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 주범' vs '양민 보호'… 박진경 평가 두 갈래로 갈라진 4·3 기억
무공훈장까지 뒤흔드는 재검토… 보훈 행정 신뢰·법적 안정성 흔들
[서울=뉴스핌] 오동룡 군사방산전문기자 = 국가보훈부가 제주 4·3 당시 9연대장이었던 고(故)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위를 '절차 하자' 명분으로 재검토하기로 하면서, 정작 수십 년간 방치해 온 4·3의 역사적 논쟁은 그대로 둔 채 정치·여론 눈치에 따라 보훈 행정을 뒤집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보훈부는 이르면 1월 말, 늦어도 2월 초 박진경 대령 양손자 박철균 예비역 육군 준장 등 유족에게 국가유공자 등록 재검토 방침을 공식 통보할 예정이다. 박 예비역 준장이 신청한 국가유공자 등록은 2024년 10월 승인됐고, 박 대령은 이미 전몰군경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보훈부 업무보고에서 "4·3 유족들 입장에선 매우 분개하고 있는 것 같다. 방법을 찾아보자"고 지시해, 사실상 등록 취소를 향한 정치적 '가이드라인'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보훈심사위원회에 안건이 상정되면 최소 6개월 이상 심의가 이어질 전망이며, 여권·야권 모두에서 4·3과 보훈 문제를 둘러싼 정치 공방이 격화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은 유공자 등록 신청권을 본인·배우자·자녀·부모 등 일정 순위의 유족에 한정하고, 이외 친척은 보훈심사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보훈부는 박 대령이 직계 비속 없이 전몰한 뒤 집안 결정으로 조카가 양자로 입적됐고, 이 양손자가 신청인이라는 점을 들어 "법이 정한 유족이 아닌 제3자 신청이므로 심사위를 거치지 않은 등록은 절차상 하자"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런 '절차 엄격론'이 박 대령 사례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인상이 짙다는 점이다. 그동안 보훈부는 법률상 유족이 아닌 인물이 신청하더라도 서훈·범죄 경력 조회에서 문제 없으면 심사위를 일일이 열지 않고 관행적으로 유공자 등록을 승인해왔다고 시인했다. 권오을 장관이 "지금까지 관행에 따라 발급했었다. 앞으로는 절차를 좀 더 엄격하게 할 것"이라고 밝힌 대목은, 앞에서는 '하자'를 내세우면서 뒤에서는 스스로 관행적 처리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양손자 신청을 빌미로 삼아 국가유공자 지위를 뒤집는다면, 같은 방식으로 등록된 다른 유공자들에 대해서도 재검토를 할 것인지, 아니면 박 대령에게만 예외적으로 잣대를 들이댈 것인지에 대한 형평성 논란은 불가피하다.
1948년 5월 제주에 부임한 일본군 출신 박진경 중령(당시 계급)은 김익렬 연대장 후임으로 9연대 지휘를 맡은 지 한 달 만인 6월, 남로당 세포였던 부하 장교·하사관들의 공모로 피살됐다.
일부 4·3 단체와 유가족은 당시 부하 진술 등을 근거로 그를 '양민 학살 주범'으로 규정하며 국가유공자 지정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국군777정보사령관을 지낸 제주 출신 한철용 장군(예비역 육군 소장)은 "박진경은 남로당이 일으킨 무장 폭동과 혼란 속에서 선무공작과 제한적 강경 진압을 병행하며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 했던 지휘관이지, 좌파 진영이 주장하듯 '학살 악마'가 아니다"라며, "박 대령이 부임 한 달 만에 남로당의 사주로 제거되지만 않았다면 이후 중산간 초토화 작전 등 무차별 토벌 양상과 대규모 양민 희생은 지금과 같은 규모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박 대령에게 1950년·1952년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됐다는 점을 근거로 2024년 국가유공자 등록을 승인했고, 이는 2025년 11월 다시 발급된 국가유공자 증서를 통해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하는 절차로 이어졌다.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를 검토하면서 정부는 애초 그 근거였던 무공훈장 수여의 적정성부터 다시 들여다보려 했지만, 당시 공훈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진상 규명에 난항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공적 기록을 끝까지 찾아내지 못하자, 정부·보훈부는 '양손자는 신청 자격이 없다'는 절차 논리로 방향을 틀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족 측은 "박 대령이 민간인을 학살한 적 없다는 증언과 남로당이 암살을 계획한 기록이 있다"며 "자유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을, 정치적 논란이 커졌다는 이유로 다시 법적 지위를 흔드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한다.
이대로라면, 당시 훈장을 수여한 국가의 공식 판단과 그 후 수십 년간 유지돼 온 전몰군경·무공수훈자 체계 자체가 현재 정치 상황에 따라 번복될 수 있다는 신호를 주게 된다. 보훈 행정의 예측 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셈이다.
보훈부는 최근 논란을 계기로 "앞으로는 절차를 더 엄격하게 하겠다"며 실무자 내부 감사까지 진행 중이지만, 그 이전까지의 관행을 공식적으로 바로잡는 제도 정비보다는 '사후 책임 전가'에 치중했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제주 4·3은 이미 대통령 사과, 특별법 제정, 국가추념일 지정 등을 통해 국가 책임과 희생자 명예회복의 방향이 대체로 정리된 사건이지만, 박진경 대령과 같은 논쟁적 인물에 대해서는 정치·이념 구도에 따라 평가와 예우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이번 박진경 대령 국가유공자 재검토는 '학살 주범이 어떻게 유공자냐'는 도민·유족의 분노와, '남로당 제주도당 폭동 상황에서 제주도민을 지키려다 피살된 장교'라는 반론이 정면 충돌하는 지점에 서 있다. 그만큼 더 필요한 것은 일관된 법 적용과 투명한 사실 검증인데, 정작 보훈부는 관행적으로 승인해온 절차를 문제 삼아 특정 사건에만 소급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전문가들은 "보훈부가 진정으로 4·3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다면, 정치적 기류에 맞춘 '유공자 취소' 신호 보내기부터 멈춰야 한다"며 "박진경 대령의 공훈·가해 여부와 무관하게 사실을 끝까지 추적하고 법과 원칙을 동일하게 적용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gomsi@newspim.com












