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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톡] 양파 "가수 생활 20년, 앞으로는 더 꾸준히 활동 할게요"

기사입력 : 2017년12월11일 13:00

최종수정 : 2017년12월11일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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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핌=이지은 기자] “이번 싱글 앨범도 실험적으로 새로운 결과물을 바라는 마음으로 시도했어요. 다양한 곡에 맞춰서 그때그때 다른 페르소나가 되는 게 더 재밌더라고요. 앞으로도 진솔하고 진실하게 꾸준히 음악 해야죠.”

1997년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애송이의 사랑’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양파가 어느덧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익숙하고도 낯선, 조금은 새로운 신곡으로 대중들을 찾았다. 신곡 ‘끌림’으로 자신의 독특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했다. 이 곡은 그리운 사람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설렘, 익숙한 끌림과 그럼에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다시 만난 연인들의 떨림을 녹여낸 노래이다.

“오랜 만에 앨범으로 컴백하는 만큼, 정규 앨범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하지만 음악 시장이 빠르게 변한 만큼, 생각을 다시 고쳤죠. 한 곡으로 나오니까 그만큼 가사가 중요했어요. 그래서 작사에 직접 참여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가사를 만들고 싶더라고요. 신곡 ‘끌림’은 오랜만에 설렘을 느낀 화자가 그런 설렘도 익숙하지만, 어딘가 새롭다고 참 좋다고 말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에요. 제 노래가 발라드 치고 어렵고 낯설다고 느끼실까봐 일상에 닿아있는 말을 쓰려고 노력했어요.”

오랜만에 듣는 양파의 앨범이다. 싱글 앨범으로 치면 4년 만이다. 정규앨범은 10년 전에 발매한 것을 제외하고 아직 내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다. 이렇게 앨범이 늦어진 이유는 회사에 대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결과물이 늦어진 이유는 늘 똑같아요. 회사의 시스템 적인 문제죠. 회사와 갈등을 겪고 그로인한 아픔이 많다보니 늦어졌어요. 그리고 새로운 지금의 회사에 둥지를 트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죠. ‘나는 가수다’ 당시 소속사 없이 홀로 활동했는데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일이 몰려오더라고요. 자연스레 앨범 발매 시기가 또 늦춰진 거죠. 그러다가 오랜 음악 동료이자, 작곡가 김도훈 대표가 있는 회사로 들어오게 됐어요. 그리고 이제야 신곡 ‘끌림’을 낸 거고요.”

오랜만에 신곡을 발표하면서 창법에도 새로운 시도를 뒀다. 양파의 앨범 수록곡에서는 들어봤을 법 한 창법이지만, 그의 타이틀곡만 들었던 대중에게는 분명 신선한 창법인 셈이다.

“노래라는 틀 안에서 노래에 가장 어울리게 가사를 전달을 하고 싶어서 창법에 변화를 뒀어요.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바꾼 거죠.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한 창법도 수록곡 안에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거예요. 20년간 음악을 해오면서 그 곡에 맞게 창법을 변화시키면서 녹음을 해왔거든요. 가수가 한 목소리로 우직하게 소리를 내는 것도 좋지만, 저의 취향은 조금 달라요(웃음). 조금 더 다양하게 곡에 맞춰서 가사에 맞춰서 그때그때 다른 페르소나가 되는 것이 더 재미있더라고요. 이번 곡도 새로운 결과물을 바라는 마음으로 시도한 실험적인 결과물인 셈이에요.”

오랜만에 신곡을 냈기 때문인지 음원 파워 역시 대단했다. ‘아파 아이야’ ‘사랑…그게 뭔데’도 음원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번 신곡도 발매와 동시에 차트인하면서 상위권 진입을 겨누고 있다.

“음악 트렌드가 엄청나게 바뀌었고, 새로운 가수들이 나오다보니 100위권 안에도 못 들까봐 엄청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음원 성적에 대해 외면하고 있었어요. 가수 입장에서 순위가 당연히 중요하죠. 그래도 전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신곡 순위가 어디까지 올라갈지는 모르겠어요. 조금 더 외면하고 있으려고요. 하하. 다만 노래가 진짜 좋으면 다들 찾아서 들어주시니까 정말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데뷔 20주년을 맞았지만, 다른 가수들에 비해 폭넓은 활동을 하지 못해 부끄러움이 크다는 양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그는 그저 감사한 마음이 크다고 털어놨다.

“지난 세월을 치이고 밟히고 피 흘리면서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그 고통을 외면하면서 혹은 건망증으로 잊으면서 살았다고 느꼈죠. 하지만 제가 오만했다는 걸 알았어요. 제가 활동했을 때는 열심히 하면 성과를 얻었는데, 지금은 기회조차 없는 시절이잖아요. 운 좋게 살았다고 느껴요. 제가 일찍 데뷔해서 많은 분들 기억에 제가 자리 잡고 있더라고요. 정말 신기하고 감사해요. 그리고 제 팬 분들과 저를 응원해주는 분들에게 마음껏 음악을 못 들린 점이 너무 죄송해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죠. 더욱 열심히 찾아뵐게요.”

[뉴스핌 Newspim] 이지은 기자 (alice09@newspim.com)·사진=RB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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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기차 주행거리 두배 증가 배터리 개발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이 에너지 밀도를 두 배 증가시킬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음이온이 풍부한 용매화 구조 설계'를 개발해 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불소 함유 폴리에테르 전해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중국 관찰자망이 30일 전했다. 해당 연구 성과는 논문 형식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에 등재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폴리에테르 전해질은 고체이며, 연구팀은 해당 전해질을 사용하여 전고체 배터리를 제작했다. 제작된 전고체 배터리는 604Wh/kg의 에너지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150~320Wh/kg인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동일한 무게의 배터리이지만 해당 전해질을 사용한 전고체 배터리는 두 배 이상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 거리가 두 배 증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500km가량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가 1000km를 주행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전고체 배터리는 안전성 테스트도 통과하였다. 못을 박아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120도의 높은 온도의 박스 안에 6시간 동안 방치되었지만, 연소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500회 이상 충방전을 거치면서도 에너지 저장 용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된다면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해진다. 전기차의 주행 거리는 두 배 증가하며, 드론의 비행 거리도 두 배 증가하게 된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부피당 저장 용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며 ESS 소형화가 가능해진다.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전해질의 도식도 [사진=네이처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9-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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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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