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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단상] 뒤흔듦의 미학

기사입력 : 2017년09월26일 10:40

최종수정 : 2017년09월26일 10:40

일상에 흔히 보이는 것들로 뫼비우스적, 그 이상의 상상 여행을 하려 한다. 주변의 사물들엔 저마다 독특한 내력이 숨어 있고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 보석이 되기도 하고 나침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출발한 여행의 과정에 어떤 빛깔의 풍경이 나타날지, 그 끝이 어디까지 다다를지 필자 자신도 설레인다. 인문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 메타적 성찰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사물과 풍경, 시대와 인문을 두루 관통하면서 색다르면서도 유익한 여행을 떠나려 한다.

내가 자학적인 것일까. 매조키스트적인 면이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리학으로든 어떤 것으로든 규정되는 것 이상의 심연과 무늬가 있을테니까.
십 여년 전에 야간열차를 타고 스페인 남단의 그라나다에 내린 적이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을 향해 오르는 길은 짙은 녹음이 깔려 있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토속미가 물씬 풍기는 붉은 흙길을 걸어 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배낭 여행 중이었는데 그때껏 느껴졌던 것들과는 또달리 이채로왔다. 아름다운 꽃들이 즐비하고 분수 위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이슬람 문양의 창문 밖으로는 멀리 하얀 집들이 빛났다.

이 지역은 기독교 문화의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슬람 왕국을 이루었던 곳이다. 1492년에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탄에 의해 이 지역은 800년간의 이슬람 통치에 종지부를 찍는다. 스페인의 총칼에 의해 무어인들이 무참히 무너지며 이로써 유럽대륙에서 이슬람 세력은 완전히 추방되는 것이다.
같은 해에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 발견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몇 십년 후에 잉카 제국의 멸망을 초래한다. 다시 말해 유럽에선 이슬람이 무력으로 사라지게 되고, 자신들의 땅에서 고유하게 살고 있던 잉카의 원주민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스페인의 총칼에 의해 죽어가고 그들의 문명마저 파괴되는 것이다.

그런 중층적인 의미들의 중심에 놓인 궁전의 구석구석을 감상하고 나와 천천히 내려오는데 집시인듯한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이상한 풀을 손에 쥐어주었다. 향기가 취하도록 뇌쇄적이었다. 안달루시아 말인듯 빠른 주문을 읽으며 점을 쳐주고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었다. 댓가로 돈을 달라고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에 든 얼마를 내주었다. 그녀는 갑자기 매섭게 나를 노려보더니 악에 받친 듯 욕지거리 같은 말을 거칠게 내뱉고는 훅 떠났다. 나는 혼이 나가는 듯 했다. 아마 내가 준 것에 마음이 차지 않아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분명히 욕일텐데도 나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속이 한껏 뜨거워져 있었다.

십 여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난 그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알함브라 궁전이나 그에 깃든 의미들보다도 그녀가 내게 욕을 퍼부을 때의 찬란함이 훨씬 강력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왜 그럴까. 왜 나는 욕을 먹었음에도 따스함을, 결코 잊혀지지 않는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우선은 원초성일 것이다. 실로 그녀는 꾸밈이 전혀 없이 융단 폭격을 하듯이 내 마음을 긁어댔다. 한국에서 듣곤 하는 욕과는 그 깊이와 성질이 달라 보였다. 마치 태양빛 같았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살인을 저질지더라도 그 행위가 이해되도록 만들던 원초적 태양빛.
물론 그곳이 스페인, 그 중에서도 이색적인 특색이 강한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여서인 점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함의와 미학이 두툼한 알함브라 궁전에 내가 흠뻑 취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욕지거리가 나의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이기에 그 언어적 폭력성이 내 가슴을 찌르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난데없이 나타났고, 이상한 향기의 꽃마저 손에 쥐어주고, 뭔가 불쾌했는지 순간 내뿜듯이 퍼부은 의외성의 탓도 있을 것이다. 환상성으로 기울어지곤 하는 내 마음의 허영도 한몫할 것이다. 욕한번 시원하게 내지른 적이 거의 없는 소심함도.

그 모든 것들이 그 순간에 집약되어 나는 아름다움에 감전되듯 했다. 그녀의 욕은 그 밀도 속에서의 태양빛이었다. 나의 이성이든 뭐든 나의 벽을 순간적으로 깨고 들어온 날카로운 비수였으며 화엄이었다.
욕이란 것은 통상 좋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타인을 우롱하고 모독하며 폭력을 가하는 나쁜 욕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욕과 또다른 욕들이 분명히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 문둥이 같은 자슥아.’ ‘이 옘병할 놈이’. 나의 세대들은 그런 욕을 실컷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물론 부모나 친지들이나 이웃이 하는 그런 욕은 그 이상의 애정의 자장 속에 녹아 있는 것이 많다.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가슴 깊숙이 뭉클함이 느껴지곤 하는 것은 그때의 욕이야말로 그 사람의 정이 전달되는 가장 진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욕은 이처럼 다면적, 다층적이라고 생각된다.

욕을 하는 사회를 만들자 이런 말은 아니다. 욕 속에는 우리가 쉽게 버릴 수 없는 알록달록한 세계가 넘칠 듯 담겨있다는 말은 할 수 있다. 판소리 역시 그런 세계로도 이루어져 있다.
타레가라는 이름의 작곡가가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한 사람이다. 콘차 부인과의 사랑의 아픔 속에 알함브라 궁전을 거닐며 타고난 천부적인 감수성으로 그 명곡을 작곡한다.
음악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 곡은 특별한 아름다움으로 내겐 느껴진다. 그 사연의 절절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아우라마저 가미되어 그날의 알함브라 궁전의 관람은 내겐 너무도 값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날 집시 여인의 원초적인 욕지거리가 내 가슴에 불을 지르지 않았더라면 그날의 기억이 이처럼 완벽한 예술처럼 살아있진 못할 것이다. 극단은 극단과 부닥쳐 또다른 불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날의 아름다운 그림의 화룡정점은 바로 그 거친 욕지거리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아니 그것은 욕 이상이다.

이 이야기가 독자들에겐 아무런 감동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관적이며 변태적인 것으로 너무 과장을 떤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일지라도 내 가슴에 일어났던 그 일을 나는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날의 시간을 완벽하게 아름답게 만든 것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그 심연에 이르지 못했다. 여전히 다가가는 중이다.

이명훈(소설 ‘작약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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