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브로드컴 동의의결 잠정 합의안 마련
내달 18일까지 이해관계자·관계부처 의견수렴
'신속한 피해 구제' vs '기업 봐주기' 논란 주목
[세종=뉴스핌] 김명은 기자 = 삼성전자에 스마트기기 부품 장기계약을 강제했던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200억원 규모의 상생 지원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
국내 반도체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중소 팹리스(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창업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피해 기업인 삼성전자에 대해서는 구매부품의 품질보증 기간을 3년으로 확대 적용하기로 했다. 신속한 피해구제와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특정 기업에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 장기계약 금지·삼성전자에 기술지원 약속…갑질 관행 개선 방안 마련
공정거래위원회는 브로드컴 미국 본사인 브로드컴 인코포레이티드와 한국지사인 아바고테크놀로지스코리아 등 4개사와 협의를 거쳐 브로드컴의 거래상 지위남용 건에 대한 잠정 동의의결안을 마련했다고 9일 밝혔다(아래 표 참고).
공정위는 10일부터 내달 18일까지 40일간 삼성전자 등 이해관계자와 산업통상자원부·중소벤처기업부 등 관계부처의 의견을 수렴한다.
동의의결이란 법 위반 혐의가 있는 사업자가 스스로 원상회복, 소비자 피해구제 등 시정방안을 제안하고 공정위가 이를 받아들이면 위법 여부를 가리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는 제도다.
공정위는 당초 브로드컴이 삼성전자에 대해 구매주문 승인 중단과 선적 중단, 기술지원 중단 등을 수단으로 스마트기기 부품 공급에 관한 3년간의 장기계약을 강제한 사건을 심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브로드컴은 지난해 7월 동의의결을 신청했고, 공정위는 두 차례 전원회의를 거쳐 같은 해 8월 브로드컴의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하기로 했다.
브로드컴은 앞으로 국내 스마트기기 제조사에 생산 중단 등 불공정한 수단을 이용해 부품 공급계약 체결을 강제하지 않기로 했다. 또 거래상대방의 부품선택권을 제한하지 않고, 거래상대방이 경쟁사업자와 거래하지 않도록 하는 이른바 '배타조건부 계약'도 체결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이와 함께 동의의결 시정방안과 공정거래법 준수를 위한 컴플라이언스(Compliance·준법 감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임직원 준법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적인 감독관을 임명하는 식이다. 동의의결 시정방안 추적 시스템도 구축한다.
브로드컴은 피해 기업인 삼성전자에 대한 보상 체계도 설계했다. 삼성전자가 장기계약 기간(2020년3월~2021년7월) 주문해 2022년 3월 이전에 출시한 스마트기기 제품과 모델에 탑재되는 브로드컴 부품에 대해 3년의 품질보증(warranty)이 적용되고, 이 기간 기술지원이 이뤄질 예정이다.
브로드컴은 삼성전자의 부품 주문과 기술지원 요청이 있을 경우 유사한 상황의 다른 거래상대방 수준으로 이를 제공하도록 노력한다는 내용도 시정방안에 포함시켰다.
◆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 중소 팹리스 기업 창업·성장에 200억원 지원
브로드컴은 2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국내 반도체·IT(정보기술) 분야 중소사업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기금은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운영할 예정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는 '반도체 인재양성센터(가칭)'를 설립해 국내 대학(원)생과 재직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를 포함한 국내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에 기금 77억원이 쓰인다.
협회는 또 팹리스 지원에 특화된 '혁신설계센터(가칭)'를 설립‧운영하고, 반도체 시제품의 기능과 성능 검증을 위한 환경을 구축한다. 여기에 기금 123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브로드컴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공정위는 반도체를 OS(운영체제), 앱마켓과 함께 디지털 경제의 인프라 산업으로 보고 올 한 해 이 분야 경쟁촉진에 정책의 우선 순위를 두기로 했다.
한기정 공정위원장은 지난해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반도체 시장의 경쟁압력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동의의결 과정에서 설득력 있는 결과를 도출해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브로드컴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공정위가 브로드컴과 130일간의 협의를 통해 이같은 시정방안을 도출해냈으나 동의의결을 둘러싼 논란에서 자유로울지는 미지수다.
지난 2011년 12월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도입된 동의의결제는 '헐값 면죄부'와 '신속하고 실질적인 피해구제'라는 상반된 평가를 얻고 있다. 법 개정 당시 공정위는 동의의결제 도입으로 소비자·시장·기업·정부 모두에게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법적·행정적 절차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 피해를 신속히 구제할 수 있고, 기업은 시장 상황에 맞는 조치를 발 빠르게 취함으로써 이미지 실추를 방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 봐주기' 논란도 지속되고 있다. 국내 이동통신사에 아이폰 광고비와 수리비를 떠넘겨왔던 애플은 지난 2021년 1000억원 규모의 상생 기금을 조성하겠다는 내용의 동의의결안을 제시했다. 당시 국회에서는 광고업계 추정을 근거로 애플이 2009년부터 국내 이통사에 전가한 광고비가 1800억~2700억원에 달한다며 애플이 제시한 1000억원의 동의의결안 금액이 터무니없이 작다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다.
심재식 공정위 제조업감시과장은 "피해 금액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며 삼성도 당초 수십억원이라고 했으나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면서 "상생기금 200억원은 공정위가 매길 수 있는 최대한의 과징금을 넘어서는 규모"라고 설명했다.
심 과장은 "공정위가 심의 절차를 그대로 진행했을 때 취할 수 있는 재재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으로 브로드컴의 동의의결안이 마련됐다"고 거듭 강조했다.
dream78@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