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1번지' 서울 서초동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법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서초동 법풍경]은 법원과 검찰·법조계 인물·실제 재판의 이면 등 취재에 다 담지 못한 에피소드를 알기 쉽게 전합니다.
[서울=뉴스핌] 백승은 기자 = "형사재판부로 와서 본 사건 중 죄질이 가장 나쁘다. 어떻게 (전 여자친구) 아들 어린이집에 (성관계 영상을) 보낸다고 협박할 수 있냐."
판사의 재량이 제 각각인 만큼 법정에서 판사가 건네는 말도 다양하다. 선고기일의 경우 대부분 판사는 준비된 판결문을 읽는 데 그치지만, 이따금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판사도 있다.
지난 8월21일 서울고법 형사12-1부(재판장 홍지영)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영리목적카메라등이용촬영물반포등) 등 혐의를 받는 피고인 A씨에게 항소심 선고를 내리며 이처럼 이례적으로 '호통'을 쳤다.
◆ "영상 뿌린다, 허튼 행동 하지 마" 협박한 전 남친…항소심도 실형
"차단하거나 피하는 순간 영상·사진을 인터넷을 비롯해 가족들이 다니는 직장부터 집 앞 동네까지 모두 뿌릴 예정이다. 아들의 어린이집은 물론 엄마, 남동생도 그렇다. 섣불리 허튼 행동하지 마라."
A씨는 지난 2023년 전 여자친구이자 피해자인 B씨와 사귈 당시 촬영한 성관계 영상을 메일로 보내며 '다시 만나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A씨는 이런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며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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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박에 그치지 않았다. A씨는 자신을 B씨인 것처럼 소셜미디어에 계정을 만들고, B씨의 얼굴이 모두 드러난 영상을 게재했다. 마치 B씨가 소셜미디어를 운영하는 것처럼 가장해 계정을 홍보하기도 했다.
B씨에 대한 협박과 스토킹 혐의와 별개로 A씨는 79개의 음란물을 유료 사이트에 유포해 약 950만원을 번 혐의도 받는다.
항소심 재판부는 3년6개월을 선고했다.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와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등과 장애인 관련기관에 각 3년간 취업제한, 음란물 유포에 따라 번 수익금(950만원)도 추징했다.
선고를 마친 후 판사는 '죄질이 나쁘다'라며 큰 목소리로 A씨를 다그쳤다. 이날 법정에 자리했던 A씨는 1심에서 이미 실형을 선고받은 상태라 수의 차림이었다. 선고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A씨는 판사의 꾸지람에 연신 허리를 숙였다.
◆ 고문 끝에 사형당한 희생자…재판부, 유족에 "사과와 위로 뜻 밝혀"
A씨의 선고 후 일주일 뒤, 또 다른 판사는 무고한 희생자의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권순형)는 8월28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고(故) 김태열 씨 재심 사건 선고 기일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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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 [사진=뉴스핌 DB] |
김 씨는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 당시 사형 선고를 받아 사망한 인물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였던 1968년 중앙정보부는 통일 운동을 하던 통혁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남한에서 반정부·반국가단체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고 김 씨 등을 재판에 넘겼다. 이후 김 씨는 1심과 항소심에서 공소사실이 모두 유죄로 판단돼 1975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수사 과정은 고문으로 얼룩졌다. 보안사 수사관은 김 씨 등을 불법 감금한 채 가혹 행위를 통해 암호 방법서, 기본 암호표, 통신 조직도 등을 압수해 재판에서 유죄 증거로 삼았다.
재판 과정에도 하자가 가득했다. 김 씨는 가정 형편상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했는데, 1심 판결문 사본도 전달받지 못한 상태에서 혼자 항소이유서를 작성해야 했다. 김 씨와 함께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 몇몇은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육군본부 등은 이들 변호사의 해임을 종용했다.
선고 기일에는 사망한 김 씨의 자녀이자 재심을 신청한 김영주 씨가 직접 피고인석에 앉았다. 김영주 씨는 판결 이유를 듣는 내내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재판부는 김 씨가 법정에서 한 진술 증거 능력 및 증명력과 압수물 및 압수 조서의 증거 능력 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말미에 "억울하게 고초를 겪으며 힘든 세월을 견뎌온 피고인의 가족분들에게 사과와 위로의 뜻을 밝힌다"라며 선고를 마쳤다.
가만히 선고를 듣던 김영주 씨는 '감사합니다'라며 재판부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인사를 건넸다.
100win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