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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들의 일터]'통상 전문가' 유명희 서울대 교수 "늘 공부해야 하는 삶 그래도 행복"

기사입력 : 2023년07월29일 08:00

최종수정 : 2023년07월29일 10:52

"하루도 빠짐없이 영어로 듣고 말하고"
협상은 상호과정, 철저한 준비로 무장
한국, 국제사회 룰 메이커 역할 해야

[서울=뉴스핌] 김경선 행복한직장생활연구소장 = 절박할수록 돌아갈 수 있는 있는 지름길이나 꼼수는 없다. 우리 사회 일터 고수들에게는 그들만의 성공 노하우가 있다. 어떤 철학을 가지고 일을 대하는지, 그 일터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까지 지난했던 과정과 그늘들, 화려함 뒤에 가려진 노력과 자세를 곱씹어 보면서 성공의 실마리를 찾아볼 일이다. 고용노동부 관료를 거쳐 여성가족부 차관까지 일자리 문제를 전문적으로 고민하고 일터의 정점까지 올랐던 김경선 행복한직장생활연구소장이 각 전문 분야의 고수들을 만나 그들만의 경험과 비밀스러운 성공 레시피를 듣는다.

이른 여름 장마가 시작된 6월의 늦은 날, 세찬 비를 뚫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연구실에서 마주앉은 유명희 교수(전 통상교섭본부장)는 산뜻한 자주색 정장 차림에 당당하고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30년을 알고 지낸 지인이지만 한결같은 성실함에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고 한순간도 공부를 내려놓을 수 없는 통상전문가의 삶을 계속 해오고 있는 그의 강한 의지에 인터뷰 내내 저절로 감탄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의 휴대폰에는 Economist, Financial Times 같은 경제지뿐 아니라 외교 관련 전문지, 반도체나 2차전지 등 산업의 흐름을 공부하기 위한 채널 등이 잔뜩 깔려 있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이고 그동안 이루어온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적당히 누리고 살고 싶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리 일정이 바빠도 세계 경제의 흐름과 통상 이슈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도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하고 있다는 유 교수를 보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통상전문가로 자리 잡은 것이 우연이 아님을 실감하게 됐다. 녹음이 짙은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마주앉은 그는 그야말로 통상 분야의 '작은 거인'이었다.

유명희 교수.

◆ "美 통상압력 국가 핫 이슈...해결에 동참하고파"

- 공직생활의 처음은 통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아는데, 통상업무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 제가 공무원을 시작한 무렵인 1992년은 다자무역체계를 확립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기로 통상 문제가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어젠다 중의 하나였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어렵지만 국민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돼서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각 부처의 일을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총무처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통상업무를 담당하는 통상산업부로 자원해서 옮겼습니다. 당시 통상산업부에서도 여성 통상전문가를 키우겠다며 각 부처 여성 사무관 중에 적임자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미국 통상교섭본부(USTR)의 대표였던 칼라 힐스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칼라 힐스 대표가 한국을 방문해 관련 부처의 장관들과 면담하면서 강하게 압박하던 모습이 전 국민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한국도 남성 일변도였던 통상 전문 분야에 여성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통상산업부에서 "한국의 칼라 힐스"를 키우겠다고 공언하는 바람에 그 용어가 저에 대한 수식어로 내내 따라다닌 것 같습니다.

◆"통상을 하려면 숲과 나무를 모두 볼 줄 알아야"

- 통상전문가는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할까요.

▲통상업무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디테일에만 치중해서도 안 됩니다. 통상 관련 분쟁이 발생하면 법적 지식을 갖춰 국제 분쟁처리절차에 대응해야 하고, 농산물이나 공산품 등 품목별 협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해당 품목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잘 알아야 합니다. 국제 통상 흐름을 예측해 나갈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 숲을 볼 줄 아는 전략도 있어야 합니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어느 후보가 이길 것인가를 단순히 예측하기보다는 우세 후보가 있다면 해당 후보가 우세하게 된 미국 사회 변화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짚어볼 줄 알아야 제대로 된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될 당시 러스트 벨트로 일컬어지는 지역 노동자들의 불안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사전에 짚어볼 수 있었고, 그를 토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공약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가 단순한 공약이 아니라 진짜 실행에 옮겨질 수 있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재협상을 미루는 지연 전략을 쓰기보다 신속하게 협상을 진행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개정사항을 최대한 좁혀서 가장 효율적으로 협상을 타결하고 한미 교역투자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멕시코·캐나다와 미국 간의 USMCA나 미국과 일본 간에 진행된 미일 무역협정의 경우 더 많은 것을 양보했다는 평가에 비하면 효과적인 대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 국제통상업무를 하면서 언어장벽이나 잦은 해외출장에 따른 어려움은 없었는지.

▲ 어느 나라에나 통상업무가 중요한 일이겠지만,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중요하면서도 쉽지 않은 것이 통상업무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5대 제조강국이지만 동시에 농수산 부문의 민감성을 가지고 있어 국내 다양한 분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국제 무대에서 언어나 문화적으로 우리와 같이 묶이거나 같은 경제공동체에 속한 나라도 없어서 우리 상황에 필요한 이익을 지키기 위해 더 치열하게 공부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요. 그 점은 대한민국 통상전문가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허들 중 하나가 바로 언어 문제입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초·중·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한국에서 공부한 순수 국내파인 저에게는 영어는 매일 듣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였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협상을 앞두고 최소 1주일 전부터는 집에서 가족과 대화할 때도 영어만 쓰기도 했습니다.(웃음) 그리고 협상이 시작된 후 예측불가한 상황도 종종 발생합니다. 한번은 미국에서 진행된 협상이 당초 1주일을 예상했는데 3주를 넘기게 되어 출장 중에 계절이 바뀌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국내에 있는 가족에게 옷을 인편에 보내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유명희 교수.

◆ "협상은 상호작용...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돼"

- 통상전문가로서 협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국가 간 통상협상을 앞두고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해당 산업 분야의 우리나라 실태, 강점과 약점, 상대국의 해당 산업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상대국의 정세, 세계 경제의 흐름 등을 모두 파악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협상 과정은 한마디로 탁구 경기처럼 상대의 공이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야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외교적인 수사로 정해진 대화만 주고받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협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협상단이 구성되고 맡은 파트마다 협상책임자들이 있어서 우리 협상단 내 협업과 신속한 정보교환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약하자면, 평소 지속적인 공부를 통한 철저한 준비, 신속하고 유연한 대응력, 그리고 협업하는 자세가 성공적인 협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 하겠습니다.

- 통상전문가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 때는.

▲ 앞서 얘기했던 트럼프 정부 때 한미 FTA 협상이 우리의 전략적, 적극적 대응으로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타결된 건이 보람 있었습니다. 또 제가 통상교섭본부장에 취임한 이후에는 8년을 끌어온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마무리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 협정은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3개국, 호주· 뉴질랜드 등 15개국이 관세장벽을 철폐하고 서비스 시장을 추가 개방한 FTA로, 협정 체결 결과 전 세계 총생산의 30%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FTA가 출범하게 되는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협상이 본격화한 2019년과 2020년 정상 간 협정 체결 직전 마무리 과정에서 장관회의만 16차례를 가졌고, 그 기간에는 참여 국가의 통상장관들과 함께 한 식사가 남편하고 식사한 것보다 더 많았다고 농담할 정도로 자주 만나고 오랫동안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협상 타결 막바지에는 실무자 배석 없이 장관들끼리 회담 장소도 아닌 곳에 모여앉아 밤을 새우다시피 문구를 다듬은 일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 당시 함께 협상했던 통상장관들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에서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 "WTO 사무총장 선거, 한국 위상 강화에 도움"

- WTO 사무총장 선출 과정에서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아쉬운 점은 없는지.

▲ WTO 사무총장 선출 기간에 164개 회원국 중 100명이 넘는 통상장관들과 만나거나 통화를 했습니다. 후회 없이 뛰었고 미국 USTR(무역대표부)에서는 "통상 분야에서 뛰어난 역할을 해온 진정한 통상전문가"로 저를 평가하고 공식 지지 선언까지 해주었죠. 특별한 지역적 지지 기반 없이 시작해 최종 2인까지 올라간 것에 대해 많은 통상장관들이 훌륭한 선거 캠페인을 벌였다고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이번 도전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국제 무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토대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G8 국가라고 할 정도로 무역이나 경제 규모도 큽니다. 이제는 국제사회 룰 메이커로서 역할을 해나가도 될 정도입니다. 호주나 싱가포르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국력에 비해 국제 무대에서 우리보다 훨씬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그런 역할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통상전문가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희 교수는 2019년 외교통상본부장 시절, 미국에서 열린 통상전문가 간담회 때 칼라 힐스 전 USTR대표를 만났다. 

◆ "한국의 칼라 힐스가 미국 칼라힐스를 만나다"

- 재미있었던 일이나 협상의 뒷이야기를 전해준다면.

▲ 2019년 통상본부장 시절, 미국에서 열린 통상전문가 간담회 때 칼라 힐스 전 USTR 대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통상전문가의 길을 걷게 된 데 영향을 줬다고 하니 매우 반가워하면서 함께 사진을 찍었죠. 같은 여성으로서 같은 길을 가는 것에 대해 공감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협상을 할 때는 상대방의 특성을 미리 파악하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라이트하이저 전 USTR 대표는 상대방이 불합리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하면 아예 의견서를 접어서 협상장 안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려버리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철저한 준비를 해서 논리적인 대응이 필요한 스타일이죠. 저하고는 아까 얘기했듯이 USTR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기구 선거에서 다른 나라 출마자에 대해 보도자료까지 내면서 공식 지지를 표명할 정도로 인정하는 사이가 되긴 했습니다.(웃음)

- 통상전문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 저는 통상업무만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제가 중견 사무관이 됐을 때 통상업무가 통상산업부에서 외교통상부로 이관됐습니다. 이때 산업부에 그냥 남을 것인지, 업무를 따라갈 것인지 고민이 됐고 주변에서 산업부에 남기를 권유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수년간 근무한 조직이 주는 익숙함, 그리고 역량에 대한 평가가 이미 내려진 조직에서 근무하는 수월함도 컸지만, 통상전문가의 길을 가는 것이 힘들더라도 제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해서 외교부로 옮겼습니다. 그 뒤 국장으로서 통상산업자원부로 다시 왔고요. 어려운 길만 쫓아다녔다고 할까요? 그래도 이 길이 저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상업무는 힘든 업무이지만 노력하는 만큼 보람도 정말 큰 업무입니다. 노력하고 준비하는 만큼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불합리한 차별도, 불공정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시각에서 오래 근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기간에 무슨 성과를 기대하는 조급함은 없애는 것이 좋습니다.

유명희 교수
△1967년 울산 출생 △정신여고 △서울대 영문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미국 밴드빌트대 로스쿨 △행정고시 35회 △대통령비서실 외신대변인 △산업통상자원부 자유무역협정교섭관 겸 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추진기획단장·통상정책국장·통상교섭실장·통상교섭본부장

유명희 교수와 김경선 소장.

<에필로그>
유명희 교수는 공직생활을 함께 시작한 오랜 동료이자 학교 선배다. 공직생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인터뷰를 하면서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는 노력파였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통상교섭본부장, 그리고 통상전문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그 자리까지 오른 것이 흔히 말하는 관운이 아니라 정말 그가 흘린 땀방울의 결실이었음을 확실히 알게 됐다.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선임 고문, 우드로윌슨센터 한미일 경제협력위원을 겸하여 활동하는 그를 보면서 그 열정이 어디서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이기에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영어 공부와 경제 공부에 전념하면서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이 아닐까? 인터뷰를 마치고 오면서 이제는 한국의 칼라 힐스가 아니라 제2, 제3의 유명희를 꿈꾸는 후배들이 우리나라 통상의 최일선에서 뛸 날이 곧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됐다.

*김경선 행복한직장생활연구소장은 1991년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했다. 30년 넘는 공직생활 대부분을 고용노동부에서 보냈고, 마지막으로 여성가족부 차관을 역임했다. 은퇴 후 공직생활에서의 경험과 역량을 MZ세대 직장인들과 공유하고자 행복한직장생활연구소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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