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보다 사랑, 사랑보다 예술(9)
철학에 깊은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버트런드 러셀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혼과 도덕에 관한 철학적 성찰 (Marriage and Morals)》,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자녀교육론(On Education, Especially in Early Childhood)》,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Principles of Social Reconstruction)》 등 일반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책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적이건 전문적이건 러셀의 책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의 책이 대부분 논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몇 개의 전제로부터 논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논증이라면, 러셀의 사상과 삶은 논리적 사고와 분리 불가능하다.
러셀은 20세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98년의 삶을 사는 동안 철학· 수학· 과학· 윤리학· 사회학· 교육· 역사· 정치학· 논쟁술에 이르는 적어도 40권 이상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했다. 그중에서도 1945년에 발간된 《서양 철학사(History of Western Philosophy)》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저작활동으로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좌파, 회의적 무신론자라고 자처하면서 사회변혁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그가 남긴 명언 중의 하나인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버트런드 러셀이 학생으로서 그리고 교수로서의 시간을 지낸 캠브리지 대학 <사진=이철환> |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주로 미국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러셀은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모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선임연구원(fellow)으로 활동하면서 BBC 방송에도 출연해 유명세를 탔다. 1949년에는 BBC 〈리스 강좌〉의 첫 번 째 강연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메리트 훈장을 받고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은 1872년 영국의 웨일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러셀(John Russell)은 빅토리아 여왕 하에서 두 번이나 총리를 지냈다. 일찍 부모를 여의게 된 러셀은 1878년에는 할아버지마저도 사망하여 어린 시절을 할머니 밑에서 보내게 되었다. 삶의 원칙이 분명하였던 그의 할머니는 어린 러셀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그녀가 즐겨 외던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출애굽기 23:2)’는 성경 구절은 러셀의 좌우명이 되었다.
러셀은 어린 시절 고독한 소년이었다. “어린 시절을 통틀어 내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정원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었다. 따라서 내 존재의 가장 강렬한 부분은 항상 고독했다.” 이러한 고독한 생활과 타고난 논리적인 성향으로 인해 그는 이미 11세 때부터 종교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고, 18세에는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정교육에 대해서도 회의했고 정치를 제외한 모든 문제에서 가족들과 견해를 달리했다. 그리고 경험적 사실만으로는 논리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11세 때 형을 통해 수학의 확실성을 알고 기뻐했으나, 그와 동시에 기하학의 공리(公理)가 증명할 수는 없고 믿어야만 하는 것임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이러한 상황은 러셀의 학문연구의 기본 틀이 되었다. 그의 학문연구의 목적과 방식은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가지고서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회의적이고 꼼꼼한 태도로 탐구하는 데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움에 대한 열망에 가득 찼던 청년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과 도덕, 과학을 공부한다. 특히 수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대학을 졸업한 러셀은 1895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이때 알게 된 그의 스승이면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을 엄밀한 연역적 증명체계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들은 일반 수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애매했기 때문에 엄밀한 수학적 증명체계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1903년 출간되어 러셀과 화이트헤드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수학원리(The Principles of Mathematics)》이다. 이 저서는 10년 후 집대성되어 전 3권으로 다시 출간된다. 두 저자는 《수학 원리》를 통해 수학의 자명한 원리로부터 논리적 원리를 도출해내려는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지만, 이 저서는 러셀의 다른 논리학 저작들과 함께 오랫동안 논리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수학 원리》를 출간한 뒤 러셀의 철학연구는 주로 논리적 분석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는 분석철학 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1902년 러셀은 "모든 것을 모아둔 집합에서 모순이 나온다는 사실"을 선언하면서 수학협회를 뒤집어 놓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러셀의 역설(Russell Paradox)’이다.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 집합, 즉 자기 자신의 원소가 되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인 Z={x l x¢Z}에서, “Z는 자기 자신에 속하는가, 또는 속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만일 Z가 Z에 속하지 않는다면 Z의 정의에 따라 Z는 자기 자신에 속한다. 또 Z가 Z에 속한다고 하면, Z의 정의에 따라 Z는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다. 어느 경우이든 모순에 도달한다.
이 패러독스는 사람들이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다음과 같은 일상생활에서의 예를 통해 설명된다. “어느 시골 마을에 단 한 명의 이발사가 있다.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지 않는 모든 마을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준다. 그러면 이발사 자신에 관해서는 어떻게 될까? 이 이발사가 자신의 머리를 깎는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머리를 깎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머리를 깎을 수는 없다. 만일 자기 자신의 머리를 깎지 않는다면 그는 그가 깎아 주어야 할 마을 사람들의 집합에 속한다. 따라서 어느 경우이든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다.”
러셀의 패러독스는 순수 논리적인 것이어서 논리학의 기초를 위태롭게 한다고 하여 한때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셀 자신을 위시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이어 나갔는데, 이것이 새로운 논리학과 수학기초론의 근저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러셀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리철학 논고》 또한 그 출발이 러셀의 패러독스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으로, 20세기 전반에 서양철학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러셀은 자신의 진실을 시대의 진실과 융합시키고자 저술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현실 속에서 몸소 행동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98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집필하였으며, 또 사회의 불의에 맞서 항상 지치지 않고 저항하였다. 그는 영국의 백작가문 출신의 귀족이었지만,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착취당하는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 확립을 주장하였다.
베트남전쟁 반전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에서부터 쿠바위기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도 적극 개입하였다. 1918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의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그리고 러셀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아랍연맹과 이스라엘이 맞붙어 싸운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 러셀은 여인들과의 사랑도 열정적으로 하였다. 결혼을 세 번 하였고 또 다른 여인들과도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그는 1894년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교도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앨리스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둘은 얼마 가지 않아 관계가 나빠져 오랫동안 별거생활을 하다가 결국 1921년 이혼했다. 이혼 후 바로 연인관계를 유지해오던 철학교수 출신의 도라 블랙과 결혼하게 된다. 그녀와는 자유방임 방식으로 운영되는 실험학교를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와도 1935년 이혼한 뒤 이듬해 1936년에는 그의 연구보조원이었던 퍼트리샤 스펜스와 3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러셀은 1970년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묘지는 그가 태어난 웨일즈에 마련되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은 휘몰아치는 바람과 같아서 고뇌의 심연속이나 절망의 저 끝까지 이리 저리 나를 휘몰고 갔다. (The 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 These passions, like great winds, have blown me hither and thither, in a wayward course, over a deep ocean of anguish, reaching to the very verge of despair.)”
아래 문구는 러셀의 자서전 맨 앞에 실려 있는 시(詩)이자 자신이 영면해 있는 묘소의 묘비명이기도 하다.
“이제 늙어 종말에 가까워서야
비로소 그대를 알게 되었노라
그대를 알게 되면서
나는 희열과 평온을 모두 찾았고
안식도 알게 되었노라
그토록 오랜 외로움의 세월 끝에
나는 인생과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노라
이제, 잠들게 된다면
아무 미련 없이 편히 자련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