데 이미 다른 사람이 한 걸 수 있잖아요. 남의 영화를 왜 안봐. 좋은 영화 있으면 봐야죠. 외화도 마찬가지고요. 소설을 잘 쓰는 분도 많은 독서에서 나온 결과물이거든요. 다른 사람 글 안읽고 어떻게 소설을 씁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독이 자기한테만 빠져있으면 절대 못벗어나요. 특히 유머는 더하죠. TV도 마찬가지고요. ‘삼시세끼’라는 대사를 넣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봐서 알 수 있었죠. 영화 안보고 드라마 안보고, 엄숙주의를 지향한다? 말도 안되는 거죠. 큰일 나요, 그거. 전 모든 걸 보는 잡식 형태가 되는 게 감독이 호흡을 잃지 않는 거로 생각해요.”
언제나 감각을 잃지 않고자 노력하는 그의 차기작은 미정. 강우석 감독은 “10월 즈음에 발표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말을 아꼈다. 다만 확실한 건 두 가지다. 반드시 코미디 장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는 것.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코미디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감동까지 가면 더 좋고요. 그리고 연출은 조금 과장하면 김정호 선생의 즐거움과 비슷해요. 그것만큼 위대하단 게 아니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희열이 있다는 의미죠. 사실 제작하면 100억 원을 벌어도 ‘다음 영화도 찍을 수 있겠구나’하는 정도에요. 아무런 감동이 없죠. 근데 직접 연출해서 관객의 반응을 받으면 살아있단 느낌이 들어요. 물론 초창기에는 의미가 있었죠. 1위 배급사가 시네마서비스(1993년 강우석 감독이 설립한 영화 제작·배급사)일 때가 있었거든요(웃음). 근데 한 10년 동안 제작·투자하면서 남은 게 뭐냐 보니까 그 사이사이 내가 찍은 영화뿐이더라고요. 근데 그걸 무슨 재미로 합니까. 그리고 3년 동안 연출 안하고 딴 사람이 영화 찍게 했더니 호칭이 ‘사장님’이 됐더라고(웃음). 그래서 감독 다시 해야겠다 싶었지. 하하.”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이형석 기자 (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