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어 '장발장' 되는 사람들 막자…5년간 791명 도와
시민 후원금은 전부 대출금으로만 사용, 각계 각층 도움
홍 대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작가로 유명한 진보신당 대표
[서울=뉴스핌] 백진규 기자 =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병원비를 낼 돈이 없었던 A씨. 몰래 병원을 빠져 나온 그는 결국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병원비도 없는데 벌금 낼 돈이 있을까. 벌금을 못 내면 교도소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하는데 남은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하다. 장발장은행이 없었더라면, A씨와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까.
홍대 근처 작은 사무실에서 만난 홍세화 씨는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은행장'이라고 소개했다. 베스트셀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작가로도 유명한 홍 전 진보신당 대표는 5년째 장발장은행에서 벌금형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
[서울=뉴스핌] 백인혁 기자 =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이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소박한 자유인 사무실에서 뉴스핌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2020.03.04 dlsgur9757@newspim.com |
지난달 설립 5주년을 맞은 장발장은행은 사실 '은행'이 아니다. 법적인 실체도 없는 '계모임' 정도다. 대출은 해주지만 담보도 필요 없고 직업을 보지도 않는다. 이자도 안 받는다. 시민들의 후원금을 받아 벌금형을 받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사람들이 돈을 갚으면 다시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다.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에서 이름을 따 왔다.
"벌금형에 처한 사람이 벌금을 못내면 '환형유치' 제도에 걸려 교도소에 갇혀서 강제 노역을 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 중에 집안에 모셔야 할 어르신이나 돌봐야 하는 어린아이가 있거나 하면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이런 분들에게 벌금을 빌려주면서 장발장은행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장발장은행은 철저히 '생계형' 벌금형을 받은 사람들을 심사해 대출해주고 있다. 병원비를 못내 벌금형을 받은 A씨, 주유소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지 못해 2만원어치 쿠폰을 빼돌렸던 B씨, 새벽부터 배달일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낸 C씨...사연은 끊이지 않는다.
"사연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무관심하고 차갑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전무죄(有錢無罪)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 '유'자가 '있을 유'가 아니라 '유혹할 유(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난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생기는거죠. 또 이분들 중에 아프신 분들이 많아요. 제때 치료를 못 받으니까요."
특히 코로나19 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하는 지금, 홍 은행장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매년 경제는 더 어려워지는데, 코로나까지 더해져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으니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위기 앞에 서게 될까. "장발장은행이 얼른 문을 닫아야 할 텐데, 오히려 고객들이 더 늘어날 것 같으니 고민이 많지요." 홍 씨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지금까지 장발장은행에서 791명이 도움을 받았고, 그 중 125명이 돈을 모두 갚았다. 나머지 대출자들도 대부분은 조금씩이나마 돈을 갚고 있다. 6개월 거치, 12개월 분납 무이자대출이 원칙이지만, 실제 상환에는 더 오래 걸리거나 아예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대출금은 전액 시민들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지금까지 8000명의 시민과 단체들로부터 10억원 가량을 후원받았다.
"인권연대에 소속된 분들이 장발장은행 업무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직원 월급부터 사무실 임대료까지 뭐 하나 돈 나갈 일 없이 후원금은 전액 대출에만 쓰입니다. 물론 아무한테나 돈을 빌려줄 수는 없죠. 일반 은행처럼 여신심사위원회를 열어 대출 여부를 결정합니다. 인문학자 변호사 인권활동가 형법교수 등이 함께 참석하죠. 파렴치범을 먼저 걸러내고, 형편이 어려운 분들부터 대출해 드립니다."
안타깝지만 세상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다. 왜 하필이면 벌금형을 받은 사람들일까. 아무튼 법적으로 잘못한 사람들 아닌가? 홍 씨는 기자의 질문에 답답해했다.
"개개인의 안타까운 사연도 중요하지만, 법적 절차만 합리적으로 바꿔도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장발장은행을 일종의 '시위' 개념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법을 좀 고쳐라, 이거죠. 그래도 장발장은행이 생기니까 정치권도 조금은 움직이더군요. 그 동안 벌금형에도 집행유예가 생겼고, 벌금 분납제도 시행됐어요."
[캡쳐=장발장은행 홈페이지] 2020.03.09 bjgchina@newspim.com |
장발장은행이 출범할 당시만 해도 벌금형에는 집행유예가 없었다. 때문에 더 큰 범죄를 저지르고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집유로 풀려나고, 벌금형을 받은 사람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부분이 해결됐다는 것. 또한 벌금 분납제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도 줄어들었다. 덕분에 2018년 기준 벌금을 내지 않아 노역한 사람은 약 3만5000명으로, 전년(4만명)에 비해 줄어들게 됐다.
"아직 큰 산이 남아있습니다. 범죄에 따라 벌금을 정해놓은 총액벌금제를 개인 소득에 따라 벌금을 차등화하는 일수벌금제로 바꿔야 합니다. 누구한테 벌금 300만원은 껌값이지만, 또 누구한테는 생존이 걸린 문제거든요. 유럽 같은 경우는 '이 잘못은 5일 노역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다음 그 사람의 소득과 연동해 벌금을 정합니다. 2002년 핀란드 노키아의 부회장이 속도위반을 했다가 1억4000만원 가량의 벌금을 난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보도가 됐었죠."
홍 씨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의 재산소득을 알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수벌금제 법제화가 미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건강보험이나 재산소득세는 전부 소득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왜 법 집행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걸까요. 결국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 문제가 아닐까요?"
그래도 장발장은행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성과도 지속되고 있다. 지난달에는 경찰청과 사회적 약자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경미한 범죄와 소년범 등을 대상으로 서로 법적 조력 방안을 협의하고, 장발장은행의 지원내용을 홍보한대는 내용이다. 안타까운 전과자 발생을 조금이라도 더 막아 보자는 취지다.
홍 씨 개인의 삶은 어떨까? 파리 망명부터 시작해, 진보신당 대표를 지낸 정치인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온 그다.
"이 나이에 제가 현실정치에 관여할 게 있겠습니까. 이제는 글 읽고 책 쓰고, 사람들에게 인간의 따뜻함을 전달해 주는 일 하면 됐지요."
최근 그는 에세이집 '결: 거침에 대하여'도 냈다. 베스트셀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이후 11년만에 낸 책이다. 불의를 외면하고 인간다움을 포기해야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자고 작가는 말한다.
앞으로 은행의 계획을 물으니 홍 씨는 다시 웃었다. "얼른 은행 문 닫아야지요. 지금까지 5년동안 달려왔는데, 앞으로 5년 안에는 '은행장' 명함을 버리는게 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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